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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ㅣ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저기요. 죽여 드릴까요? 싫다고요? 미쳤냐고요? 왜요. 당신 어제 부장한테 심하게 깨지고, 사내 왕따 당하고. 친구 하나 없이 기러기 아빠로 사느라 변변찮은 식사도 한 끼 제대로 못 하면서 매달 부쳐야 될 돈 때문에 일을 그만두지도 못 하잖아요. 그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지 않나요? 죽고 나면 영혼은 행복한 천국으로 갈 텐데. 당신 교회 다니잖아요. 죽을 때의 고통이 두려운 거라면 제가 정말 편안하게 한 방에 보내드릴 수 있어요.
그래도 싫다고요? 잘 생각해봐요. 사실 왜 죽음이 나빠요? 심장 박동이 멈추고 사고가 정지하고 육체가 땅에 묻히고 나면 말예요. 본인에겐 나쁠 게 하나도 없어요. 아무것도 느끼고 생각할 수가 없는데 나쁘긴 뭐가 나빠요. 가족들을 못 보는 것? 이미 7년째 안 보고 살잖아요. 남은 인생의 즐거움? 제가 보기엔 당신 앞으로 20년은 더 등골이 휘게 돈 벌어서 자식들 부양해야 하고 자식들 크고 나면 쇠약해져서 그 놈의 즐거움 맛이나 보려나 모르겠어요. 남은 가족들? 음. 보험료 많이 받을 수 있게 처리해 드릴게요.
어때요? 내 말이 이제 좀 들어와요? 그래도 죽기는 싫다고요? 그래도 사는 게 낫다고요? 아 거참 지나치게 낙관적이시네. 소위 ‘낙관론자’들은 그러죠. “삶은 절대적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 삶은 언제나 죽음보다 더 낫다.” 하지만 그거 알아요? 낙관론자만큼 비관론자들도 많다는 거. 그들은 “우리 모두 죽는 편이 낫다. 가장 좋은 것은 애초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해요. 이도 저도 아닌 중간론자도 있어요. 삶에서 겪는 즐거움과 고통을 각각 플러스, 마이너스라고 했을 때 플러스가 많으면 낙관, 마이너스가 많으면 비관인 셈이죠. 그러니 개별 사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고 해요. 당신은.. 중간론자 입장에서 좋게 봐줘도 총량 마이너스인데.
죽는 걸 무서워하지 말아요. 어쩌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학습된 것일지도 몰라요. 저 같이 의심 많은 사람들은 아무래도 음모론이 끌리긴 해요? 사람이 곧 노동력이잖아요. 죽음이란 사회의 손실이기도 하죠. 뭐 어쨌든. 죽는다는 행위, 그거 별거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사형당한 건 아시죠? 그런데 그 장면을 기록한 플라톤의 <파이돈>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곤 발견할 수 없고, 행복하고 유쾌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렸다고 해요.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존재를 믿었고, 육체적 죽음 뒤에도 영혼은 살아남을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이원론자들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 두 가지로 이뤄져 있다고 말해요. 그리고 영혼이 죽은 육체를 떠나기 직전까지 실천해왔던 노력, 즉 플라톤의 방식대로 형상(완벽함)에 가닿으려는 노력이 많았다면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것이죠. 어째, 기독교적 가치관과 많이 닿아있죠? 실제로 세상엔 영혼의 존재를 믿는 이들이 많죠. 교회 다니는 당신도 그러할 것이고요. 그러니 더더욱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근데 하나 재밌는 사실은, 천국을 강조하는 종교계조차 세부적인 천국의 묘사는 꺼려요. 왜? 플라톤이 말하는 완벽이란 있을 수 없기에, 세부적으로 묘사를 할수록 완벽한 천국은 구현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죽음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셸리 케이건 교수는 “인간은 실로 놀라운 물체(일 뿐)”라는 물리주의 관점에서 이원론적 관점을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어요. 그렇다고 한 쪽에 서서 무조건 옹호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영혼의 실체를 입증할 만한 완벽한 근거가 없으므로 판단을 유보하고 물리주의 관점을 받아들이겠다는 정도의 스탠스랄까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막연히,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았을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논리적으로 조직이 되죠.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죽음’이란 주제를 다루지만 결코 감정이나 미지의 가능성 등으로 논점을 흐리지 않아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죽음의 전후와 인간의 본질에 대해 탐구하죠. 그런 맥락에서 자살 또한 존중받아야 할 선택으로 도출되고요. 그러니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라니까?
알았어요. 더 이상 무서운 말 그만 할게요. 당신의 살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 잘 알았어요. 그렇다면, 영생은 어때요? 제가 영원히 살게 해 드릴 수 있는데. 진짜. 500년, 1000년 말고요. 정말 영원히요. 영원히. 당신이 좋아하는 컴퓨터 게임과 사우나, 영원히 할 수 있어요. 노화도 막아줄게요. 젊고 팔팔한 모습으로 영원히 살면서 한 때 당신의 꿈이었던 노벨문학상 도전은 어때요? 100년은 소설, 100년은 시, 100년은 수필 습작을 하면서 문학을 통달하고 희대의 걸작을 남기는 거죠. 영원히 당신이 좋아하는 삼겹살을 먹고 아내와 자식들과도 상봉해서 사랑하며 사는 거죠. 어째 표정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요? 하긴. 영국의 철학자 버나드 윌리엄스는 영생에 대해 단호하게 "거절한다"고 대답했대요. 어떤 형태의 삶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 매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면서요. 그렇다고 80살 또는 100살에 떠나는 삶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겠죠. 셸리 케이건 교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삶이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오래 사는 삶으로 규정했네요. 참 이상적이지만 그래서 슬프죠? 누구나 죽음의 방식과 시기를 선택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니까요, 당신. 그만 힘들어하고, 그만 우는소리 하라고요. 하도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해서 내가 왔잖아요. 결국 죽음이란 피할 수 없고, 죽음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알아서 계획할 수도 없고,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흔히 이 불편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애써 부정을 하거나, 힘겹게 인정하거나, 혹은 모르는 척 무시해 버리죠. 하지만, 죽음이란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잖아요. 셸리 케이건 교수는 삶은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조심해서, 신중하게’ 살라고 말해요. 목표 선택이나 달성, 가치 있는 것의 결정 등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죠. 일상적이고 가치 있는 목표를 적절히 섞으면서요. 그리고 죽음의 슬픔이 무색하지 않도록 삶을 최대한 치밀하게 살아요. 죽음이 슬픈 건 살아남아서 이룰 수 없는 기회비용 때문이라고 ‘박탈이론’은 설명하고 있거든요.
많이 들어본 얘기겠지만, 인간은 수십억분의 일의 확률로 태어났잖아요. 셸리 케이건 교수는 책에서 그 확률을 꼼꼼하게도 계산해 놓았어요. 엄마와 아빠가 바로 그 때 성관계를 했을 가능성, 하필 그 정자와 난자가 만났을 가능성, 그리고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기까지 말예요. 그렇게 태어나서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언젠가는 맞닥뜨릴 ‘죽음’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고민해보는 시간은 분명 좋은 시간이 될 것이고 삶의 계획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요. 교훈적으로 끝내긴 싫지만 책에서 발견한 좋은 글귀가 있어서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갈게요. 힘내요 당신!
미국의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의 책
<고양이 요람(Cat's Cradle)> 中
신은 진흙을 창조했습니다.
그러나 외로웠습니다.
그래서 신은 진흙 덩어리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덕과 바다와 하늘과 별, 내가 빚은 모든 것을 보라.”
한때 진흙이었던 나는 이제 일어나 주위를 둘러봅니다.
운 좋은 나 그리고 운 좋은 진흙.
진흙인 나는 일어서서 신이 만든 멋진 풍경들을 바라봅니다.
위대한 신이시여!
오직 당신이기에 가능한 일. 결코 나는 할 수 없는 일.
당신 앞에서 나는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가 소중하게 느껴지는 유일한 순간은,
아직 일어나 주변을 둘러볼 기회를 갖지 못한 다른 모든 진흙들을 떠올릴 때,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지만, 진흙들 대부분 그러지 못했습니다.
이 영광에 감사드릴 뿐.
진흙은 이제 다시 누워 잠을 청합니다.
진흙에게 어떤 기억이 있을까요.
내가 만나봤던, 일어서 돌아다니던 다양한 진흙들은 얼마나 놀라운지.
나는 내가 만났던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