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된 세상의 비릿한 죽음을 애도하며


언젠가 평론가 신형철이 이렇게 말했다. 죽은 노무현은 희화화할 수 있어도, 노무현의 죽음은 희화화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극단적인 폭력이자 시신의 훼손이라고 말이다. 이 한 구절을 두고 나는 한국 사회의 몇 가지 도착과 그 비극적 결말을 떠올린다.

먼저 사퇴한 조국을 비웃을 수는 있어도 조국의 사퇴는 비웃을 수 없다. 개인으로서 조국 일가가 몇몇 얄미운 짓으로 인한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면야 충분히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개혁을 하려다 개혁대상의 폭력적인 압력에 못 이겨 물러난 그의 사퇴를 조롱할 수는 없다. 사퇴한 조국은 흠결 있는 개인이지만, 조국의 사퇴는 기득권에 의한 개혁 의지의 축출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있다. 설리의 죽음은 그 자체로 한 개인의, 나아가 한국 사회가 낳은 비극이다. 그러나 언론이 죽은 설리의 사진을 찍어 전시하는 행위는 그보다 더 큰 비극이다.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비윤리다. 아니 몰윤리다. 이는 한 인간의 죽음을 극단적으로 훼손하는 행위이자, 개념으로서의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망가뜨리는 행위기 때문이다. 사체를 전시하여 돈벌이로 삼는 짓은 결코 언론의 자유가 될 수 없다.

또 하나의 비극이 더 발생했다. 구하라의 죽음이다. 노무현의 죽음과 조국의 사퇴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면, 이 두 죽음은 사선의 근처에 있던 모두가 염려하던 예견된 죽음이었다. 우리 사회 모두가 한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연이어 목격하였다. 끝끝내 82년생 김지영에게 부정했던 혐오는 94년생 설리와 91년생 구하라에겐 엄연히 실존했던 폭력이었다. 죽은 구하라는 법의 '복수'를 기대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와 자유로운 인신공격, 죽음으로 이끈 표현과 죽음이 다 표현하지 못한 이 세상의 부조리들. 도착된 세상에서 죽어가는 이들과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비릿함. 인터넷의 몇 바이트 남짓한 활자가 그녀들의 가슴에 남긴 것을 보아라. 우리 시대의 칼은 6인치의 액정과 108자의 키보드다. 연예인은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였고, 악플은 산업재해였다.


정치의 발전은 누군가를 축출해서, 의식의 발전은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쫓아야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왜 이 세상은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을 세상에서 쫓아내고자 하는가. 왜 자꾸 세상은 누군가의 부재로 존재의 소중함을 깨우치려 하는가. 죽음이 윤리의 교본이 되기 전에, 윤리가 죽음을 막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또 한 번 보아라. 모든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다. 시대 어느 한 귀퉁이가 썩어가는 대한민국에서 모두들 안녕들 하시길 바란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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