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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ㅣ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왜 하필 그리스였을까. 200여 곳의 폴리스가 허구한 날 전쟁을 벌이다가, 서로 빼앗을 것이 떨어지면 바다로 나아가 해적질이나 일삼던 땅에 새로운 문명이 태어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문명의 조건이 비옥한 대지와 넘치는 인구와 풍요 같은 것이라면 그리스는 정확히 그 반대다. 여름 내내 비 한 방울 구경하기 어렵고, 허기와 갈증으로 갈라지는 땅, 전체 강수의 90퍼센트가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쏟아지는 저주받은 땅, 작열하는 태양 그리고 해류와 폭풍이 수시로 변덕 부리는 바다만이 남은 땅에서 찬란한 서구 문명이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p.314)
이 책은 그리스 신화나 문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스 여행기다. 그리스는 여행지보다는 신화의 배경으로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제목만 얼핏 보면 박경철 원장이 예의 그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친절하게 신화를 들려줄 것 같지만, 책 속엔 '날 것 그대로의 그리스'가 담겨있다. 2011년 서울시장 선거 전까지만 해도 안철수 전 교수와 함께 청춘콘서트를 진행하고, 라디오 방송, 트위터 등으로 왕성하게 사회에 에너지를 불어넣던 그의 소식을 한동안 알 수 없어 궁금했더랬다. '안철수 후보의 최측근'으로 정치계에 입문할 것이라는 세간의 추측은 빗나갔다. 숱한 러브콜과 의심어린 시선들에 시달렸던 것일까. 박 원장은 20대의 자신에게 불씨를 지피고 지금까지 정신적 멘토가 되어 준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흔적을 좇아 그리스로 홀연히 떠났다.
"이 책은 이십대의 청년이 가슴에 새긴 꿈을 나이 오십을 앞두고 실현한 긴 여행의 기록입니다."(p.6) <문명의 배꼽, 그리스>는 모두 열 권의 책으로 계획되어 있다고 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숨결을 따라 그리스와 고대 그리스 권역을 아우르는 마그나 그라이키아까지 전체를 횡단하며 기록을 이어갈 예정이다. 이번 책은 그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그리스에서도 문명의 발상지이자, 서구 문명의 자궁이라 할 수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여행기다. 익히 알려진 코린토스, 미케네, 올림피아, 스파르타 등 고대 그리스 문명의 씨앗들이 뿌려지고 싹튼 땅이 바로 펠로폰네소스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비롯해 총 세권이 펠로폰네소스이며 제2부 아티카 편 네 권, 제 3부 테살로니키 편 한 권, 제 4부 마그나 그라이키아 편 두 권 등 모두 열 권의 책으로 정리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젊은 시절부터 정신적 멘토가 되어준 이를 향한 최고의 헌정이 아닌가 싶다.
▲ 아폴로 신전에서 저자 박경철. 출처 = 박경철 트위터 ⓒ 박경철
책은 재미있다. 기행문 답게 묘사가 생생하다. 보고 듣고 만진 것에 대해 자세하다. 비유가 매우 많이 등장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는데, 그 표현들이 참으로 적절해서 공감의 폭이 한층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또한 책은 여행 가이드 역할도 충실히 할 것 같다. 저자의 오랜 그리스 사랑에서 비롯된 그리스에 대한 풍부한 이해는 그리스를 어떻게 맛보고 즐겨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안내한다. 예컨대 '버스보다는 렌터카를 빌려 메가라를 지나 해안을 따라가는 옛길을 이용하라'든지 '어지간히 예민한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발견하기 힘든 아크로코린토스 성채의 안내 등은 딱딱한 여행책자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혹은 '그리스는 마을 공동체가 발달한 곳이라 관광지건 유적지건 기차역이건 식당들이 최선을 다하는 특징'이 있다며 3쪽 가까이를 그리스 음식 문화로 이야기를 풀고, 코린토스 항구 앞에서 시니스의 스산한 전설이나 아시아 전역의 상인들이 모여들었던 과거를 상상하는 등 공간과 그리스에 대한 애정어린 그의 시선은 따라가기만 해도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륙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코린도스가 성경의 고린도전서의 '그 고린도'였다는 것이나 헬레나가 트로이전쟁의 원인을 제공하며 세기의 스캔들을 만들었지만 스파르타에선 여전히 칭송받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내겐 다행이었다. 지극히 상식같은 이 이야기들을 나는 정확히 알지 못했으니까.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무지한 내게 고대 그리스는 이미지로 존재했다. 조각적 정보가 많지만 그 개연성이 불분명했고, 문명의 발상지라는 피상적 실체만 머릿속에 있을 뿐 자세히 아는 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에 알고 있던 단편적 정보들은 기행의 형식을 띠고 친절하게 그리스를 톺아주는 글을 통해 퍼즐이 하나하나 맞춰지듯 조직되었다. 기행의 글에서 앎을 즐길 수 있었다.
보통 그리스에 관한 책은 신화가 많고 대부분 신들을 가운데에 놓고 신들의 관계도나 신화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프롤로그에서도 저자가 밝혔듯 공간을 줌인하여 면밀하게 관찰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실로 색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공간이 담고 있는 풍부한 이야기를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에는 구체적인 삶의 자취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p.17) 연대기의 틀을 고수한다면 왕조나 지배 계급을 중심으로 한 주류의 이야기에 머물기 십상이다. 뿐만 아니라 역사에 명멸했던 그 모든 문명이 그들 주류들의 몫이라 잘못 전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문명이란 지배 계급만이 아니라 허리 휘도록 무거운 돌덩이를 등짐지어 나르며 그 위대한 문명의 탑을 쌓아 올린 이름 모를 민초를 빼놓고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법. 문명의 정통성이 바로 민초들에게 있기 때문이다.(p.18) 박 원장이 그간의 활동에서 보여줬던 평범한 이들에 대한 애정은 여기서도 드러나는 듯 하다. 본인은 사회적 지위가 보장되는 의사라는 본업에 증권전문가, 방송인, 거기에다 작가라는 직함까지 전 분야를 섭렵하는 전문가면서 힘든 청춘을 위로하는 것에 대해 진정성 측면에서 반대편의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 박경철 원장이 나는 좋았다. 그의 글을 따라가보면, 진정성을 의심하기란 쉽지 않다.
저자만큼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가 책에는 또 있었으니 예상하듯이 니코스 카잔차키스다. 공간에서 보고 만지고 느끼고있을 때 카잔차키스의 말들이 바람처럼 실려온다. 그리스에서 나고 자라 깊은 통찰을 보여준 그와 그리스를 사랑한 이방인간의 교감은 진실되게 이뤄진다. 여행 중 작가가 경험했던 그리스인들과의 즐거운 추억이나 독특한 경험, 또는 스파르타엔 과연 전사들만 있었는지, 그 어느 곳보다 많은 신을 섬기는 그리스인들의 저변에 흐르는 정신은 무엇인지 책을 통해 확인해 보라. 신화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그리스가 성큼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개인적으로 재미났던 부분은 신을 섬기면서, 신을 신처럼 여기지 않았던 그리스 인들의 패기다. 인간과 신의 알력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읽어 나가면 큰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부제가 괜히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가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