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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볼돼지
김영진 글 그림 / 길벗어린이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책을 폈을 때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사람이 쓰고 그린 그림책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림의 이미지나 분위기에서 '우리것'이라는 느낌은 찾을 수가 없다. 책에는 니콘, 소니, 나이키, 아디다스, 만화 '슬램덩크', 아톰, 철인28호, 배트맨, 마이클조던 들이 유령처럼 떠돈다. 일본 문화, 미국 문화를 이것저것 갖다 버무려 놓았다. 그뿐 아니다. 작가가 재미나게 표현을 했구나 싶은 부분은, 모두 외국 작가의 표현을 재해석 없이 그대로 따왔다. 그림 속에 떠다니는 물고기들은 데이비드 위스너의 <구름 공항>을, 그림 곳곳에 숨은 작은 돼지들 문양은 앤서니 브라운의 <돼지책> 그대로다. 표지에 보이는 녹색 배경이나 아이가 그린 그림을 장치해놓는 것도 앤서니 브라운의 <고릴라>에서 따왔고, 주인공 볼돼지는 이언 포크너의 <올리비아>나 헐리 하비의 돼지들을 꼭 닮아 있다.
그림의 테크닉은 뛰어나다. 그리고 이미지도 일관성 있고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만의 색깔이 없다. 자신만의 색깔이라 한다면 이것저것 짬뽕을 해서 그 짬뽕 국물의 색깔을 일관되게 풀어냈다는 것 정도.(아 물론 짬뽕을 잘 만들어서 자기 방식의 새로운 짬뽕을 선보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이 작가의 짬뽕은 맛을 알 수 없는 짬뽕이다. 문화가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짬뽕이고, 여러 외국 작가들이 이루어놓은 그만의 스타일을 날것으로 가져다 쓴 짬뽕이다. 이것을 아이들이 먹고 어떻게 될 것인가? 대단히 위험한 짬뽕이 아닐 수 없다.) 작가의 고민은 무엇인가? 작가는 무엇 때문에 꼭 이런 짬뽕을 만들었나? 작가는 이 책으로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려고 하는가? 그 주려고 하는 것이 의미 있고 뜻 깊은 것인가? 진심으로 묻고 싶다. 책 내용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용을 전하는 방식, 표현 양식과 책 속에 담긴 문화에 대한 물음이다. 이것은 출판사의 편집자들께도 묻고 싶다.
책은 무척 재미있다. 작가가 그림 여기저기에 재밌는 요소들을 무척이나 많이 숨겨 두었다. 하나하나 찾는 재미가 여간 아니다. 이야기 흐름도 자연스럽다. 볼돼지가 노래를 좋아하고 여러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어한다는 것이 글에서도 그림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만큼 스타일이 확실하게 잡혀 있는 신인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책이 좋은 책,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그림책이 될 수는 없다. 길벗어린이는 우리 그림책을 이끌어오던 곳이다. 이런 곳에서 왜 이런 짬뽕을 책으로 만들어 냈을까? 재미있다는 것, (우리 그림책에서 만큼은) 새롭고 신선하다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갔을까? 혹시 길벗어린이가 허울뿐인 다양성이라는 함정에 빠져 혜안을 잃은 건 아닐까? (물론, 다양성이 허울뿐이라는 말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