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만 공급한다면
뉴스의 사명을 완수하는 것일까요? 단연코 아닙니다.
대중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일지라도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모나 형제, 애인의 죽음은 알고 싶지 않지만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제가 볼펜 한 자루를 즐겁게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볼펜을 누군가한테서 선물받아,
정당한 소유권을 가지고 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 볼펜을 준 사람이
볼펜의 정당한 소유자가 아닌 상태로 저에게 이 볼펜을 주었다면
저는 이 볼펜의 정당한 소유자가 아니게 됩니다.

정당한 소유권자와 저 사이에는 법적인 분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분쟁이 발생하기 전에
누군가가 이 물건이 제 것이 아니라고 알려 주어야 합니다.
저로서는 이 사실을 별로 알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선물받은 것으로 알고 기분좋게 쓰는 볼펜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이 사실을 저에게 알려 주어야 합니다.

논의를 좀더 '기사'답게 만들어 봅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5공 정권은 정권 장악 과정에
정통성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권력을 즐기고 있었을 겁니다.
누군가는 정당한 권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정당한 권력이 아니었음을
알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뉴스'란
'많은 사람들이 알고자 하거나 알아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 모르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알아야 할 것에 더 큰 의미를 둘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언론의 기능은 대중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지만
알아야 할 것을 공급하는데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언론의 고발 기능, 비판 기능이라고 부릅니다.
사회의 목탁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알고 싶은 것, 관심있는 것일지라도 시의성이 없다면 취미일 뿐,
뉴스는 아닙니다. 알아야 할 것의 경우에도 시의성이 중요합니다.
만일 시의성이 없다면 도덕 교과서요 수신서에 불과합니다.

일부 교과서를 보면 중요성이나
근접성, 인물등등을 따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여러 요소들은 결국은 '중요성'으로 귀착됩니다.
그러나 '중요성'은 극히 주관적인 가치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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