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여행 - 루벤스의 스페인에서 고갱의 타히티까지
요아힘 레스 지음, 장혜경 옮김, 김소희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예술가의 여행] 화가의 여행에서 엿볼 수 있는 것들

 

 

http://der_insel.blog.me/120160881231

 

여기 열세 명 화가들의 여행기가 있다. 서유럽 출신이란 공통점이 있고 더러 여행지가 겹치기도 하지만, 국적도 시대도 다른 이들의 여행이다. 시간적으로는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공간적으로는 멘체스터에서 영국까지 굉장히 광범위하다. 하지만 재주 있는 작가는 재치 있는 문장과 많지 않은 분량으로, 13명을 네 가지 주제로 나눠 우리를 안내한다. 화가의 여행에선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이 책의 주 주제인 미술사적 측면에 있어서 화가의 여행은 후원의 역학관계, 미술 양식의 변화, 화가에 대한 배경 지식 등을 알 수 있고 미술사 연구에서 점점 관심이 높아지는 주제라 한다.

 

 

하지만 어떤 독자에겐 이 책이 탁월한 경제경영서로 보이기도 하고, 정치·사회학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예술가의 여행>은 독자의 관점과 관심분야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읽고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고, 그 다양한 면들을 모두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프루스트의 말을 인용한 이 책의 제사처럼 우리가 책 제목을 보고 주로 떠올릴 여행의 낭만이나 여행이 창조적 영감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은 오히려 가장 안 느껴진다. 한편 <예술가의 여행>은 저자가 서문을 완전한 서평 한 편처럼 썼다(다른 이들이 굳이 서평을 쓸 이유를 못 느낄 만큼). 그래서 목차대로 책의 기본 내용을 숙지하려거나 쇼핑 중이라면 다른 정보 찾지 말고 저자 서문을 꼼꼼히 읽어보길 추천한다.

 

 

화가의 여행은 서유럽 수공업자의 천명에서부터 출발한다. 장인과 도제로 상징되는 중세 서유럽의 길드 시스템에서 수공업자들에게 여행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고 공부였다. 대를 이어 장인이 되는 데 있어, 아버지께 전수 받고 거주 지역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만으론 부족했다. 타 지역의 새로운 기술을 배우면서 자신의 기술과 융합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화가도 넓은 의미로 보면 일종의 수공업자다. 자본(후원)이 결합하면서 화가의 여행은 도제수업·장인수업 차원을 넘어 규모와 목적이 확장된다. 16세기의 (알브레히트) 뒤러는 브랜드화를 알았다. 단순한 이니셜 모노그램에 불과했지만 작품마다 붙인 AD는 자기 작품의 상품가치를 높였다. 그리고 뒤러의 성공적인 마케팅엔 영리하고 수완 좋은 아내의 역할이 컸다.

 

 

예술과 외교 모두 성공적으로 수행한 화가도 있었다. 루벤스는 벨기에와 이탈리아·스페인·영국을 돌아다니면서 외교사절로서 충실하면서 귀족들에게 안정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도 할 수 있었다. 왕과 교황의 미묘한 신경전 사이에서 누구도 불쾌하지 않게 현명한 처신을 한 베르니니도 있다. 홀라르의 사례로 보듯 예술가의 외교활동은 정치적으로 왕과 귀족에 가깝게 접근하면서 훌륭한 예술자문이 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흔히 전쟁은 이동의 자유를 위협한다고만 생각하지만 기회가 되기도 한다. 루벤스나 벨리니, 홀라르의 여행은 전쟁 시기와 맞물려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 비판할 사례들도 있지만, 동방문화 탐방을 통해 이질적인 문화를 습득하면서 서유럽의 미술을 더욱 풍부하게 한 화가들도 있다. 술탄 사망 후 오스만과 벨리니 모두 체류의 증거를 없애려 했을 만큼 위험한 동거였지만, 술탄의 부름을 받고 그의 밑에서 일하며 오스만 문화와 미니아튀르 회화를 접한 벨리니는 독특한 화풍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살아 있는 고대를 체험하고 싶었던 들라크루아는 아프리카로 눈을 돌려 알제리와 모로코 여행을 통해 자신의 이상과 판타지를 한껏 탐구했다. 이국과 그 문화에 대한 화가들의 호기심은 에크하우스·메리안·호지스·고갱·놀데처럼 대륙을 뛰어넘어 남태평양이나 남미로 떠나는 것으로 발전한다.

 

 

<예술가의 여행>을 읽으면 읽을수록 인류 역사에 있어 화가의 기여에 놀라게 된다. 화가는 신분은 높지 않지만 직업적 특성 때문에 여러모로 특수한 계층이었다. 화가는 산업과 과학기술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사진이 없던 시절, 화가는 없어선 안 될 중요한 기록가였다. 그래서 각종 탐사에 참여 했고 식견이 상당했던 인물도 많다. 싱켈과 호지스는 유럽에 새로운 인종들의 모습을 그려 전했고, 메리안은 곤충 그림을 그리다가 당시 과학자들보다 곤충에 대해 훨씬 정확하게 알았다. 인류가 남극을 발견하는 순간에도 화가가 있었다(호지스). 누구도 생각지 못한 제안을 하면서 독일에 근대적 박물관이 생기는데 기여했던 싱켈은 영국의 공장 건물을 스케치하며 새 시대의 꿈을 꿨다.

 

 

여성 문제에 있어 미술이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진보적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16세기 뒤러의 아내 아그네스가 미술상으로서 능력을 발휘했다면 17세기의 메리안은 직접 화가 활동을 한다. 미술가 집안에선 원한다면 딸도 미술을 배우고 관련 일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 식민지 개척 시대 설탕이 아닌 곤충을 찾는다고 조롱받았고 그녀의 그림책은 여자들의 자수 취미 관련으로 소비되었지만, 메리안은 수리남으로 떠나 화폭 가득 자신이 좋아하는 곤충들의 면면들을 담았다. 18세기의 카우프만의 사정은 더 낫다. 이탈리아에서 볼로냐와 피렌체의 미술아카데미 회원을 거쳐 영국 왕립 미술아카데미 창립 멤버가 된다. 10살 이상 어렸던 난네를이 피아노 잘 치는 소녀로 그쳤던 것과 달리, 카우프만은 자신이 가능한 최선의 상업적 성공을 이루고 화가로서 입지를 세운다.

 

 

글로벌 시대를 사는 우리들보다 훨씬 이동이 힘들었던 옛날 사람들이 더욱 글로벌하게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니 자괴감이 확 치밀며 골이 난다. 0.5초 만에 역사에 남은 비범한 인물들의 얘기니까 그런다고 합리화해본다. 참고로 <예술가의 여행> 한국판엔 원서에 없는 것이 있다. 감수자인 카이스트 김소희 교수(미술사학 전공)가 각 부가 끝날 때마다 ‘김소희의 예술가 이야기’라는 추가 해설을 달아놓은 것이다. 짧은 글이지만 책에 실린 화가들을 좀 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책의 맨 뒤에 ‘더 읽어보면 좋은 책’을 적어놓았긴 한데, 전부 독일어 원서라(번역된 책이 하나도 없는 걸까) 많은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히사이시 조는 다양한 경험의 중요성에 대해 크게 환상을 품지 말라고 했다. 누구나 하는 경험은 인간의 폭을 넓혀주지 않는데, 남과 차별화되는 특별한 경험하기가 생각 이상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은 가장 쉽게 단시간에 경험의 양을 늘릴 수 있고 가장 쉽게 특별한 경험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평소의 일상과 공부를 통해 배우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사소한 여행 한번에서 얻을 수 있고, 여행을 많이 할수록 시야나 사유가 넓고 깊어진다. <예술가의 여행>은 여행이 얼마나 다양한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는 책이다. 또 결코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암묵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아는 만큼 보이는 책이다. ‘화가의’ 여행을 다룬 ‘미술’서적이지만 읽으면서 여행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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