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론 : 식별어(識別語)로서의 코기토 >
슬라보이 지젝 (이병혁)
철학과 정신분석 사이의 관계에 접근하는 데에는 두 가지 표준적 방법이 있다. 보통 철학자들은 이른바 ‘정신분석의 철학적 토대’를 탐구한다: 그들의 전제는 정신분석이 철학을 아무리 경멸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정신분석 자체가 주제화하지 못하고, 그리고 정신분석이 일정한 철학적 지평 안에서만 가능케 하는 방법을 입증하는,(욕동, 현실 등의 성격에 대한) 일련의 개념적 가정들에 의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아무리 나빠 봐야 정신분석가들은 근본적인 철학적 태도들 (사고의 전능성에 대한 유치한 믿음의 마지막 자취로서의 철학적 관념론; 포괄적인 철학 체계들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의 기반으로서의 편집증적 체계화 등등) 밑에 깔려있는 병리적인 정신적 동기들을 찾아내려고 애쓰는, 이른바 ‘철학자들에 대해 정신분석하기에’ 탐닉한다. 이러한 접근방법들 양자 모두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철학을 정신병리의 표현으로 보는 정신분석적 환원이, 오늘날, 당연히 더 이상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는 반면에, 정신분석 자체가 숙고가 불가능한 일련의 철학적 가정들에 의존해야만 하기 때문에, 정신분석이 철학과 정말 타당한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겉보기에 자명한 주장을 반격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프로이트적 주체에 대한 준거들이 철학 표면에 나타나지 않지만, 사실상 근대적인 데카르트적 주체에 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다면 어찌될 것인가? 주체성의 근대철학이 주체가 학술적 지식 내에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지를 부인(否認)해야만 하는, 그 자신의 저속한 거동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달성한다는 것을, 정신분석이 가시화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라깡의 동음이어의 익살을 사용하여, 철학이 떠맡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쌀쌀하게 대하려고 애쓰는, 근대 주체성의 외심적(外心的) 핵심, 즉 그 가장 깊숙한 핵을, 정신분석이 가시화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 또는, 좀 더 최신 유행하는 방법으로, 정신분석이 근대철학의 구성적인 광기를 가시화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따라서 우리는 이중적인 전략게임을 하고 있다: 철학의 이 외심적 핵심은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한 분과로 여겨진 정신분석에 직접 접근할 수가 없다 ― 우리가 이 수준에서 조우하는 것은, 물론, ‘소박한’ 철학 이전의 논제들이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은 정신분석의 철학적 함축들을 세상에 드러내야만 하는 것인데, 즉 정신분석적 명제들을 철학으로 재번역하여, 전환하고, “정신분석적 명제들을 철학적 명제들의 품위로 고양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정신분석의 외심적인 철학적 핵심을 분간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철학으로의 전환이 표준적인 철학적 틀을 타파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라깡이 항상 해 왔던 것이다: 히스테리 또는 강박신경증을 ‘현실을 향한 사고(思考)의 철학적 태도’로서 독해 (생각하기에 대한 강박 충동 ― “만약 내가 생각하기를 멈춘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을 데카르적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의 진실로서 독해), 등등.
따라서 우리가 ‘정신분석하는 철학’에 다시 착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광기에 대한 준거는 엄격하게 철학 내부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부터, 근대철학의 전체는 광기의 위협에 대한 내재적인 준거를 내포하며, 따라서 초험적 철학자를 광인과 분리하는 분명한 선을 긋는 절망적 시도이다 (데카르트: 내가 환각을 일으키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아는가?; 칸트: 형이상학적 숙고를 스베덴보리[역자 주: 스웨덴의 종교적 신비철학자(1688-1772)]적인 환각적 산만함과 어떻게 경계를 정하는가?). 근대철학이 맞서 싸우는 이러한 광기의 과잉은 데카르트적인 주체성의 바로 그 토대적인 거동이다. … 이 점에서, 탈근대적인 해체주의에 정통한 사람은 지루한 재인(再認)에 대해 탄식할 것이다: 물론, 데카르트적인 자아, 이성(理性)의 자기 투명한 주체는 착각이다; 그 진실은 우발적이고, 투명하지 않은 맥락속에 던져진 탈중심적이고, 분열적이고, 유한한 주체이며,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이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사태는 보다 더 복잡하다. 중심적인 프로이트와 라깡의 관념들 (무의식, 주체)의 문제는 그 관념들이 이론적인 식별어로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사기(士師記) 제 12장 4-6절에 나오는 식별어 이야기를 알고 있다: 차이점은 한 쪽에서만 볼 수 있는데, 즉, 오직 길르앗(Gilead) 사람들만이 ‘십볼렛(shibboleth)’이라는 단어의 발음 차이를 감지한다 ― 불운한 에브라임 사람들은 발음 차이를 알지 못해서, 결국 그들이 틀리게 말해서, 죽어야만 했던 이유를 결코 파악할 수 없다. 정신분석 이론에서의 십볼렛의 최고의 사례는 바로 무의식의 관념이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적인 정신과정에 대한 그의 논제를 제안할 때, 철학자들은 “물론이고 말고! 우리는 이것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 쇼펜하우어, 생(生)의 철학, 원초적 의지...” 라고 말함으로써, 프로이트의 논제에 즉각 반응한다; 갑자기, (그 ‘철학적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무의식이 불투명한 생활세계의 맥락 속에, 즉 잠재적이고, 이해되지 않은 주관적인 의도 등에 근거하고 있다) 정신분석을 표준적인 철학 문제틀에 (재)통합하려고 노력하는 해석학적이고, 그리고 다른 회복들로 가득 차는 반면에, 이러한 통합에 저항하는 나머지는 거부된다 ― 예를 들면, ‘프로이트의 생물학주의’, 그의 ‘죽음욕동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고찰’ 등등의 모습으로 거부된다.
보통 라깡의 옹호자들 조차 주목하지 못한 채 지나치는 라깡의 역설적 성취를 우리가 평가해야 마땅한 것이 바로 이러한 배경에 맞선 것이다: 정신분석을 대표하여, 그는 근대적인 합리주의적 주체 관념으로 돌아간다. 물론, 철학자들과 정신분석가들은 재빨리 “우리는 여기 우리 본 영역위에 있다”고 외치면서, 프로이트적 주체를 심리학적인 자기반성의 주체, 철학적인 자의식, 니체적인 권력의지로 계속 환원한다. … 여기서 라깡의 중요한 논제는 무의식의 경우보다 더욱 더 철저하다: 프로이트적 주체는 자명하고, 통합된 자의식과 아무 관련이 없을 뿐 아니라, 이미 철학 자체의 영역 안에 있는 십볼렛이 바로 데카르트적 주체 자체이며 (그리고 칸트의 선험적 통각으로부터 피히테 이후의 자의식에 이르는 독일 관념론에서의 주체의 철저화이다): ‘통합된 선험적 주체’의 관념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표준적인 주체성의 철학 모두, 여기서 쓰인 십볼렛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데, 즉 (칸트와 ‘그 개념이 같아질’ 때) 데카르트적 주체를 자명한 자아, 또는 인간, 즉 ‘인격적 개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틈새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은 데카르트적 주체가 바로 ‘인간의 죽음’으로부터 나타난다는 점이다: ‘초험적 주체성’은 가장 순수한 철학적인 반인간주의이다. 이제, 우리는 라깡이 정신분석 네 가지 근본 개념들에 관한 그의 세미나에서, 왜 정신분석의 주체가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지를 알 수 있다: 프로이트적인 무의식은 ‘인격적 개인’의 실체적 내용을 코기토의 덧없는 정확함으로 환원함으로써 나타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위대한 첫 번째 반인간주의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근대적 주체성은 인간을 ‘창조의 왕관’으로 보는 르네상스시대의 인간주의적 찬양에서, 즉 루터를 한낱 ‘야만인’으로 밖에 볼 수 없는 에라스무스와 기타 사람들의 전통에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신의 항문에서 떨어진 배설물이라는 루터의 유명한 진술에서 알려진다. 근대적 주체성은 인간을 ‘거대한 존재 사슬’의 최고 창조물로서, 즉 우주진화의 완성점으로서 보는 관념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근대적 주체성은 주체가 자기자신을 ‘뒤죽박죽된 것으로’, ‘사물들의 질서’로 부터, 즉 실체들의 실증적 질서로 부터 배척된 것으로 지각할 때 나타난다. 그런 이유로, 근대적 주체의 실체적인 등가물은 생득적으로 배설물이다: 상이한 수준에서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단지 한 똥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관념 없이는 진정한 주체성은 없다. 맑스의 경우, 노동계급 주체성의 출현은 노동자가 자기존재의 바로 그 실체(그의 창조력)을 시장상의 상품으로 팔지 않을 수 없는, 즉 자기존재의 아갈마, 보물, 즉 귀중한 핵심을 한 푼의 돈에 팔릴 수 있는 대상으로 환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엄격하게 상호연계되어 있다 ― 실증적‧실체적 존재인 주체를 처분가능한 ‘똥덩이’로 환원하지 않고는 주체성이 없다. 데카르트적 주체성과 그 배설물의 대상적 대응물 사이의 이러한 상관관계의 경우에서, 우리는 단지 푸코가 현대 인류학의 특징을 이루는 경험적‧초험적 쌍이라고 부르는 것의 한 예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술행위의 주체와 언표의 주체 사이의 분열을 다루고 있다: 만약 데카르트적 주체가 언술행위의 수준에서 나타나야 한다면, 그는 언표 내용의 수준에서는 처분가능한 배설물의 ‘거의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또는, 그것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주체의 개입은 보편적 질서와 그 이기적 과잉이 보편적 질서를 교화하는 특정한 힘의 오만 사이의 표준적인 전근대적 대립을 잠식한다: ‘주체’는 오만, 즉 과잉적 거동을 위한 이름이며, 이 오만의 바로 그 과잉은 보편적 질서의 토대를 이룬다; 주체는 바로 이 보편적 질서를 유지하는 보편적 질서로부터의 일탈, clinamen (역자주: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원자론을 설명하면서, 주어진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성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개념으로, 타성과 관성에서 벗어나는 이탈을 의미함), 병리적인 비천한 사람을 위한 이름이다. 초험적 주체는 본체적이지도, 현상적이지도 않은 ‘존재론적 스캔들’이지만, ‘거대한 존재사슬’로부터 튀어나오는 과잉, 현실질서 속의 구멍, 틈새이며, 그리고 동시에 그의 ‘자발적인’ 활동이 (현상적) 현실의 질서를 구성하는 행위자(agent)이다. 만약 전통적 존재론의 경우, 그 문제가 혼란스러운 현상적 현실을 참된 현실의 영원한 질서로부터 연역하는 방법(영원한 질서의 점진적인 ‘타락’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면, 주체의 문제는 질서자체를 유지하는 불균형한 과잉, 오만, 일탈의 문제이다. 칸트적인 초험적 구성의 중심적인 역설은 주체가 절대적인 것, 즉 현실의 영원한 토대적 원리가 아니라, 유한하고, 일시적인 실체라는 점이다. — 바로 그 자체로, 현실의 궁극적 지평선을 제공한다. 따라서, 우주, 즉 모든 현실을 원래부터 존재하는 총체성으로 보는 바로 그 생각은 배리(背理)로서 거부된다: 현실을 파악하려는 우리 능력의 인식론적 한계로서 나타나는 것 (우리가 영원히 현실을 우리의 유한하고, 일시적인 관점에서 지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현실 자체의 실증적인 존재론적 조건이다.
우리의 철학적이고 일상적 상식은 주체를 일련의 특징들과 동일시한다: 자발적이고, 자기 근원적 활동의 자율적인 출처 (독일 관념론자들이 ‘자기 단정적’이라고 불렀던 것); 자유선택의 능력; 일종의 ‘내적 삶’이 있음 (환상에 빠지기); 등등. 라깡은 이런 특징들을 승인하지만, 비튼다: 활동의 자율적인 출처 — 그렇다, 그러나 오직 주체가 대타자에게로 자기존재의 근본적 수동성을 전치시키는 한에서만 그렇다. (내가 능동적일 때, 나는 동시에 수동적과 맞물려있는데, 즉 이른바 ‘원시’ 사회들에서 장례식 때 나를 위해 통곡하는 고용된 여인들인 곡꾼들처럼, 내 대신에 나를 위해 수동적인 대타자가 있다; 자유선택 — 그렇다, 그러나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 그 선택은 강요된 선택이다 (즉, 궁극적으로 나는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할 경우에만 선택의 자유를 가진다); 환상에 빠지기 — 그렇다, 그러나 ‘내적 삶’의 직접적 경험속에 있는 주체와는 일치하지 않은 채, 근본적인 환상은 결코 ‘주체화’될 수 없는 환상이며, 영원히 주체와 차단된 환상이다. … 라깡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이러한 특수한 비틈인데, 이러한 나사의 추가적인 돌림은 우리로 하여금 주체성의 가장 극단적 차원과 대면케 한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주체성의 지평선을 ‘끝까지 생각하려는’ 하이데거의 유명한 시도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하이데거와의 문제는 원소 분석상 다음과 같은 문제이다: 라깡적 독해는 우리로 하여금, 과잉의 계기 (칸트의 경우에는 ‘잔인한 악마’, 헤겔의 경우에는 ‘세상의 밤’)와 이러한 과잉을 고급화하고 순화시키고 정상화하기 위한 후속적인 시도들 사이의 그 내재적 긴장을 데카르트적 주체성 속에서 밝혀낼 수 있도록 만든다. 거듭 거듭,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그들의 철학적 기획의 내재적 논리에 따라, 그들이 그 때 즉각 ‘재정상화하려고’ 노력하는 코기토에 내재하는 ‘광기’의 어떤 과잉적 계기를 분명히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하이데거와의 문제는 근대적 주체성에 대한 그의 관념이 이러한 내재적 과잉을 설명치 못하는 것 같다는데 있다 — 요약하면, 라깡이 코기토가 무의식의 주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러한 관념은 코기토의 그러한 측면을 전혀 ‘감당하지’ 못한다.
현대적 억견(doxa)의 기본적 추정들 가운데 하나는 데카르트적 코기토가 인류의 일상적 삶에 뿌리 깊게 영향을 미친 근대 과학의 전대미문의 진보를 위한 길을 닦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마치 데카르트적 코기토 자체가 그것이 해방시킨 지식의 바로 그 진보로 대치된 전(前) 과학적 신화의 지위를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이유 때문에, 코기토와 무의식이라는 제목은 두 개의 즉각적인 연상들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이 제목은 코기토(자의식의 투명한 주체)와 무의식, 즉 의식의 확실성을 뒤엎는 그 불투명한 대타자 사이의 적대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그리고 그 결과로 코기토는 가부장적 억압에서부터 생태학적 재해에 이르는 모든 현재의 재난에 책임이 있는 조작적 지배의 수행행위로서 거부되어야만 한다. ‘데카르트적 패러다임’의 유령이 배회하며, 우리의 생존에 대한 궁극적 위협으로 겁을 주면서, 동시에 죽었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유력한 억견과는 명백히 다르게, 라깡은 정신분석적인 코기토로의 회귀를 변론한다.
오늘날의 유력한 입장은 (초험적인) 주체의 유령에 맞서서 복수(複數)의 주체성들에 대한 주장을 포함한다: 통합된 주체, 초험적 철학의 논제, 모든 현실의 구성적 출처는 죽었고 (또는 죽었다고 들었고), 그리고 그 부재의 공백은 ― 여성적, 동성애적, 종족적인 … ― 주체성의 복수적 형태들의 해방적 확산으로 채워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주체에 대한 불가능한 탐구를 포기해야 하고, 그리고 그 대신 우리의 복잡하고, 분산되어있는 포스트 모던적인 우주속에서 자기의 주체성을 주장하는 가지각색의 형태들에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표준적 작업에 정확히 반대되는 작업을 수행하고, 그리고 (유한한 의미 지평선에 끼어든 역사적 행위자의 자기경험의) 주체성없는 주체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면, 어찌될 것인가? 우리가 주체로부터 주체성을 구성하는 풍부한 자기경험을 빼버릴 때, 어떤 종류의 괴물이 남을까? 이 책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그 중요한 전제는 데카르트적 주체가 이 괴물이고, 그 괴물은 우리가 주체로부터 ‘인격적 개인’의 모든 풍요로움을 빼앗을 때 바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라깡의 길을 따라서, SIC 시리즈의 이 두 번째 책은 코기토의 흥망성쇠를 탐구하는데 착수한다. 제Ⅰ부 (프로이트적 개념으로서의 코기토)는 기초를 제공한다: 그의 입문적 논문에서, 믈라덴 돌라르는 라깡의 경우, 무의식의 주체가 왜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다르지 않는지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반면에, 알렌카 주판치치는 그녀의 칸트 독해에서, 근대적 주체성의 관념에 어울리는 윤리적 태도의 윤곽을 그린다. 마지막으로, 오손 웰즈와 에인 란드의 작품속의 ‘실물보다 큰’ 인물들의 분석을 통해서 슬라보이 지젝은 근대적 주체성의 네 가지 기본 양식들 뿐 만 아니라, 그 양식들의 내재적 성화(性化)까지 정교화한다. 제Ⅱ부(코기토의 몸)는 데카르트적 기획이 인간 몸의 수수께끼같은 지위에 관해 연루될 때 생기는 교착상태에 전대미문의 과감성으로 달려든 데카르트적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니콜라스 말브랑쉬에 초점을 맞춘다 (알랭 그로스리샤르, 미란 보조비치). 그의 애꾸눈 위에 남근적 혹을 가진 괴물이 그로스리샤르에 의해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일종의 외설적 유사자, 즉 그 불가능한 유령적 화신이 아닌 것으로 분석되는가? 이 부(部)의 결론적 논문에서, 레나타 살레클은 사이렌의 목소리의 치명적 향락에 달려든다. 제 Ⅲ부 (코기토와 그 비판)의 세 논문들은 데카르트적 주체성의 세 가지 계열체적인 현대 비판들을 다룬다: 이른바 코기토의 자제하는 경제를 잠식하는 과잉적 지출에 대한 바타이유의 주장(마르크 드 케셀), 이데올로기적 질의효과로서의 주체에 대한 알튀세르적 관념 (로버트 팔러), 그리고 인지과학의 시각에서 본 다니엘 데넷의 데카르트적 극장의 추방(슬라보이 지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