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급식소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의 원인이 “굉장히 복잡한 문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복잡한 문제의 전문가라는 것이다. 유명한 ‘합리주의자’ 로버트 맥나마라조차 “안개(fog)”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이 문제를 간단하게 정리했다. “전쟁의 원인은 단 한 가지, 누군가 혹은 우리가 원하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말한다면, 유토피아는 없다는 뜻이지만 우리가 원한다면 실현될 수 있다.
요즘은 외식이 일반화되었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 외식은 특별한 날을 의미했다. 사실 지금도 세끼를 모두 외식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다시 말해, 우리 앞 세대뿐 아니라 지금도 대부분의 여성들이 식사 준비와 그 스트레스로 인생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는 얘기다.
내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걱정이 “오늘 저녁 반찬”이었다. 1938년생에 고교 국어교사. 대학원 졸. 그 시절 보기 드문 배운 여성이었지만, 전업주부가 되면서부터 엄마의 관심사는 식구들 먹을거리가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업주부가 된 것은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흡연을 비롯한 당신의 잘못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고, 식성은 까다로웠다. 할머니는 늘 “희진 애비 건강”으로 엄마를 닦달했다.
엄마는 ‘인간이 두 끼만 먹어도 전쟁이 멈출 것’이라고 매일 짜증을 부리셨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계급성을 음식으로 증명하고자 했다. 완벽한 식단에 대한 강박과 자부심이 컸다. 내가 어른이 되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이 문제였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평생을 남의 밥걱정을 하고 살아야 한다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문명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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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0년대 초반 미국에 유학 갈 예정이었다. 9.11 사건 전이라 운이 좋았다. ‘명문대’에 장학금이 제공되는 드문 기회였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합창하듯 말했다. “식구들 밥은 어떡하고?” 그때 나는 분노를 넘어 충격 받았다. 왜 나보다 ‘공부도 못하는’ 인간들이 식사 준비를 비롯해 아무것도 안하면서, 남의 앞길을 가로 막는가? 자기들이 밥을 하면 죽는가? 식사 준비가 저급한 노동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만, 나는 밥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이유로 유학을 포기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분노는 ‘조절 장애’ 상태다.
《성의 변증법》에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집집마다 같은 시간에 모든 여성들이 똑같은 식사준비를 한다”고 썼다. 그녀는 이러한 현상이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분리 통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정마다 한 명씩 미래의 혁명가가 배치된 것이라고 썼다. 내 생각을 보태면 이것은 환경 파괴이자 여성에 대한 족쇄, 인권 유린이다.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취업, 계층, 비혼 여부를 불문하고 머릿속에 ’오늘 뭐 할까‘를 고민하고 산다. 계급을 초월하여 남성들은 이 고민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그들은 그 시간에 정치와 문학과 술과 여자를 논한다. 기존의 전통적인 여성주의 이론에서 여성들 간의 공통점, 즉 여성 정체성의 정치가 가능한 것은 섹슈얼리티(성폭력과 모성)이라고 보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밥이다.
어차피, 식사 준비가 남성의 성역할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최후의 페미니스트 혁명으로도 불가능한, 마르크스주의도, 민족주의도, 히틀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평생 섹스를 못하게 한다고 해도,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도, 종(種)을 전멸시켜도 그들은 하지 않을 것이다. 브라질 중부의 보로로족 사회에서는 남성이 하는 일과 여성이 하는 일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특히 남성이 요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서 결혼한 남자만이 아내가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따라서 미혼 남성은 굶는 이들이 많다. 탈북한 여성들의 인터뷰를 보면, 북한 남성들도 아내가 먹을 것을 구해 와서 “밥을 해 댈 때까지 생쌀을 쳐다보기만 하고” 있단다.
내가 아는 어느 환경운동 공동체에서 남성들에게 새벽 4시에 일어나 식사와 도시락 준비를 하게 했다. 1주일을 버틴 남성이 없었다. 그들은 ’어떤 일이라도 하겠으니, 이것만은 못 하겠다‘고 버텼다. 그 공동체에서 해 본 모든 프로그램 중에 가장 효과가 좋았다고 한다(물론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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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임금 노동인 끼니 준비는 여자의 일이면서, 스타 셰프나 음식평론가는 남성이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일을 주면 된다. 급식소의 식단, 안전성, 맛, 고용 상태 감시, 음식 문화 무료 강좌… 할 일 많다. 나는 이 일이 그렇게 엄청난, 어려운,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洞 단위에서만 실험해보면, 이주민으로 그 동네는 인구가 폭발할 것이다. 지자체장의 월급은 주민 수에 따르니 그들도 주민 증가가 반가울 것이다.
아, 일단, ‘처갓집’, ‘장모님’, ‘어머니’, ‘할머니’ 이름이 들어간 상호부터 불법 조치해야 한다. 이는 마치 석탄회사 이름이 ‘깜뚱이 광업’, 안마 시술 업체 이름을 ‘장님산업주식회사’라고 하는 이치와 같다. 여성도 남성도 가끔 밥을 할 수는 있지만, 타인에게 밥을 해주기 위해 태어난 인간은 없다.
정희진(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은 여성학・평화학 연구자다. 저서에 《아주 친밀한 폭력》,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처럼 읽기》가 있다. 최근작 《양성평 등에 반대한다》의 편저자이며, 50여권의 공저서가 있다. 300권 이 넘는 책의 해제와 서평을 썼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글쓰기 강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