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공부하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가 사라진 책에 미쳤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책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책은 존재했으되 존재하지 않았던 책이다. 정작 사람을 더 애달프게 하는 것은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책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수도원에만 비장되어 있는 그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2권 희극 편을 둘러싸고 얼마나 흥미진진한 사건이 벌어졌던가. 이야기는 우리나라 역사에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책으로 번졌다. 만약 그런 책이 다시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그 책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렇다면 그런 책으로 어떤 것이 있는가? 먼저 누구나 동의하는 책은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897) 때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엮었다는 향가집 삼대목(三代目)이다. 알다시피 신라시대의 문학은 남은 작품이 많지 않다. 신라 말기 인물인 최치원(崔致遠)을 제외하면 문집을 남긴 사람도 없다. 신라라는 이름에 비해 문학은 쓸쓸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향가만 해도 그렇다. 삼대목이 전해지고 있다면 우리는 신라시대의 문학과 언어, 사회 등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에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걸쳐서 만들어진 노래집 만요슈(萬葉集)가 남아 있다. 실린 노래는 장가(長歌) 265, 단가(短歌) 4207, 기타 64수로 총 4536수다. 이러니 삼대목이 실전된 것이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 한 친구는 삼대목이 나오면, 그리고 그것이 자기 것이 된다면, 어디 사람 없는 데로 가서 연구에 전념하여 일대 저작을 내겠노라고 했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갸륵한 자료 독점욕, 연구욕이라서 이내 다들 나도 나도 하면서 찬동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책이 다시 불쑥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 판소리 열두 마당은 춘향가·심청가·흥부가·수궁가·적벽가·배비장타령·변강쇠타령·강릉매화타령·옹고집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숙영낭자타령등이다. 이 중에서 춘향가·심청가·흥부가·적벽가·수궁가는 지금도 불리고 있다. 이따금 텔레비전을 통해 공연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그 외 배비장타령·변강쇠타령·옹고집타령·장끼타령은 노래로 불리지는 않지만, 소설로는 남아 있어서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강릉매화타령·무숙이타령·숙영낭자타령은 노래도 내용도 아주 사라져버렸다. 사라진 것이기에 판소리나 소설 연구자들은 더욱 관심이 높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희한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지금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의 김종철 교수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김 교수는 판소리와 판소리계 소설의 전문가다. 어느 날 김 교수는 사라진 무숙이타령을 발견했다고 했다. 사라진 것이 어디서 나타났다는 것인가? 원광대학교의 박순호 교수가 평생 모은 필사본 국문소설을 수십 책의 영인본으로 발간했는데, 그 책 1권의 첫머리에 무숙이타령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 전집은 어지간한 대학 도서관에 다 있었고, 나 역시 그 전집의 첫 권을 도서관 서가에서 빼어서 본 적이 있었다. 왜 나는 무숙이타령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인가.

 

그 전집에 실린 무숙이타령의 제목이 게우사였기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우사誡愚詞로서 어리석은 사람을 경계하는 말이란 뜻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돈 많은 사내 무숙이가 평양 출신으로 서울의 기적(妓籍)에 매이게 된 의양이에게 반해 살림을 차리고서는 그녀에게 자신의 호기로움을 자랑하느라 재산을 유흥에 탕진하자, 의양이가 그의 낭비벽을 고치려고 본처와 무숙이의 친구와 짜고 그가 재산을 다 털어먹게 만들어 알거지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무숙이를 회개하게 하려는 계획이었으니, 일종의 탕자 길들이기인 셈이다. 이 소설은 18, 19세기 서울 시정의 유흥 풍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조선 후기 사회 풍속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만약 김종철 교수처럼 판소리 소설의 전문가도, 부지런한 연구자도 아니었더라면 지금까지도 이 소설은 실전 판소리로 불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휴머니스트·현진

 

 

비슷한 사례로 설공찬전(薛公瓚傳)의 출현도 있다. 조선 전기의 문인인 채수(蔡壽, 1449~1515)설공찬전이란 소설을 지었다. 이게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당시 대간들이 채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왕에게 요구하기도 했으니, 문제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 역시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했다. 이름만 문학사에 남았을 뿐이다. 조선 전기 소설사를 구성하는 연구자들은 이름만 남은 이 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추리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경대학교 이복규 교수가 이 소설을 찾아내었다. 이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뢰로 조선 전기의 문인 이문건의 묵재일기를 탈초(脫草)하고 있었다. 초서로 쓰인 일기를 해서로 옮기는 작업이었다. 그런데 옛날 책은 종이를 접어서 한 장으로 쓴다. 접힌 안쪽 부분은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종이의 반을 못 쓰는 것이 아까운 일이다. 어떨 때는 책을 뒤집어 안 쓴 쪽을 밖으로 드러내어 거기에 무언가를 쓰기도 했다.

 

묵재일기역시 그런 재활용 책이었던 모양이다. 이 교수는 작업을 하다가 그 이면에 무언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해 뒤집어 보았다. 읽어보니 뭔가 자신이 아는 지식과 접하는 곳이 있었다. 더 읽어보니 사라진 설공찬전이 아닌가.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그다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논문을 써서 발표하고 번역해서 책을 내었다.

 

그 뒤 나 역시 옛 책을 보면 혹시나 하고 이면을 뒤집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행운이 오지는 않는 법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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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16-11-24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혀몰랐던 사라진 책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알게되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