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낙엽
토머스 H. 쿡 지음, 장은재 옮김 / 고려원북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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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정을 해 봅시다. -- 당신은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입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분명 가방에 있어야 할 지갑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집에서 분명히 가지고 온 것 같은데 아무리 뒤져봐도 지갑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가방에도 없고, 책상을 털어봐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이라고 가정을 해 봅시다. 

 당신의 마음 속에서는 스멀스멀 의심이 피어오릅니다. 바로 옆의 짝꿍을 보니 그 친구가 수상해보입니다. 오늘따라 말도 없이 책상에만 엎드린 모습이 꼭 날 피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러고보면 바로 한 시간 전 체육시간에 배가 아프다며 교실에서 쉬었는데, 그 와중에 훔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닐거라고 생각해보지만 어쩐지 자꾸만 께름직한 기분이 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친구밖에는 범인이 될 만한 상황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의혹으로 시작된 이 생각이 확신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 책은 바로 이에 관한 책입니다.

 주인공인 에릭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입니다. 아내와의 관계는 양호합니다. 아들 키이스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있지만, 그 고민조차 '있을 법한' 평범한 고민들입니다. 어느 날, 이웃집의 딸이 실종된 사건이 발생하고, 그 유력 용의자로 아들 키이스가 지목되면서 에릭의 가정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합니다. 

 의심은 산(酸)이다. 그게 내가 아는 한가지다. 산은 물건의 매끄럽게 반짝이는 표면을 먹어 치우고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긴다. (중략) 에어리언이 부식성이 강한 액체를 토하자, 그 액체는 순식간에 우주정거장의 한 층을 먹어 치웠고 차례로 다른 층까지 먹어 들어갔다. 내 생각에 그 액체는 의심과도 같았다. 의심은 아래로 내려 갈 수밖에 없고 오랜 신뢰와 헌신의 수준을 차례차례 부식시키며 더 낮은 수준으로 내려간다. 의심은 언제나 바닥을 향한다


 자칫 이 책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가족을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있던 허울이 벗겨지며 그 '실체'가 드러나는 이야기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이 집요하리만치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에릭의 '의심'입니다. 자신의 아들이 절대 범인일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들의 작은(?) 거짓말에서 비롯된 의심은 확신이 되고, 그 확신이 바로 가정을 붕괴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에릭은 정말 평범한 사람입니다. 에릭은 아들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서라도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에 있어서는 회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도 가게 문을 열고 사진을 인화하고 액자를 만드는 모습은 먹고 살기 바쁜 소시민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생각에 정면으로 부딪치기 보다는 중요한 사실을 회피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는 정말 평범해서 추리 소설에 흔히 등장할 법한 '경찰(혹은 탐정) 친구'도 없습니다. 그가 접하는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며, 그렇게 접한 정보를 통한 추리 역시 평범한 사람이 수준을 넘지 못합니다. 작가는 이 점을 탁월하게 '체험'하도록 합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독자는 에릭의 시점에서, 에릭의 시야라는 제한 속에서 에릭과 같은 사고를 하게 됩니다. 때문에 굳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에릭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에릭이 좀 더 자신의 아들을/가족을 믿었더라면'은 쓸데없는 가정이 됩니다. 의심은 종종 나쁜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걸, 누가 모릅니까. 가족이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겠냐는 말은 쉽지만, 종종 우리 자신도 가족을 의심하지 않나요. 오늘 옷장에서 없어진 코트를 보며 동생이 무단으로 입고 나갔으리라는 의심과 에릭의 의심이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이후 아내도 아들도 '우리는 서로를 잘 모른다'고 하지만, 그들이 가족을 일부러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서로를 미워하거나 서로 소원한 가족은 아니었습니다. 빤한 문제를 덮어놓고 모른 척 한 적도 없고요. 지금까지 그냥저냥 평범하게 살아왔고, 평범하게 사랑했고, 평범하게 의심을 했던 것 뿐입니다. 하지만 그 지극히 합리적이고 평범한 의혹에서 시작된 의심은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졌는지!

 결국 이 책이 그려내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 '의심'입니다. 작가는 에릭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시에 독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이라고 다를 수가 있느냐'고 말이죠. 때문에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과 결말이라기보다는 그 사건을 경험하는 에릭과 그 주변 인물들의 심리상태와 행동이 되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장르문학이라기보다는 장르문학의 형식을 빌린 순문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건의 진상을 알고 나서도 이야기의 힘은 바래지 않으며, 오히려 그 결말을 향해 차곡차곡 쌓아올린 문장의 완성도와 힘에 놀라며 다시금 책을 읽고 싶다는 기분이 들게 만듭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이 책에 감탄을 하는 것은 비극적인 결말이 주는 묵직한 여운 때문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그 비극에 이르게 한 에릭과 이웃들의 모습이 바로 내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기 싫어도 알게 되기 때문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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