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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강준만 편저 / 개마고원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강준만교수가 거의 매 달 마다 저작물을 쏟아내고, 그리고 책의 내용이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되다보니 사회적으로 강준만교수를 바라보는 스펙트럼이 다양한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도 강준만교수가 발행하는 잡지에 몇 차례 글을 기고하고, 그 중에서는 강준만교수의 글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글 또한 있었다. 비록 개인적으로 강준만교수를 좋아하고 그를 사숙(私淑)하면서 그에 대한 깊은 호감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지만, 김구라-황봉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잘못하는 부분과 관련해서는 아무리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비판을 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차에 이 곳, 알라딘 독자서평 글이 하나 있어 우연히 그 글을 접하게 되었는데, 강준만교수와 관련해 전반적으로 좋게 평가를 하지만 다소 부적절한 표현이 있어서 그 점을 일깨워드리고자 이렇게 키보드를 잡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라는 책과 관련해 아래와 같은 글을 어느 독자가 썼다.
[그가 마침 한국현대사에 대해 글을 쓰고 있어서였을까... 리영희라는 노장에 대해 젊은 세대에게 장황하고 이 사람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느냐는 식의 쉬운 소개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나보다.]
"이 사람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느냐는 식" 은 도대체 어떤 '식'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어제 고도원의 <<아름다움도 자란다>> 라는 책을 한 권 읽었는데 그 책에서는 매 페이지마다 저자가 지금까지 읽은 책의 제목이 적혀 있던데, 그럼 고도원도 자산이 책을 많이 읽고, 여러 좋은 글귀들을 많이 안다며 나만큼 책 많이 읽은 사람 있어하는 '식' 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냐고 내가 말한다면 그게 과연 정당한가? 아니, 이건 정당하냐 부당하냐의 문제는 아니다. 감정적으로 잘못된 사고를 하는 오류의 일종이라 보는 게 더 가까울 것이다. 강준만교수가 책을 낼 때마다 일부 독자들로부터 "이 사람에 대해 나만큼 알고 있느냐는 식" 이라는 말을 듣는다면, 강준만교수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방법은 말을 안 해도 쉽게 짐작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