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두툼한 폴라티와 검정 코트를 입고 약국에 갔다. 인간은 항온 동물이라는 생물학의 판정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추위에 약하다. 영하에 가까워질수록 골골대는 빈도가 높아진다. 이번엔 목감기다. 간단히 증상을 말하고 약을 받았다. 계산은 카드로 지불했다. 쌀쌀한 기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온성이 강한 털실들이 묘한 포근함을 자아냈다. 영수증을 건네받았다. 아 약값은 이제 엄마 카드의 범위가 아니구나. 이 정도는 스스로 지불하고 산 지 오래였다. 철없는 아들은 별것 아닌 일에 문득 어른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대단한 인생을 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초라한 삶도 아니었다. 나는 이제 스무고개의 후반에 다다른 풋내기니까. 드러내놓고 주장할 업적도 없었지만, 덮어두고 부정할 실책도 저지르지 않았다.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자랐다. 항상 많은 것을 양보했고, 바라는 것을 바라기를 포기하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못 사는 집 중에서 가장 못 산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는 습관을 지니고 살았다. 그렇지만 올곧게 자랐고, 제법 명석해지려 노력했다.

 

스물하나부터 혼자 벌어 썼다. 아니 벌어 쓸 수밖에 없었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게다. 고등학교 때는 돈 안 드는 게 공부랑 축구밖에 없어서, 그거 두 개를 열심히 했다. 공부 못하는 학교에서 전체석차로 수석 내지는 차석을 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나는 스스로를 개천의 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삼수를 했다. 수험기간 2년 동안 이혼소송과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야 했다. 유일하게 어려운 글을 읽을 줄 아는 내가 소송을 떠맡았다. 변호사 선임비가 있을 리가. 법률구조공단에 아쉬운 소리 해가며 겨우 작성했다. 이때부터 나는 아버지와 관련된 모든 것을 부정하며 살았다. 그 반대로만 살면 훌륭한 인생일 거야 하며. 그래서 나는 건국의 아버지도 싫어하고, 가부장제도 싫어한다. 오이디푸스를 사랑하고, 가끔은 사도세자를 연민한다.

 

그 뒤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편의점, 마트, 이삿짐, 웨딩홀, 뷔페, 학원, 피씨방 등등. 근로 장학생을 매 학기 했고, 상금이 걸린 대회만을 기다렸다. 경제적 자립은 고통스러웠고 또 자랑스러웠다. 벌이는 적고, 해외 한 번 못 나갔어도 나는 항상 떳떳했으며 품이 컸다. 없이 살았던 나는 항상 마음만은 부자였다. 내 주변엔 항상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인복은 타고났다. 친구들은 기꺼이 나를 위해 돈과 시간을 지불했다. 국가와 학교를 비롯한 공동체는 약간의 잔재주를 갖춘 나에게 격려와 장학금을 아끼지 않았다. 2년간 생활비로 1,200만 원을 받았다. 그 덕에 사랑도 해봤다.

 

인생의 불행을 몇 개 타고났지만, 못지않은 행운을 가졌다. 나에겐 쾌가 넘치는 웃음소리가 있었고, 그 웃음소리는 의기투합이 가능한 친구를 데려왔다. 친구들은 나보다 속이 깊었다. 한 놈은 나보고 돈 때문에 공부 포기하지 말라며 20만 원을 보내놓고는 군대로 도망가 버렸다. 또 한 놈은 문제집을 주워 푸는 걸 보고, 당해 EBS 문제집 전권을 사놓고 집 문 앞에 두고 갔었다. 다른 친구는 어머니 교통사고 수습을 그냥 도와줬다. 콜라 귀신인거 알고 기숙사에는 콜라가 몇 상자씩 보내져있기도 했다. 대학 선배는 책을 사주고, 외투를 사줬고, 다른 학교 친구 놈은 양복을 해 입혔다. 이른바 내 인생은 자랑스러운 협찬 인생이었다. 나를 늘 지지해주는 동료 및 선후배들에게 매번 살갑게 연락하지 못해 잠깐 미안했다. 그래도 나 사람장사는 참 잘했다는 자아도취를 여기서 안 하면 어디서 한번 해볼까. 뭐 여하간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니까.

 

늦잠을 자는 바람에 도서관에 자리가 없어, 근처 카페로 밀려 나왔다. 삶을 돌이키게 된다. 내가 존경했던 한 사람의 책을 읽으면서 도리어 내 인생을 반추해본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언가를 읽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항상 사람을 찾는다. 동안의 외모에 애늙은이 같은 정서를 가졌고, 본인 스스로 외모에 꽤 만족하고 산다. 키까지 컸으면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킬 뻔했다. 삶이 아름다워서라기 보다는 사람이 좋아서 산다. 아마 나는 개의 방정맞은 꼬랑지를 가진 늑대의 일족이 아니었을까. 자기소개 끝.

 

-2017. 11. 14 @PrismMaker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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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7-11-14 2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있다. 내실 있는 글은 그야말로 내실에서 나오는군요.....

프리즘메이커 2017-11-15 14:48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syo님을 만난것도 제 인생의 행운!

sprenown 2017-11-15 09: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이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는 건가요? 낙장불입! 기대됩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11-15 14:48   좋아요 0 | URL
헤헤 무섭습니다..힘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