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회를 여는 희망의 조건 새사연 신서 3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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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살기가 힘들어."
얼마 전 택시를 탔더니 운전기사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물질적으로 비교하자면 예전이 지금보다 더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다고 덧붙였다. 예전에는 굶주리고 힘들었지만 그래도 '함께'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단다. 사장이든 노동자든, 신발공장에 다니든 가발공장에 다니든 지금 함께 허리띠 졸라매고 뛰면 집도 마련하고 동생 대학도 보내고, 그러다보면 지금보다 나아질 거라는 꿈이 있었단다. 너나 구분 없이 한 곳을 바라보고 노를 저어가던 그 시절. 아저씨가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모두가 함께 했던 '공동체 의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점차 계층이 분화되고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면서 언젠부턴가 모르게 우리 사회에서 '연대'라는 개념이 희미해졌다. 농업종사자들과 도시 근로자의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고 같은 도시 근로자라도 대기업 근로자와 중소기업 근로자의 이해관계가 달라졌다. 대기업 CEO와 영세 자영업자의 입장은 천지차이다. 이렇게 각자의 이해관계가 엇갈려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신자유주의바람이 불어 닥치면서 상황은 더욱 냉혹해졌다. 피도 눈물도 없는 구조조정으로 인해 가장은 하루아침에 백수 신세로 전락했고 시장의 건실함을 위해 부실 기업들이 가차 없이 정리됐다. FTA로 농업종사자들은 논밭을 갈아엎었고 대학생들은 바늘구멍보다 좁은 취업문을 뚫기 위해 낭만도, 시대정신도 모두 잃었다.

아비규환. 보다 큰 수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인간을 내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성 덕분에 사람들은 모두 자리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해졌다. 타인과 다른 계층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쏟을 여유를 잃어버렸다. 서로에 대해 무관심한 상황. 책은 그래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할 대안으로 '연대'를 제안한다. 노동조합은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에서부터 영세 중소기업 비정규직 근로자를 모두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대학교 학생회도 명문대, 지방대생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 이들이 한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 책은 한 걸음 나아가 노동조합이 미래의 근로자가 될 대학생들과 연대해 거대한 시류를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결국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 이것이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면 당신의 문제가 언젠가는 나의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위기의식. 책은 이런 공동체 의식이 신자유주의의 비인간성을 극복할 수 있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 책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여기까지 정리하자 생각은 저절로 '과연 나는 어떠한가.'라는 데 집중됐다. 타인의 문제에, 그리고 결국의 나의 문제가 될 우리 사회의 현안에 대해 나는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 그래, 약자인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하루 종일 눈칫밥 먹으며 종종거리는 일상에서부터 구조조정과 명예퇴직 등. 나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열변을 토해가며 기업이 인간을 부속품 따위로 치부하는 현 사태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을 제기한다. 바로 내가 처한 현실이므로. 하지만 홈에버, KTX 등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서는? 물론 기업을 향한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그리고 이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팽개친 기업의 몰지각함에 치를 떤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쌀 개방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다수 국민의 생활 안정을 위해 정부가 저가 곡물정책을 펼친 것하며, 우르과이라운드부터 FTA 등 심심하면 농산물 개방을 통해 다른 산업을 살리려는 정부의 무책임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이제는 농민들을 지원하고 보호할 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여기까지. 난 비정규직도 아니고 농민도 아니므로 내 관심의 정도는 여기까지다.

심지어 내 자신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척 넘어갈 때가 있다. 대학교 시절에는 등록금 인상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얼마 전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도 적극적으로 무언가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면 굳이 나 아니어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대신 난 어떻게 행동했을까. 난 내 문제든 타인의 문제든 모두 남에게 맡기고 나는 혼자 낑낑대며 영어공부를 하고 이력서를 내고, 회사를 오가며 스터디를 했다. 남들이 어떻게든지 세상을 바꾸려고 한 목소리를 내는 새,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경쟁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 쳤다.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뒤처지면 가차 없이 내동댕이쳐지는 신자유주의의 칼바람을 피하는 방법은 나 스스로 보다 '쓸모있는 부속품'(당시에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고작 부속품이 되기 위한 몸부림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든다)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인과 함께하기 보다는 그들을 짓밟아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탓이다.

경쟁하는 법만 배우고 연대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변명이 될까? 배우지 못했다는 것보다는 나 스스로 타인에 대해, 사회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먹고 살기 힘들었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닌 듯하다. 우리는 60~70년대 보다 절대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조금 넉넉하게 산다는 사람들도 사회에 무관심한 것을 보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도 비겁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결국은 우리의, 그리고 나의 행동양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어떤 합리적인 이유도 없다. 나는 그저 무심한 사람일 뿐이다.

작가 공지영은 민주화 항쟁시 다른 사람들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자책하고 괴로워했다. 그런 그의 고민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 ‘별들의 들판’ 등 많은 작품을 통해 표출됐다. 나도 지금 그녀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당시의 고민들을 어떻게 해결한 것일까. 신자유주의로 인해 불거진 많은 문제들 앞에서 나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것일까. 문득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숨을 쉬고 먹고 마시는 것 외에 과연 인간으로서 깨어있는가. ‘인류는 서로를 위해 태어났다.’는데 나는 그런 면에서 보면 죽은 나무토막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입으로만 떠들고 정작 나는 내 자신의 문제에만 몰두해 혼자 살아남겠다고 발악한 것은 아닌지...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얼굴이 저절로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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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드레스 2009-06-15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옳소이다~~짝짝짝!!!
혼돈의 시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진실된 목소리를 내고 싶어도 현실과 이상차이에서 오는 가치관의 혼란...말로만 민주화된 시대를 산다고 하지만..내면은 그렇지않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고 있는 오늘...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