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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수의 연구실에 들렀더니 참으로 멋이 있었다. 책이 꽉 차 있지는 않았지만, 텅 빈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한쪽에는 중국인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았다는 산수화가 걸려 있고, 또 작지만 좋은 글씨 족자도 드리워놓았다. 북경 유리창(琉璃廠, 리우리창)에서 구입했다는 낙관도 여러 개 서가에 얹어놓았다. 책도 그저 그런 책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한, 책갑(冊匣)에 넣은 책, 우리나라 고서 등이 이곳저곳에 있어 무언가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더 둘러보면 붓글씨를 쓰는지 벼루와 연적, 필가(筆架)도 있고, 먹으로 얼룩진 천도 있었다. 향로도 있고, 다관(茶罐)을 놓은 다포(茶布) 근처에는 찻물 자국이 진했다. 선비다운 서재의 모습이었다. 주인의 인격도 고아(古雅)하리라 짐작이 되었다.

 

옛날 선비들의 서재는 어떠했을까? 남아 있는 그림을 보면 역시 책으로 꽉 차 있지는 않다. 필요한 책만 서가에 놓여 있고, 서안(書案, 예전에 책을 얹던 책상)에는 지금 읽고 있는 책만 단정하게 펼쳐져 있다. 서안 옆에는 연상(硯床, 벼룻집)이 있다. 조촐하구나! 사실 많은 책을 보고 저술하는 것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그 전에는 광람(廣覽)과 박학(博學)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저술을 하는 풍조가 없었다. 아니,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다산조차도 서재에 책을 꽉 채웠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가장 많은 저술을 했던 강진의 초당(草堂)은 좁은 곳이다. 거기에 책이 있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 휴머니스트·현진


 

공부하는 사람이 책을 모아두고 읽는 공간인 괜찮은 서재를 갖고자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희승 선생은 한 개의 돌이로다라는 책에 실린 서재란 글에서, 학자에게는 예지(叡智)와 끈기와 건강이 있어야 하고, 아무리 작더라도 서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뒤, 자신은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했으며 서재다운 서재 역시 가져보지 못했다고 한탄한다. 이어 공부하는 사람에게 서재가 없다는 것은 농부에게 전답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하고, 서재는 학자들에게 육탄전백병전의 싸움터로서 책과 대결을 하여 그 싸움에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고 한다. 따라서 서재 안에서의 전쟁이 우리에게는 성패의 계기요, 사활 문제라고 말한다. , 서재를 두고 이런 비장한 말을 할 수 있다니, 부럽기 짝이 없다.

 

선생은 서재를 몇 종류로 분류한다. 첫째, 응접실보다 화려한 기구를 차려놓고, 가난한 학자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간수해둔 경우다. 그 책들은 금박으로 책등에 제목을 새긴 외국 서적으로서 전문적인 학술서에 가까운 전집들이다. 그 장서를 보면 주인공의 학식만이 아니라 외국어 실력도 매우 높은 것 같지만 대화를 잠깐 나누어보면 무식이 확 드러난다고 말한다. 장서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책이 저장되어 있을 뿐 전혀 읽히거나 이용되지 않는 경우다. 첫 번째 서재와 달리 서재 주인은 책도 잘 알고 책 탐도 있어 책을 부지런히 주워 모은다. 하지만 읽지 않는다. 선생은 이런 사람을 돈만 모으는 수전노와 유사하다고 한다. 다만 첫 번째 부류보다는 격이 높다고 평가한다.

 

셋째, 책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대개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경우다. 서재 주인의 시선도 책갈피나 글줄 사이로 기어들어가 오직 먹칠한 종이에서 금강석이나 노다지 이상의 보물을 파내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덤비는 모습을 이 서재에서 볼 수 있다. 선생은 이 서재야말로 이른바 서적과 대결하려는 학자의 전쟁터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머리를 싸 동이고 몇 날 몇 달을 부비대기를 치다가, 바늘 끝만큼이라도 무슨 새로운 사실이나, 남이 지금까지 생각해내지 못한 것을 발견한 때에는, 그야말로 희희작약(喜喜雀躍)하여, 가슴속에서 용솟음쳐 흘러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이러한 기쁨을 실지로 체험하여보지 못하고서는 그 진미를 알 도리가 없다. 수천 명의 경쟁자와 함께 시험을 치르고, 입학의 관문을 돌파한 사람이 맛보는 승리의 술잔도 방향(芳香)하지 않은 바 아니요, 등산가가 험준한 암벽을 기어오르고 기어올라서, 무쌍한 고난을 극복한 나머지, 절정에 도달하여 하계를 눈 아래 내려딛고, 길게 휘파람을 불 때에 그 쾌감도 여간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서재에서 얻은 적은 진리와 작은 발견으로부터 오는 환희야말로, 전자와 같은 척도로 헤아리고 견줄 수 없는 커다란 무엇이 있다.

 

아마도 선생은 서재가 책과 씨름하여 학문적 깨달음을 얻는 곳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이 서재에서 학문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루었기에 하신 말씀일 것이다.

 

정작 선생의 서재는 어떠했던가? 선생은 반평생 서재다운 서재를 가져보지 못했고, 서재 겸 침실 겸 응접실 겸용의 공간을 이용해왔다고 말한다. 그마저 선생의 전용 공간이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이 같이 사용하는 혼용의 공간이고, 항상 정돈되어 있지 않고 조용할 때가 드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의 서재야말로 진정한 서재가 아닌가 한다.

 

나는 어떤가. 나 역시 직업이 직업인지라 읽고 쓸 곳이 필요하다. 집에 책을 쟁여둔 방이 있어 거기서 읽고 쓴다. 좋은 말로 서재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어떤 교수의 서재에서 풍기는 그런 옛스런 멋은 전혀 없다. 그냥 사방에 아무 장식 없는 나무 서가를 두르고 창가에 넓은 앉은뱅이책상을 두었을 뿐이다. 학교 연구실도 마찬가지다. 그냥 서가와 책뿐이다. 책상 위에 컴퓨터 모니터만 있을 뿐이다. 그날 하루 보아야 할 책이 있으면 뽑아다가 보고 용도가 없어지면 다시 본래의 위치에 꽂거나 도서관에 반납할 뿐이다. 그러니 연구실도 휑뎅그렁하다. 아니, 삭막하다! 언제나 서두에서 말한 분의 서재와 같은 멋있는 곳을 한번 가져보나. 하지만 그만두자. 일석 선생이 말씀하신 첫째, 둘째 서재가 아닌 데 만족하고 말 일이다. 무슨 내 주제에 멋있는 선비의 서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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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16-11-24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핫.... 멋진 서재 가지셔도 될거 같은데요^^
 

젊은 날 공부하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가 사라진 책에 미쳤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책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책은 존재했으되 존재하지 않았던 책이다. 정작 사람을 더 애달프게 하는 것은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책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수도원에만 비장되어 있는 그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 희극 편을 둘러싸고 얼마나 흥미진진한 사건이 벌어졌던가. 이야기는 우리나라 역사에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책으로 번졌다. 만약 그런 책이 다시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그 책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그런 책으로 어떤 것이 있는가? 먼저 누구나 동의하는 책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897) 때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엮었다는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이다. 알다시피 신라시대의 문학은 남은 작품이 많지 않다. 신라 말기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을 제외하면 문집을 남긴 사람도 없다. 신라라는 이름에 비해 문학은 쓸쓸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향가만 해도 그렇다. 삼대목이 전해지고 있다면 우리는 신라시대의 문학과 언어, 사회 등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에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걸쳐서 만들어진 노래집 만요슈(萬葉集)가 남아 있다. 실린 노래는 장가(長歌) 265, 단가(短歌) 4207, 기타 64수로 총 4536수다. 이러니 삼대목이 실전된 것이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한 친구는 삼대목이 나오면, 그리고 그것이 자기 것이 된다면, 어디 사람 없는 데로 가서 연구에 전념하여 일대 저작을 내겠노라고 했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갸륵한 자료 독점욕, 연구욕이라서 이내 다들 나도 나도 하면서 찬동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책이 다시 불쑥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 판소리 열두 마당은 춘향가·심청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배비장타령·변강쇠타령·강릉매화타령·옹고집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숙영낭자타령등이다. 이 중에서 춘향가·심청가·흥부가·적벽가·수궁가는 지금도 불리고 있다. 이따금 텔레비전을 통해 공연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그 외 배비장타령·변강쇠타령·옹고집타령·장끼타령은 노래로 불리지는 않지만, 소설로는 남아 있어서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강릉매화타령·무숙이타령·숙영낭자타령은 노래도 내용도 아주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것이기에 판소리나 소설 연구자들은 더욱 관심이 높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희한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지금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의 김종철 교수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김 교수는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의 전문가다. 어느 날 김 교수는 사라진 무숙이타령을 발견했다고 했다. 사라진 것이 어디서 나타났다는 것인가? 원광대학교의 박순호 교수가 평생 모은 필사본 국문소설을 수십 책의 영인본으로 발간했는데, 그 책 1권의 첫머리에 무숙이타령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 전집은 어지간한 대학 도서관에 다 있었고, 나 역시 그 전집의 첫 권을 도서관 서가에서 빼어서 본 적이 있었다. 왜 나는 무숙이타령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인가.

 

그 전집에 실린 무숙이타령의 제목이 게우사였기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우사誡愚詞로서 어리석은 사람을 경계하는 말이란 뜻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돈 많은 사내 무숙이가 평양 출신으로 서울의 기적(妓籍)에 매이게 된 의양이에게 반해 살림을 차리고서는 그녀에게 자신의 호기로움을 자랑하느라 재산을 유흥에 탕진하자, 의양이가 그의 낭비벽을 고치려고 본처와 무숙이의 친구와 짜고 그가 재산을 다 털어먹게 만들어 알거지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무숙이를 회개하게 하려는 계획이었으니, 일종의 탕자 길들이기인 셈이다. 이 소설은 18, 19세기 서울 시정의 유흥 풍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조선 후기 사회 풍속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만약 김종철 교수처럼 판소리 소설의 전문가도, 부지런한 연구자도 아니었더라면 지금까지도 이 소설은 실전 판소리로 불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휴머니스트·현진

 

 

비슷한 사례로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출현도 있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채수(蔡壽, 1449~1515)설공찬전이란 소설을 지었다. 이게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당시 대간들이 채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왕에게 요구하기도 했으니, 문제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 역시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이름만 문학사에 남았을 뿐이다. 조선 전기 소설사를 구성하는 연구자들은 이름만 남은 이 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추리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이 소설을 찾아내었다. 이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뢰로 조선 전기의 문인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탈초(脫草)하고 있었다. 초서로 쓰인 일기를 해서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옛날 책은 종이를 접어서 한 장으로 쓴다. 접힌 안쪽 부분은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종이의 반을 못 쓰는 것이 아까운 일이다. 어떨 때는 책을 뒤집어 안 쓴 쪽을 밖으로 드러내어 거기에 무언가를 쓰기도 했다.

 

묵재일기역시 그런 재활용 책이었던 모양이다. 이 교수는 작업을 하다가 그 이면에 무언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해 뒤집어 보았다. 읽어보니 뭔가 자신이 아는 지식과 접하는 곳이 있었다. 더 읽어보니 사라진 설공찬전이 아닌가.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그다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논문을 써서 발표하고 번역해서 책을 내었다.

 

그 뒤 나 역시 옛 책을 보면 혹시나 하고 이면을 뒤집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행운이 오지는 않는 법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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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16-11-24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몰랐던 사라진 책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되어 기쁩니다
 

책을 사랑하기로 조선 제일이었던 박학한 독서가 이덕무는 나름 책 빌리기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가난했기에 큰 장서가가 되지 못한 그는 늘 책을 빌려 보는 처지였다. 이덕무에게서 책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책이 많아도 애서인(愛書人)으로 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책을 어지간히 빌렸던 모양이다. 그가 쓴 사소절(士小節)18세기 후반 서울 사족들의 생활상의 에티켓에 대한 저술인데, 당연히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데 대한 에티켓도 있다.

 

먼저 책을 빌리는 사람 쪽을 보자.

 

완성되지 않은 남의 책 원고를 건드려 그 차례를 바뀌게 해서는 안 된다. 장정하지 않은 서화를 빌려달라고 해서도 안 된다.

 

남의 완성되지 않은 원고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장정이 되지 않은 상태의 서화를 함부로 빌려달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의 서적시문(詩文)서화는 일단 보고 난 뒤에 빌려달라고 청해야 한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빼앗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남의 책이나 시문, 서화는 한 번 본 뒤 빌려줄 것을 청해야 한다. 곧 보지도 않고 빌려달라고 해서는 안 된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리 빌리고 싶더라도 억지로 빼앗아 가지고 오면 안 될 일이다. 가까운 벗 사이에는 이런 무례가 일어나기 쉽다.

 

다음은 책을 빌리는 기한이다.

 

남의 장서를 빌리면 꼼꼼하게 읽고 베낀 뒤에 약속한 날짜 안에 돌려주어야 하고, 오래 지체하여 기한을 넘기거나 돌려달라고 채근하는데도 돌려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재차 빌려주어 훼손하거나 잃어버린다면 결국 나의 행실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 될 터이다.

 

그래, 책을 빌렸으면 약속한 날까지 돌려주어야 한다. 가슴에 찔리는 말이다. 도서관의 책도 빌렸다가 늦게 반납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벌금까지 물고 만다. 돌려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땅히 다시 먼지를 떨고 차례대로 정리해서 보자기에 싸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옛날 책은 여러 권이다. 10권이 한 세트라면 1권부터 10권까지 정리해서 먼지를 떨고 보자기에 얌전히 싸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는가?



휴머니스트·현진


 

빌려온 책은 당연히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남의 글씨 병풍이나 그림이 있는 가리개 병풍을 빌리면 마땅히 보물처럼 여기며 완상해야 할 것이다. 창이나 벽을 가려 바람과 추위를 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또 보풀이 일고 주름이 지고, 침과 콧물 자국이 나도록 해를 넘겨 돌려주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빌려온 책에 오류가 있다고 하자. 책을 읽는 사람은 견딜 수가 없다. 고치고 싶다. 그럴 경우 책에다 교정을 해서는 안 된다. 책 주인이 옛것을 사랑하여 내용을 중시하는 사람’, 곧 학문이 있고 책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정을 해주어야 한다. 어떻게? 종이쪽에 별도로 써서 그 곁에 조심스럽게 붙인다. 함부로 책에다 써서 고쳐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주인이 물건을 아끼기만 하고 학문이 없는 사람이라면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귀중한 책은 그냥 빌려 읽고 마는 것은 아니다.


   책을 베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아야 한다. 해서(楷書)와 초서를 섞어 써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 끝에 가서는 게을러져서 마음의 거친 것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 마땅히 한 부의 책을 완성해야만 할 것이다.

 

책을 빌리는 중요한 이유는 베끼는 것이다. 베낄 때는 해서로 단정하게 베껴야 하고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베껴서 완성해야 할 것이다.

 

빌려주는 사람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이덕무는 남에게 책을 빌려주어 뜻하는 사업을 성장케 하는 것은 남에게 재물을 주어 그 곤궁을 구제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책을 많이 빌려 본 사람이라 그런지 책을 빌려주어 한 사람의 지적 성장을 돕는 것은 재물을 주어 곤궁을 구제하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빌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빌려주는 것이 책 가진 자의 도리가 된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책을 빌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인색하게 굴지 말고 즉시 빌려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빌릴 때 그 사람이 혹 빌려주지 않으면 화를 낼 필요가 없다. 뒷날 그 사람이 또 빌리려고 올 경우 전에 나에게 빌려주지 않았다며 앙갚음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부형이 빌려주지 않으려 한다면, 처음에는 부형에게 잘 말씀드리고, 그래도 끝내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부형이 빌려주지 않으려 하신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책을 빌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빌려주라는 말이다. 한편 내가 빌려준 어떤 사람에게서 책을 빌릴 때 그 사람이 빌려주지 않는다 해서 화를 내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뒷날 나에게 책을 빌리러 왔을 때 복수심에 꽁하여 빌려주지 않아서도 안 된다. 보고 싶구나.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는지.

 

하지만 책을 빌려주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부형이 허락하지 않는 경우다. 허락을 얻기 위해 다시 여쭙지만 그래도 허락하지 않는다면 빌려줄 수 없다. 다만 부형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어른을 욕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덕무의 에티켓은 지금도 통한다. 하지만 책이 흔해진 세상, 어지간한 책은 구할 수 있고 또 도서관에서도 빌려 볼 수 있으니, 이런 에티켓도 소용없게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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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책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또 가지고 싶은 책이라 해서 다 가질 수도 없다. 도서관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도서관이 없던 시대 혹은 도서관이 없는 사회라면, 또 있어도 이용할 자격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빌려서 보는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빌린다는 말은 아주 가까운, 인접 관계에 있는 말이다. 다른 물건을 상상해보라. 책처럼 쉽게 빌려달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 이러니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에 근거를 둔 이야기도 숱하게 많다.

 

조선 초기의 문인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이야기다. 어느 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에게 희귀한 책 한 권을 빌려달라고 한다. 당연히 빌려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책을 돌려주지 않는다. 집으로 찾아가 돌려달라고 채근을 했더니 돌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고 물으니, 자기 머릿속에 다 있다며 좔좔 외운다. 빌려간 책을 뜯어 도배를 해놓고 외운 것이다. 이쯤 되면 돌려받는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책은 빌리고 빌려주는 것이고, 또 그런 과정에서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모아보면 책 한 권 분량은 나올 것이다.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라면 병자호란 때 주화론자였던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손자이고 또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무려 여덟 차례나 영의정에 올랐다). 이분은 구수략(九數略)이란 수학 책을 저술한 수학자로도 유명한데, 한편으로는 책을 엄청나게 많이 소장한 장서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석정은 자신의 책에 장서인을 찍지 않았다. 책은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분이었으니 책을 잘 빌려주었던 것은 불문가지다. 또 책을 돌려달라고 채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돌려받을 때 책을 읽은 흔적이 없으면 몹시 언짢아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진정한 독서가, 애서가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떤 선배 교수님에게 책을 잔뜩 빌렸다. 10년을 실컷 보고 난 뒤 돌려주려고 하니, 그냥 가지고 있으란다. 자신은 당장 볼 일도 없고 연구실도 좁아 그 책까지 돌려받으면 따로 둘 데도 없단다. 가지고 있다가 자신의 정년 때 돌려달라고 한다. 뭔가 이상하다. 그 선배 교수님은 정년이 되면 책을 모두 없애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구실로 돌아와 곰곰 생각해보니, 이게 책을 맡아달라는 건지 가지라는 건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쨌건 그분의 정년 때까지 그 책들은 내 연구실에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분은 최석정 같은 분인가 보다.

 

어떤 책이 갑자기 필요해서 서가를 뒤져보면 없다. 다시 훑어보아도 없다. 연구실에도 없고 집에도 없다. 이럴 경우 누가 빌려간 것일 터이다. 어떤 책은 기억이 나지만 어떤 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전에는 무지하게 아쉬웠지만, 요즘은 깨끗이 잊고 만다. 왜냐고? 내 서가에도 빌려 보고 돌려주지 않은 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고의적으로 책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어쨌든 이래서인지 요즘은 빌려주고 까마득히 잊어도 별로 충격을 받지 않는다.


 

휴머니스트·현진


 

책을 빌리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못내 아쉬운 책, 아니 문서가 있다. 1980,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알다시피 1016일 그 사건이 일어났다. 부마민주화항쟁 말이다. 아침에 상대(商大) 건물에 강의를 들으러 갔더니(상과대학 학생은 아니지만, 상과대학 강의실에서 수업을 해 들으러 갔다), 학생들이 줄지어 미라보다리(부산대학교 안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강의를 팽개치고 따라갔다. 구도서관 자리에 이르렀더니, 선언문을 낭독하는 사람이 있었고, 이어 구호를 외쳤다. 스크럼을 짜고 곧 학교 대운동장으로 내려갔다. 학교 옆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담장이 무너졌고, 학생들은 거기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다음부터는 다 아는 이야기다. 남포동, 광복동에서 박정희 정권의 타도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나는 부산대학교 학생이었다. 그다음 날도 같은 시위가 있었다. 나는 그날도 부산대학교 학생이었다.

 

버스가 폭발해 화염이 치솟았다. 파출소 안에 벌겋게 불이 번지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보았다. 이건 역사적 사건이었다. 내가 본 것을 기록해야만 해! 집으로 돌아와 내가 본 시위의 시작과 끝을 꼼꼼히 적었다. 오랫동안 나는 그 종이 뭉치를 소중히 간직했다. 그 뒤 1980년대에 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할 때다. 워낙 엄혹한 시절이라 학교 안에도 사복 경찰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저항했다. 등사판으로 찍어낸 성명서, 선언서 같은 것들이 교정에 뿌려졌다. 손에 닿는 대로 그것들을 모았다. 나와 가까이 지내는 학생들은 그런 것들을 보면 일부러 챙겨다주었다. 이것도 언젠가는 역사의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따로 갈무리해두었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다시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친구와 술을 먹다가 부마항쟁으로 화제가 번져 그때 일을 기록한 자료가 있다고 했더니 빌려달란다. 그 자료는 친구의 손으로 건너간 뒤 다시는 나의 손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거의 30년이 지난 뒤 친하게 지내는 동료 교수가 전에 그 자료에 대해 들었다면서 보자고 한다. 당연히 보여줄 수가 없었다.

 

2011년인가, 그 이듬해인가 부산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에서 그 자료에 대해 어디서 들었는지 좀 보자고 했다. 자료를 빌려간 친구는 같은 과 동료 교수와 이래저래 인척 관계가 된다. 그래서 동료 교수를 통해 연락했더니 이미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어쩌고 하는 동안 사라진 것이다.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기념사업회 쪽은 아주 서운해했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물이 정리되어 있지만, 부마항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연구실로 찾아온 그분은 녹음이라도 남기는 것이 옳다면서 내 희미한 기억을 꺼내어 가져가려고 했다.

 

생각해보면 특별한 사람이 역사의 자료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좀 더 마음을 썼더라면 그 자료를 곱게 정서해서 복사해두었을 것이다. 신중하지 못했던 젊은 날이 마냥 후회스럽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빌려줄 자료가 있고, 아닌 자료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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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6-10-20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머니스트는 어쩜 이리 사람다움이 느껴질까요 말씀 하나하나 정겹게 느껴지네요

2016-12-21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잃어버린 자료에 대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팠어요 ㅠㅠ
 

가끔 헌책을 사면 그 안에서 별것이 다 나온다. 책장과 책장 사이는 무언가 얇은 것을 숨기기 좋은 장소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오래된 엽서를 본 적도 있고, 우표를 본 적도 있다. 꽃잎이나 나무 잎사귀도 흔하다. 여학생들이 그런 것들을 책갈피 사이에 넣어두었다가 편지를 보낼 때 붙여 보내곤 했는데,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뒷날 헌책을 산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해운대와 가까운 일광 쪽으로 갔다가 고물가게에서 책을 몇 권 샀는데, 그 책 속에서 일제강점기의 우편저금통장이 나왔다. ‘東萊郡 機張面(동래군 기장면)’ ‘大日本婦人會 機張面支部 貯金組合(대일본부인회 기장면지부 저금조합)’이란 푸른 도장이 찍혀 있고, 안에는 돈을 언제 얼마 저축했는지 적혀 있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지만, 한편 재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버리지 않고 서가에 얹어두었다.

 

옛날 책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어느 대학에 계시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다. 고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는데, 안에서 희한한 것을 보았노라고 한다. 무슨 고서냐고? 흔하디흔한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이런 것이다. 집에 와서 책을 들추다 보니, 책갈피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고서는 인쇄한 종이를 접어서 책으로 맨다. 그러니 접힌 종이 안에 무언가를 넣을 수 있다. 그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더니, 좀 이상한 그림이었다고 한다. 그림이라고? 무슨 그림? 공부하는 학생들이 보아서는 곤란한 그런 그림이다. 이쯤 말해도 모르시겠는가? 춘화(春畵), 다른 말로 포르노그래피다. 물론 빼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볼 만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책의 주인은 거룩한 성인의 말씀을 공부하다가 좀 지겨워지면 춘화를 꺼내서 감상했던 것인데, 그것을 넣어두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젊은 아들은 과거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시험공부란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지겨운가. 엄한 아버지의 눈초리에 목이 늘 당긴다. 공자왈 맹자왈을 수없이 반복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책갈피에 넣어놓은 춘화를 꺼내보며 야릇한 상상에 빠진다. 이런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그런데 일은 늘 공교롭게 일어나게 마련이다. 실로 오랜만에 춘화를 꺼냈는데, 그때 마침 어흠, 어흠, 아무개 있느냐하는 아버지의 음성이 문밖에서 들린다. 후다닥 춘화를 책 속으로 집어넣고 하고 답한다. 어디로 심부름을 갔다 오라는 하명이시다. 이러구러 세월은 흘러 그 책 속 어디에 춘화를 넣어두었는지 까마득히 잊고 만다. 그게 백수십 년을 뛰어넘어 어느 고서점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말이 옆으로 빠지지만 불쑥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중학생 때 친구들 가운데 좀 올된 녀석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이상한 사진을 가지고 왔다. 쉬는 시간에 교실 한구석에 뭉쳐서 그것을 보느라 선생님이 오신 줄도 모르다가 결국 사진을 빼앗기고 사진을 가져온 녀석은 교무실로 불려가 출석부로 머리를 통타(痛打)당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이런 책을 보는 학생이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 그런 희한한 것들이 지천이니 말이다.

 

 

휴머니스트·현진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란 책을 보면 책갈피 속의 물건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실려 있다. 이 책은 규장각 서리를 지낸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이란 인물이 편집한 책인데, 양반이 아닌 부류들(주로 중인 계층)의 전기를 모은 것이다. 조선 후기에 역관. 의관 등 기술직과 서울 각 관청의 서리들이 자의식을 가지고 문예운동을 활발하게 벌였는데, 대개 그런 인물을 중심으로 비양반층의 전기와 일화를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유재건은 이 책에 자신이 쓴 겸산필기(兼山筆記)를 잔뜩 인용해두었다. 그중 홍윤수(洪胤琇)란 인물에 대해 짤막하게 쓰고 있다. 홍윤수는 가난한 독서가다. 양반이 아니니 과거에 응시할 일이 없다. 하지만 독서인이다. 그는 필사(筆肆, 붓 가게)와 책시(冊市, 서점)를 오가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무슨 붓 가게나 서점을 냈다는 것은 아니고,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주고 구문을 받는 거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금속활자의 나라 조선에는 희한하게도 책을 만들어 파는 출판사가 아예 없었고, 서점도 19세기나 되어서야 출현했다. 위의 책시란 것 역시 19세기의 것일 터이다. 사정이 이랬으니 책을 사기를 원하는 사람도 개인이고 팔기를 원하는 사람도 개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양자 사이에서 중개를 하는 사람을 책쾌(冊儈)라고 한다. 책거간(冊居間)이란 뜻이다.

 

홍윤수가 하루는 친구가 팔아달라고 내놓은 경서 몇 함을 구매해주는 단골 책가게에 가져다주기 전에 훑어보는데 그 안에서 금은과 대모갑(玳瑁甲), 곧 바다거북의 등딱지로 장식한 칼 한 자루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제법 돈이 될 만한 것이었다. 처자식들이 늘 굶주리는 판이었다. 자신이 그 칼을 가진다 해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갈등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는 즉시 친구를 찾아 칼을 돌려주었다. 이게 제법 의리 있는 일로 평가를 받아 기록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 비싼 칼까지 책 속에 넣고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존경하던 어느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서재의 책을 정리하다가 희한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책 안에서 편지 봉투가 나왔는데, 현금 약간과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를 꼼꼼하게 적은 종이쪽이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인터넷뱅킹도, 현금카드도 없었다. 월급을 종이봉투에 현금으로 넣어 주던 시절이었다.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었지만 어쩌다 생기는 현금을 한곳에 따로 두고 사모님 몰래 관리했던 것이다. 그 점잖으신 분이 서재에서 사모님이 보지 않게 봉투에 현금을 넣고 빼는 광경을 생각해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하하!

 

그러고 보니 나 역시 10년 전쯤 어떤 논문집에 현금을 약간 넣어두고 뒤에 찾으니 씻은 듯이 없었다. 착각을 했나 싶어 가지고 있는 논문집을 죄다 꺼내놓고 샅샅이 뒤졌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몇 해 전 논문집들이 자꾸 불어나 한데 묶어 버렸는데, 아마도 그 논문집에서 현금을 약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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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6-10-20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너무 와닿아서 웃으며 읽었어요^^

몽당연필 2016-10-23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다 덮은 책에서 빳빳한 지폐 한 장이 나올땐 횡재한 기분이 들어요 ^^

백팔배 2016-12-1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해운대에 사는데 선생님같이 책을 좋아하는 분을 뵙게되면 참 좋을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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