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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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 부모를 둔 딸의 애환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군상극이다. 소설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에 아버지와 어떤 식으로든 사연이 엮인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그때마다 딸은 아버지와의 애증 어린 추억 조각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그려냈다는 것에서 영화 '학생 부군 신위'가 떠올랐다. 이데올로기를 바닥에 깔고 있으면서도 소설은 전체적으로 우스꽝스럽다. 사상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사상과는 무관한 삶을 사는 요즘 세대도 가볍게 접할 수 있도록 작가가 의도적으로 판을 그렇게 짠 듯하다.


채플린이 이런 말을 했다. 코미디의 본질은 비극 더하기 시간이라고. 시간이 먼지처럼 두껍게 쌓이면 비극도 희화화되어 공기처럼 일상 속으로 스민다. 오래전 꼬마 때, 운동회 중간에 선보이는 멸공 퍼포먼스가 굉장히 무서웠다. 커다란 김일성 인형을 불태우고, 뿔난 괴물 가면을 쓴 괴뢰군 대역을 포박해서 끌고 다니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해서 섬뜩했다. 그런데 시간이 이만큼 지나 그때 장면을 회상해보니 뭔가 우스꽝스러운 촌극으로 여겨진다. 지금 똑같이 그런 퍼포먼스를 한다면 정말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없을 것이다.


작가는 그렇게 머나먼 시간의 뒤안길에서 바라본 비극의 희극성을 다루고 있다. 이데올로기라는 묵직한 비극이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 휘발되고 남은 자리에 한 줌 재로 흩뿌려진 아버지의 맨얼굴을 그린다. 그 맨얼굴은 우리네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는 빨치산을 적이나 사상이 아닌 인간으로 그린 영화 '남부군'의 주제와도 닿아 있다. 꼭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문득문득 잊고 지낸다. 살아가며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했던 가면 뒤에 감춰진 진실의 맨얼굴을! 이념과 편견에 덮여서 알지 못했던 인간의 진심을!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이러한 가치를 순간순간 돌아보게 한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그렇게 새로운 소설은 아니다. 기시감이 많이 들고 캐릭터들도 스테레오 적이다. 때문에 엄청 재미있는 소설도 아니다. 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트렌디한 척하는 가볍고 실속없는 책들보단 훨씬 묵직하고 품격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작가의 깔끔한 문장과 유머러스한 전개, 그리고 마음 한쪽을 따뜻하게 감싸는 아름다운 표현들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교과서에 실리면 딱 어울릴 소설이다.


해방이란 뭘까? 그것은 그리움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리움'은 프리즘처럼 많은 감정의 파장을 품고 있다. 출구 없는 미로 속에 갇힌 듯, 삶이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은 그리움이 품고 있는 무수한 빛의 난반사다. 그 빛은 머나먼 추억 속에도 바로 지금 가까운 곳에도 있다. 다만 우리의 미성숙함이 눈을 가려 보지 못할 뿐이다. 지나고 난 후에 우리는 많은 것을 새로이 알게 된다. 그때 그 시간이 품고 있던 찬란했던 가치를.


p.s. 여담이지만- 최근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손석구, 김지원 주연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빌려온 듯한 제목 덕을 톡톡히 본 듯하다.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이렇듯, 제목짓는 센스도 타이밍도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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