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의 노인 사건집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에마 오르치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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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엘릭시르의 '미스터리 책장 시리즈(이하 엘릭시르판)'는 제가 애정을 가지고 수집하는 시리즈입니다. 그런 엘릭시르에서 이번에 <구석의 노인 사건집>을 냈다는 걸 알고는 환호하며 당장 주문했었지요. 구석의 노인 사건집은 이전의 '동서 미스터리 북스(이하 DMB판)'를 통해 봤을 때 상당히 재미있었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더욱이 새로운 번역에 예쁜 표지로 만난다는 것도 좋지만, 목차를 비교해봤을 때 겹치는 이야기가 의외로 없었다는 점도 마음에 드는 점도 마음에 드는 점이었습니다. 이왕이면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면 더 좋지 않겠어요.


 구석의 노인 사건집의 기본 등장 인물은 단순합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만 해도 홈즈에 왓슨에 레스트레이드에 마이크로프트에 모리어티 교수같은 고정 등장인물이 있지만, 이 이야기에서 고정 인물은 딱 둘입니다. 구석의 노인의 이야기를 듣는 청자이자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폴리 버턴'은 '메리'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여기자입니다. 그리고 종종 폴리를 만나 이런저런 사건 이야기를 해 주는 '구석의 노인'이 있지요.(이 노인의 이름은 소설의 시작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폴리는 ABC 카페에서 기묘한 노인을 만나 미궁으로 빠진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후 폴리는 지속적으로 노인을 만나면서 사건의 이야기를 듣게 되죠. 

  이 시리즈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구석의 노인' 그 자체입니다. 오히려 사건은 평범해 보이고 트릭도 그다지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엘러리 퀸이 구석의 노인을 가리켜 '최초이자 가장 뛰어난 안락의자 탐정'이라고 했다지만, 작중 노인의 행보를 보면 그다지 안락의자 탐정같지만도 않아요. 검시 배심에 참여한다거나 (아주 가끔이지만) 경찰에 접촉하기도 하거든요. 이야기들에는 거의 돈이 얽혀 있고, 몇 편 읽다보면 대충 다음 사건이 어떻게 될지도 예측 가능합니다. (1)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사건이 발생 -> (2) 특정 인물이 유력 용의자가 됨 -> (3) 이후 밝혀지는 증거들로 인해 이 인물이 용의자 선상에서 벗어남 -> (4) 사건은 미궁 속으로. 이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는 거의 예외 없이 이 패턴대로 진행됩니다. 게다가 일단 설정 상으로 구석의 노인이 폴리에게 이미 끝난 사건을 회상하고 그 범인을 '이야기해주는' 형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범인과 대치한다거나 증거를 모으기 위해 조사를 한다거나 하는 장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노인의 추리는 거의 정황증거나 심리적 근거로 이루어집니다. 이 소설의 독특한 점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합니다. 구석의 노인이 탐정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결코 정의의 편도 아니고 진실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노인에게 사건의 추리는 지적 유희에 가까우며, 경찰의 편이라기보다는 도리어 범죄자의 편에 가깝습니다. 

 "나는 공권력을 쥐락펴락할 정도로 똑똑하고 영리한 범죄자들을 보면 오히려 공감이 가거든."
 - <펜처치 스트리트 수수께끼>, p.15 

 * 이하 스포일러 포함 * 
 
 이런 노인의 캐릭터는 이야기에 묘한 매력을 불어넣습니다. 홈즈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건 이상의 매력을 불어넣듯이('세 명의 개리뎁'에서 유명한 건 그 사건 자체나 트릭이 아니라 홈즈와 왓슨의 이야기인 것처럼!), 노인과 폴리의 대화는 평범하게 보이면서도 은근히 심장을 졸이게 만드는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범죄자에 동조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범죄자이기도 한 구석의 노인과, 그가 범죄자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음을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그를 만나는 폴리나 둘 다 '상식'에서 벗어나있기는 매한가지지요. 엘릭시르 판에서 이 둘의 관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단편은 바로 <메이다 베일의 구두쇠>입니다. 이 단편의 초반부는 엘릭시르 판에 수록된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이 둘의 관계를 생동감있게 보여줍니다. 폴리가 자신을 재수없어 하는 걸 알면서도 도리어 그걸 즐기는 노인과 그 노인의 뺨이라도 쳐 버리고 싶어 하면서도 '특종'의 냄새를 맡고 살살 웃어가며 노인의 비위를 맞추는 폴리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지죠. 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에서는 이 둘이 안 지도 벌써 20년이 넘은 시점이기 때문인지 폴리가 노인을 능숙하게 조련하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노인과 폴리는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겠죠. 노인은 자신을 알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고, 폴리는 기사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니까요.

 그런데 사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사건도, 노인도, 폴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것, 바로 책의 '편집'에 훨씬 신경이 쓰이더군요.

 이 소설은 각 단편 속의 '사건'이 노인과 폴리 사이의 이야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셜록 시리즈처럼 탐정과 그 주변 인물의 이야기가 또 크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아예 전집으로 내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는 가에서 편집자의 생각이 많이 개입되는 게 느껴집니다. 

 범죄자에 보다 가까운 노인이 직접 범죄를 저질렀음을 암시하는 사건은 총 두 번 나옵니다. 1~3권 중 2권의 마지막 이야기인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엘릭시르판 제목)'과 3권의 마지막이야기인 '황무지 사건'이죠. 3권의 시작은 2권 마지막 사건을 기준으로 20년 후라고 설정되고 있으며, 이는 실제 출간 년도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 중 어떤 사건을 편집본에 넣을지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책의 느낌이 사뭇 다르더군요. 

 먼저 DMB판은 과감하게 3권의 내용은 빼버리고 1~2권의 내용 중에서 14편을 뽑았습니다. 그간 DMB 시리즈의 번역이나 구성을 봤을 때 일부러 그랬느냐에 대해서는 살짝 의문도 들지만, 이렇게 구성했을때의 효과는 확실히 충격적입니다. 2권의 마지막 이야기인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엘릭시르 판 제목)'은 DMB판에서 '구석의 노인 마지막 사건'으로 나오며, 이 때 처음으로 노인의 범죄가 (거의 직접적으로) 암시됩니다. 그리고 1~2권에서 14편을 뽑은 만큼 노인과 폴리의 관계도 확실히 더 자세하게 드러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연히 만나서 알게 된 노인과의 만남이 잦아질수록 폴리는 카페에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노인을 찾고, 노인도 폴리를 보면 자연스럽게 그녀 앞에 앉아 사건 이야기를 하며 사적으로 친하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없는 관계를 쌓아가다가 마지막 사건에서야 폴리는 문득, 그 사건의 범인이 노인임을 깨닫게 되고, 그 이후 노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는 말로 끝나게 되는 구성은 그 자체의 완결성을 가지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결성이라거나 결말의 인상 면에서는 DMB판의 압승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 엘릭시르판은 1~3권에서 총 13편의 이야기를 수록했으며, 그 중 1~5편은 1~2권에서, 6~13편은 3권에서 뽑았습니다. 이런 구성은 나름의 장점을 가지는 반면에 약점도 가지게 됩니다. 얼핏 편집자의 고뇌가 느껴지는 것 같은 구성이었달까요. 실제로 구석의 노인 사건집 단행본 3권이 나온 시기는 각각 1905년, 1909년, 그리고 1926년입니다. 작중 설정에서와 같이 약 20년의 시간을 두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이 시간만 봐도 세 번째 단행본은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실제로 단편들을 읽어보더라도 원래 작가는 3권을 쓸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참고로 2권의 마지막 장면은 이렇습니다.

 (전략) ... 하지만 나는 그늘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략) 내 눈에는 보였다. 가느다랗고 천재적인 손가락들이 노끈 하나를 만지작거리며 매듭을 하나씩 묶어가는 모습이. 그리하여 내가 지금껏 보아 온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훌륭한 매듭들이 나오는 모습이.
 마침내 나는 말문을 열었다. 구석에 앉아 있는 노인의 눈을 마주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제가 영감님이라면 노상 노근을 매듭짓는 버릇을 버리겠어요."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어보니 구석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 (중략) 나는 그 후로 지금까지 구석의 노인을 만나지 못했다.  

 - <퍼시 스트리트의 기묘한 죽음>, p.169

 아무리 봐도 전 작가가 이 단편을 전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로 삼으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편집자의 고뇌는 시작되는 거죠. 현재 시중에 번역된 DMB판과 차별도 둬야 하고, 그러면서도 뺄래야 뺄 수 없는 사건들은 넣어야겠고, 차별성은 둬야겠고.... 그래서 현재의 구성이 나왔다고 생각됩니다. 최대한 미번역된 3권의 내용을 다루되, 1~2권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뽑아가는 형태로요. 그러다보니 좀 기묘한 구성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개인적으로는 이미 DMB판을 통해 구석의 노인의 사건들을 접한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3권의 내용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장점으로 다가옵니다만, 책 자체 완결성이랄까...이런 것은 확실히 DMB판에 비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네요. 솔직히 이미 내용을 알고 있는데도 5권에서 노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이 좀 뜬금없게 느껴지고, 이후 아무렇지 않게 20년 후에 천연덕스럽게 나타나는 장면이나 그런 노인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폴리의 모습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차라리 구석의 노인 사건집 1/2로 분권해서 1권에는 1~2권의 내용을, 2권에는 3권의 내용을 실었으면 보다 나았으리라 싶지만, 여기에도 나름 출판사의 사정이 있겠지요. 1~2권으로 분권을 해서 냈을 때 수지타산을 맞출만큼 팔리느냐의 문제도 있겠고요. 그래도 특히 이 책은 편집을 신경써서 했다는 게 물씬 느껴지는 한 권이었습니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에서 지금까지는 유일한 단편 모음집이라서 그런 걸까요. 각 이야기 뒤에는 ABC 카페 이야기며 홍차 이야기며 검시 배심 이야기며 깨알같은 정보들을 실어서 작품 이해를 도와줍니다. 특히 단순한 재판인 줄 알았던 검시배심에 대한 정보는 유익하기도 하고 작품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된 정보였어요. 그리고 이 검시배심을 다룬 '오시리스의 눈'이라는 작품을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게 만들어주기도 했고요.

 어쩌면 이런 편집에 대한 이야기는 추리 팬의 투정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추리물을 많이 읽지 않는 남편은 이 책이 꽤 재미있다고 했으니까요. 구석의 노인은 여러 면에서 참 특이한 탐정(?)입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한 번 만나보시는 것도, 분명 즐거운 경험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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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3-11-25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서에서 발매된 책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는 마지막 중년여성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 마지막 사건이 완결적인 내용이라 생각되네요 근데 이번에 발매된 책에서는 뜬금없이 2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뒤 다시 만나고 마지막 황무지 사건이후 다시 사라지는 것은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이라 좀 어색한 내용이라 생각이 드네요 구석의 노인 단편집 좋아하는 지라 읽어보지 못한 단편들은 좋지만 이건 마치 홈즈가 살아돌아와서 다시 모리아티와 싸우고 죽는 꼴이라 홈즈의 마지막 인사의 결우는 영국을 위해 활약한다는 여지만 남기고 사라지지만 이게 그나마 납득하는 이야기이지만 반복되는 결말이 어색한 작가가 어쩔수 없이 다시 글을 쓰고 마지못해 끝낸다는 느낌이라 좋은 책의 느낌이 죽는 기분이라

이카 2013-11-26 20:34   좋아요 0 | URL
저도 동서판을 먼저 읽어서 그런지 이 책의 편집방식은 이해가 되는 한편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저 역시 재는재로님처럼 작가가 원래는 3권을 쓸 생각이 없다가 (독자의 요청인지 작가의 경제적 사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3권을 썼다고 생각해요. 3권은 좀 뜬금없이 시작하고, 역시 2권의 마지막과 같은 방식으로 끝나죠.

개인적으로 가장 완성도 있는 방식은 동서판과 마찬가지로 1~2권에서만 이야기를 뽑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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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이라는 틀로 가둬두기에는 너무 아까운 수작입니다. 의심이 주변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 고통스러울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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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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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 당신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분명 가방에 있어야 할 지갑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집에서 분명히 가지고 온 것 같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지갑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방에도 없고, 책상을 털어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라고 가정을 해 봅시다. 

 당신의 마음 속에서는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오릅니다. 바로 옆의 짝꿍을 보니 그 친구가 수상해보입니다. 오늘따라 말도 없이 책상에만 엎드린 모습이 꼭 날 피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바로 한 시간 전 체육시간에 배가 아프다며 교실에서 쉬었는데, 그 와중에 훔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닐거라고 생각해보지만 어쩐지 자꾸만 께름직한 기분이 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친구밖에는 범인이 될 만한 상황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의혹으로 시작된 이 생각이 확신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 책은 바로 이에 관한 책입니다.

 주인공인 에릭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아내와의 관계는 양호합니다. 아들 키이스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있지만, 그 고민조차 '있을 법한' 평범한 고민들입니다. 어느 날, 이웃집의 딸이 실종된 사건이 발생하고, 그 유력 용의자로 아들 키이스가 지목되면서 에릭의 가정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의심은 산(酸)이다. 그게 내가 아는 한가지다. 산은 물건의 매끄럽게 반짝이는 표면을 먹어 치우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중략) 에어리언이 부식성이 강한 액체를 토하자, 그 액체는 순식간에 우주정거장의 한 층을 먹어 치웠고 차례로 다른 층까지 먹어 들어갔다. 내 생각에 그 액체는 의심과도 같았다. 의심은 아래로 내려 갈 수밖에 없고 오랜 신뢰와 헌신의 수준을 차례차례 부식시키며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간다. 의심은 언제나 바닥을 향한다


 자칫 이 책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가족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있던 허울이 벗겨지며 그 '실체'가 드러나는 이야기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집요하리만치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에릭의 '의심'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절대 범인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들의 작은(?) 거짓말에서 비롯된 의심은 확신이 되고, 그 확신이 바로 가정을 붕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에릭은 정말 평범한 사람입니다. 에릭은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회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도 가게 문을 열고 사진을 인화하고 액자를 만드는 모습은 먹고 살기 바쁜 소시민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생각에 정면으로 부딪치기 보다는 중요한 사실을 회피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는 정말 평범해서 추리 소설에 흔히 등장할 법한 '경찰(혹은 탐정) 친구'도 없습니다. 그가 접하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며, 그렇게 접한 정보를 통한 추리 역시 평범한 사람이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작가는 이 점을 탁월하게 '체험'하도록 합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에릭의 시점에서, 에릭의 시야라는 제한 속에서 에릭과 같은 사고를 하게 됩니다. 때문에 굳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에릭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에릭이 좀 더 자신의 아들을/가족을 믿었더라면'은 쓸데없는 가정이 됩니다. 의심은 종종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걸, 누가 모릅니까. 가족이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겠냐는 말은 쉽지만, 종종 우리 자신도 가족을 의심하지 않나요. 오늘 옷장에서 없어진 코트를 보며 동생이 무단으로 입고 나갔으리라는 의심과 에릭의 의심이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이후 아내도 아들도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른다'고 하지만, 그들이 가족을 일부러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서로를 미워하거나 서로 소원한 가족은 아니었습니다. 빤한 문제를 덮어놓고 모른 척 한 적도 없고요. 지금까지 그냥저냥 평범하게 살아왔고, 평범하게 사랑했고, 평범하게 의심을 했던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 지극히 합리적이고 평범한 의혹에서 시작된 의심은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졌는지!

 결국 이 책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의심'입니다. 작가는 에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독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라고 다를 수가 있느냐'고 말이죠. 때문에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과 결말이라기보다는 그 사건을 경험하는 에릭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심리상태와 행동이 되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장르문학이라기보다는 장르문학의 형식을 빌린 순문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서도 이야기의 힘은 바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결말을 향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문장의 완성도와 힘에 놀라며 다시금 책을 읽고 싶다는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책에 감탄을 하는 것은 비극적인 결말이 주는 묵직한 여운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 비극에 이르게 한 에릭과 이웃들의 모습이 바로 내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싫어도 알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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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혜영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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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토 가나에 답게 가독성은 좋고, 메세지도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딘가 캐릭터가 작위적인 면이 있고, 그 때문에 감정이입하기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읽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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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출간 기념 프리미엄 낭독회

일시 : 2013.7.24 오후 7:30
장소 : 숭실대학교 한경직 기념관
출연 : 김영하, 이적, 이이언

 낭독회에 가기 직전까지 제 고민은 계속되었습니다.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가지 않을 이유는 많았죠. 직장 끝나고 피곤한 몸에, 밀려 있는 집안일에, 서울 북쪽 끝에서 남쪽 끝으로 가야 한다는 거리. 무엇보다 가장 큰 방해 요인은 다름 아닌 김영하씨의 소설이었어요! 전날 사인회에 다녀왔다가 그날 밤, 새벽 1시쯤인가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정말 잠깐만 읽고 자려고 책을 폈다가 그대로 다 읽어버렸던 거죠. 책을 읽은 후 결말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가 결국 잠든 건 새벽 4시...새벽 5시~5시 반에 일어나 출근을 하는 저는 다음날 지각을 할 뻔하기도 했답니다. 하하^^; 어쨌거나 그렇게 많은 이유로 고민을 했지만, 결국 가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 - 김영하의 낭독회라는 것 - 때문에 낭독회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사진 상에는 사람이 참 적어 보이는데, 실제로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6시 반부터 좌석표를 배부한다길래 조금 서둘렀지만, 중간에 좀 헤메느라 제가 도착한 시간은 6시 20분~25분 정도 되었는데, 그 때에는 이미 저 뒤에 보이는 계단을 다 휘감고 올라가 2층까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어요. 그나마도 이 줄은 알라딘/인터파크라 사람이 좀 적은 편(..)이었고, 옆의 예스24/교보문고 줄은 알라딘/인터파크 줄이 어느 정도 줄어들었을 때도 여전히 건물 왼편 안쪽까지 늘어선 줄이 줄지를 않더라고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왔다는 게 좀 놀라웠어요. 김영하씨의 인지도가 이 정도인가 싶어서 새삼 놀랐습니다.

 그렇게 해서 받은 자리는 1층 D구역 5열 3번 자리. 생각보다 좋은 자리여서 기뻤습니다. 한참 구석에 가서 앉거나 2층에 갈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했는데 말이죠. 

 기다리면서 낭독회장을 둘러봤습니다. 표를 나눠주는 곶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김영하씨의 책들을 싼 가격에 팔고 있고(대략 30%쯤 할인하여 팔았던 것 같네요) 사람들이 건물 안이며 밖에 앉아서 손에 책을 들고 읽는 모습이 참 생경했어요. 상아탑이라고도 불렸던 대학이지만, 요즘 대학교에서 은근 책 읽는 모습 보는 게 힘든데 말이죠. 그 모습들이 어찌나 그림같던지요. 그리고 저 동상 언니, 동상 오빠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열심히 활약을 해 주고 계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사진을 찍는 것도 볼 수 있었어요. 열심히 한경직 기념관을 찾아 올라올 때는 땀이 뚝뚝 흐를 정도로 더웠는데, 표를 받고 나니 벌써 날은 선선해지기 시작해서 벤치에 앉아 있기 딱 좋더라고요. 저도 가지고 간 다른 책도 읽고 음료수도 마시면서 있다 보니 시간은 어느 새 훌쩍 지나 입장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전에 팟캐스트 방송에서 이런 말을 들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새로운 책이 나오면 사인회도 하고 홍보도 하고 강연회나 행사같은 것도 하게 되는데, 사실 작가가 정말 행복할 때는 혼자 앉아서 글을 쓰는 그 시간들이라고 하셨더랬죠. 하지만 역시 독자들에게 이런 행사는 참 뜻깊고 추억이 되는 행사가 아닐런지요. 독자는 책을 통해 작가와 만나게 되지만, 이렇게 직접 목소리를 듣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색다른 기분이더군요. 요즘 이런저런 북콘서트같은 행사도 많이 늘었던데 제가 책 관련 행사에 참가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낭독회는 말 그대로 낭독에 좀 더 중점을 둬서 낭독을 메인으로 하고 전후에 책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집필 계기, 인물, 책에 관련된 것들 등등. 작가가 직접 들려주는 책에 대한 이야기는 또 색다르더군요. 처음에는 장르 소설처럼 노장 살인자와 신예 살인자의 대결처럼 해 볼까, 라는 생각을 했다는 부분에서 많이 웃었어요. 

 이런 점에서는 전날 책을 읽고 간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님이나 다른 두 분도 가능하면 책의 '해석'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려고 하는 게 많이 보였어요. 하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작가님이야 당연히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글을 썼고, 표현하려고 한 것이 있겠지요. 하지만 이미 출간된 글은 읽는 사람 각자의 해석으로 완성되는 것이니까요. 특히 아직 책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듣는 해설은 자칫 더 많은 해석의 여지를 줄여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미 저 같은 경우는 책을 읽었고, 책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보다 가서인지 그 이야기들이 좀 색다르게 들리더라고요. 낭독도 그랬고요. 어제 막 읽은(정확히는 그 날 새벽에 읽은) 책을 듣다보니 듣기만 해도 그 부분이 어떤 부분인지, 그 부분을 읽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생각나면서 더 몰입해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간호사라서 접하게 되는 실제 치매 환자의 사례도 생각나고, 학생 때는 알츠하이머 요양 센터에서 실습을 한 경험도 생각나서 책 속의 등장 인물이 어떤 상태로 변해갔을지, 그리고 지금 어떤 상태일지, 책에서 표현되지 않은 부분까지 손에 잡힐 뜻 떠올랐었거든요. 제 감상과 이적/이이언씨의 감상을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고, 제 해석과 세 분이 이야기해주는 책 이야기를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날 낭독회에 오신 분들이라면 다들 이 영상에는 감탄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이언씨가 만든 트레일러는 정말 너무나 멋졌습니다! 독일에 외주를 줘서 1700대의 컴퓨터로 만들었다는 영상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졌어요. 이 영상 자체가 이 인물을 그래도 형상화 하는 듯도 하고, 뇌를 형상화하는 듯도 했는데, 그 뒤에 이어지는 김영하씨의 목소리와 배경 음악이 기가막히게 잘 어우러졌더라고요. 단지 배경으로 목소리와 음악을 '깔아두는' 것이 아니라 강약을 조절하고 중간에 의도적으로 단층 부분을 만들기도 하면서 그 자체가 이 소설 속의 인물을 형상화하는데, 이것은 그대로 책의 여백/자간/형식을 통해 인물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김영하씨의 의도를 다시 영상 속에 반영한 것 같았습니다. 처음 볼 때도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지만, 설명을 듣고 다시 봤을 때는 더욱 감탄했어요.

 
 1시간 30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이런 대규모 행사를 진행한 출판사의 역량에도 놀란 시간이었어요. 즐거웠고, 돌아오며 역시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즐거웠어요. 다음에도 이런 행사가 있다면 꼭 한 번 참가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낭독회 후기에 덧붙여 책 이야기도 하고 싶지만, 그 부분은 다음 포스팅을 위해 아껴두고, 여기서 낭독회 후기를 끝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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