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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의 노인 사건집 ㅣ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에마 오르치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0월
평점 :
: 엘릭시르의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이하 엘릭시르판)'는 제가 애정을 가지고 수집하는 시리즈입니다. 그런 엘릭시르에서 이번에 <구석의 노인 사건집>을 냈다는 걸 알고는 환호하며 당장 주문했었지요. 구석의 노인 사건집은 이전의 '동서 미스터리 북스(이하 DMB판)'를 통해 봤을 때 상당히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더욱이 새로운 번역에 예쁜 표지로 만난다는 것도 좋지만, 목차를 비교해봤을 때 겹치는 이야기가 의외로 없었다는 점도 마음에 드는 점도 마음에 드는 점이었습니다. 이왕이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면 더 좋지 않겠어요.
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기본 등장 인물은 단순합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만 해도 홈즈에 왓슨에 레스트레이드에 마이크로프트에 모리어티 교수같은 고정 등장인물이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 고정 인물은 딱 둘입니다. 구석의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이자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폴리 버턴'은 '메리'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여기자입니다. 그리고 종종 폴리를 만나 이런저런 사건 이야기를 해 주는 '구석의 노인'이 있지요.(이 노인의 이름은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폴리는 ABC 카페에서 기묘한 노인을 만나 미궁으로 빠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후 폴리는 지속적으로 노인을 만나면서 사건의 이야기를 듣게 되죠.
이 시리즈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구석의 노인' 그 자체입니다. 오히려 사건은 평범해 보이고 트릭도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엘러리 퀸이 구석의 노인을 가리켜 '최초이자 가장 뛰어난 안락의자 탐정'이라고 했다지만, 작중 노인의 행보를 보면 그다지 안락의자 탐정같지만도 않아요. 검시 배심에 참여한다거나 (아주 가끔이지만) 경찰에 접촉하기도 하거든요. 이야기들에는 거의 돈이 얽혀 있고, 몇 편 읽다보면 대충 다음 사건이 어떻게 될지도 예측 가능합니다. (1)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사건이 발생 -> (2) 특정 인물이 유력 용의자가 됨 -> (3) 이후 밝혀지는 증거들로 인해 이 인물이 용의자 선상에서 벗어남 -> (4) 사건은 미궁 속으로. 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는 거의 예외 없이 이 패턴대로 진행됩니다. 게다가 일단 설정 상으로 구석의 노인이 폴리에게 이미 끝난 사건을 회상하고 그 범인을 '이야기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범인과 대치한다거나 증거를 모으기 위해 조사를 한다거나 하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노인의 추리는 거의 정황증거나 심리적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구석의 노인이 탐정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결코 정의의 편도 아니고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노인에게 사건의 추리는 지적 유희에 가까우며, 경찰의 편이라기보다는 도리어 범죄자의 편에 가깝습니다.
"나는 공권력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똑똑하고 영리한 범죄자들을 보면 오히려 공감이 가거든."
- <펜처치 스트리트 수수께끼>, p.15
* 이하 스포일러 포함 *
이런 노인의 캐릭터는 이야기에 묘한 매력을 불어넣습니다. 홈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건 이상의 매력을 불어넣듯이('세 명의 개리뎁'에서 유명한 건 그 사건 자체나 트릭이 아니라 홈즈와 왓슨의 이야기인 것처럼!), 노인과 폴리의 대화는 평범하게 보이면서도 은근히 심장을 졸이게 만드는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범죄자에 동조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범죄자이기도 한 구석의 노인과, 그가 범죄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음을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그를 만나는 폴리나 둘 다 '상식'에서 벗어나있기는 매한가지지요. 엘릭시르 판에서 이 둘의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단편은 바로 <메이다 베일의 구두쇠>입니다. 이 단편의 초반부는 엘릭시르 판에 수록된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이 둘의 관계를 생동감있게 보여줍니다. 폴리가 자신을 재수없어 하는 걸 알면서도 도리어 그걸 즐기는 노인과 그 노인의 뺨이라도 쳐 버리고 싶어 하면서도 '특종'의 냄새를 맡고 살살 웃어가며 노인의 비위를 맞추는 폴리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지죠.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이 둘이 안 지도 벌써 20년이 넘은 시점이기 때문인지 폴리가 노인을 능숙하게 조련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노인과 폴리는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겠죠. 노인은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고, 폴리는 기사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사건도, 노인도, 폴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것, 바로 책의 '편집'에 훨씬 신경이 쓰이더군요.
이 소설은 각 단편 속의 '사건'이 노인과 폴리 사이의 이야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셜록 시리즈처럼 탐정과 그 주변 인물의 이야기가 또 크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아예 전집으로 내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는 가에서 편집자의 생각이 많이 개입되는 게 느껴집니다.
범죄자에 보다 가까운 노인이 직접 범죄를 저질렀음을 암시하는 사건은 총 두 번 나옵니다. 1~3권 중 2권의 마지막 이야기인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엘릭시르판 제목)'과 3권의 마지막이야기인 '황무지 사건'이죠. 3권의 시작은 2권 마지막 사건을 기준으로 20년 후라고 설정되고 있으며, 이는 실제 출간 년도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 중 어떤 사건을 편집본에 넣을지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책의 느낌이 사뭇 다르더군요.
먼저 DMB판은 과감하게 3권의 내용은 빼버리고 1~2권의 내용 중에서 14편을 뽑았습니다. 그간 DMB 시리즈의 번역이나 구성을 봤을 때 일부러 그랬느냐에 대해서는 살짝 의문도 들지만, 이렇게 구성했을때의 효과는 확실히 충격적입니다. 2권의 마지막 이야기인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엘릭시르 판 제목)'은 DMB판에서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으로 나오며, 이 때 처음으로 노인의 범죄가 (거의 직접적으로) 암시됩니다. 그리고 1~2권에서 14편을 뽑은 만큼 노인과 폴리의 관계도 확실히 더 자세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된 노인과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폴리는 카페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노인을 찾고, 노인도 폴리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녀 앞에 앉아 사건 이야기를 하며 사적으로 친하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관계를 쌓아가다가 마지막 사건에서야 폴리는 문득, 그 사건의 범인이 노인임을 깨닫게 되고, 그 이후 노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는 말로 끝나게 되는 구성은 그 자체의 완결성을 가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결성이라거나 결말의 인상 면에서는 DMB판의 압승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 엘릭시르판은 1~3권에서 총 13편의 이야기를 수록했으며, 그 중 1~5편은 1~2권에서, 6~13편은 3권에서 뽑았습니다. 이런 구성은 나름의 장점을 가지는 반면에 약점도 가지게 됩니다. 얼핏 편집자의 고뇌가 느껴지는 것 같은 구성이었달까요. 실제로 구석의 노인 사건집 단행본 3권이 나온 시기는 각각 1905년, 1909년, 그리고 1926년입니다. 작중 설정에서와 같이 약 20년의 시간을 두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이 시간만 봐도 세 번째 단행본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실제로 단편들을 읽어보더라도 원래 작가는 3권을 쓸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참고로 2권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습니다.
(전략) ... 하지만 나는 그늘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략) 내 눈에는 보였다. 가느다랗고 천재적인 손가락들이 노끈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매듭을 하나씩 묶어가는 모습이. 그리하여 내가 지금껏 보아 온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훌륭한 매듭들이 나오는 모습이.
마침내 나는 말문을 열었다.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의 눈을 마주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제가 영감님이라면 노상 노근을 매듭짓는 버릇을 버리겠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보니 구석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중략) 나는 그 후로 지금까지 구석의 노인을 만나지 못했다.
-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 p.169
아무리 봐도 전 작가가 이 단편을 전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로 삼으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편집자의 고뇌는 시작되는 거죠. 현재 시중에 번역된 DMB판과 차별도 둬야 하고, 그러면서도 뺄래야 뺄 수 없는 사건들은 넣어야겠고, 차별성은 둬야겠고.... 그래서 현재의 구성이 나왔다고 생각됩니다. 최대한 미번역된 3권의 내용을 다루되, 1~2권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뽑아가는 형태로요. 그러다보니 좀 기묘한 구성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개인적으로는 이미 DMB판을 통해 구석의 노인의 사건들을 접한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3권의 내용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다가옵니다만, 책 자체 완결성이랄까...이런 것은 확실히 DMB판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솔직히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데도 5권에서 노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좀 뜬금없게 느껴지고, 이후 아무렇지 않게 20년 후에 천연덕스럽게 나타나는 장면이나 그런 노인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폴리의 모습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구석의 노인 사건집 1/2로 분권해서 1권에는 1~2권의 내용을, 2권에는 3권의 내용을 실었으면 보다 나았으리라 싶지만, 여기에도 나름 출판사의 사정이 있겠지요. 1~2권으로 분권을 해서 냈을 때 수지타산을 맞출만큼 팔리느냐의 문제도 있겠고요. 그래도 특히 이 책은 편집을 신경써서 했다는 게 물씬 느껴지는 한 권이었습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에서 지금까지는 유일한 단편 모음집이라서 그런 걸까요. 각 이야기 뒤에는 ABC 카페 이야기며 홍차 이야기며 검시 배심 이야기며 깨알같은 정보들을 실어서 작품 이해를 도와줍니다. 특히 단순한 재판인 줄 알았던 검시배심에 대한 정보는 유익하기도 하고 작품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 정보였어요. 그리고 이 검시배심을 다룬 '오시리스의 눈'이라는 작품을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어주기도 했고요.
어쩌면 이런 편집에 대한 이야기는 추리 팬의 투정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추리물을 많이 읽지 않는 남편은 이 책이 꽤 재미있다고 했으니까요. 구석의 노인은 여러 면에서 참 특이한 탐정(?)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분명 즐거운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