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25일 한겨레

“폴 오스터 소설 ‘문화적 문맹’으로 오역”

 

국내에서도 인기가 높은 미국 작가 폴 오스터의 소설 <뉴욕 3부작> 번역본에 상당한 오역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런 지적은 폴 오스터 전공자인 유정완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가 영미문학연구회 기관지 <안과 밖> 제20호(2006년 상반기호)에 기고한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문화 해독력과 번역의 문제’에서 나왔다. 유 교수의 논문은 한기찬씨의 1996년 번역본 <뉴욕 삼부작>(웅진출판)과 황보석씨의 2003년 번역본 <뉴욕 3부작>(열린책들)을 펭귄출판사에서 1990년에 나온 <The New York Trilogy>와 대조하는 방식으로 작성됐다.

유 교수가 주안점을 두어 지적하는 내용은 글의 제4장 ‘문화적 문맹이 야기하는 오역의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우선 “They have minor leaguers at second and short,(…)they can’t even decide who to put in right.”라는 문장을 보자. 황보석씨는 이 문장을 “그 팀은 마이너리그에서도 2류가 될까 말까 한 선수들을 두고 있습디다.(…)게다가 누구를 어느 자리에 써야 할지도 모르고.”로 옮겼다. 한기찬씨도 “하위 리그에서도 2류가 될까 말까 하다구.(…)어느 놈이 쓸 만한지 모를 정도라구.”로 풀었다. 그러나 미국 프로야구 팀에 관해 얘기하는 이 문장에서 ‘second’ ‘short’ ‘right’는 각각 ‘2루수’ ‘유격수’ ‘우익수’가 맞다. (유격수는 영어로 shortstop)

루이스 캐롤의 동화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계란 ‘험프티 덤프티(Humpty Dumpty)’를 각각 각주 또는 괄호 안 설명을 통해 “동요에 나오는 커다란 계란 모양의 인물. 한번 넘어지면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 “동요에 나오는 인물; 달걀을 의인화하여, 담에서 떨어져 아무리 해도 일어날 수 없는 땅딸막한 인물의 이름”이라 설명한 것도 문제다. 유 교수가 보기에 험프티 덤프티는 “담에서 떨어져 깨지면 파편화되어서 다시 원상복구될 수 없는 존재로서 오스터적 문맥에서는 현대 인간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적 소외 상황을 암시한다.” 그런데도 “to put the egg back together”를 두 번역 모두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옮긴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Street’와 ‘Avenue’를 똑같이 ‘~번가’로 옮김으로써 가로길과 세로길을 구분해 주지 않은 것(공통), 화폐단위 ‘quarter’를 ‘5센트’로, 담배 단위 ‘carton’을 ‘상자(보루)’가 아닌 ‘갑’으로 한다거나(이상 황보석) 순환선 지하철 노선 ‘the Times Square Shuttle’을 ‘<타임스> 스퀘어 편’으로 처리해 신문 이름으로 바꿔 놓은 점(한기찬)도 지적됐다.

‘문화적 문맹’과는 상관없는 단순 오역들도 적지않다. “an elegant black suitcase”를 “코끼리 가죽으로 된 값비싼(가방)”으로, ‘contact’를 ‘계약’으로, “leave it to chance”(운에 맡기다)를 “그대로 놓아(두다)”로, “Still, he preferred to remain indoors, shunned bright light”(그럼에도 실내에 있기를 더 좋아했고 밝은 빛을 피했으며)를 “그럼에도 그는 불을 환히 밝힌 실내에 있기를 좋아했고”로(이상 황보석) 옮긴 것들이 그 예다.

유 교수는 특히 두 번역본이 “전혀 필연성 없는 우발적 사건들의 연속적 발생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도 유사하고 동일한 실수들”을 반복하고 있는 점을 들어 “시장기제에 전적으로 지배되는 우리네 출판문화”에 혐의를 돌리고 있다. 유 교수는 “특정한 번역을 비판하기보다는, 좋은 번역을 위해서는 원작의 사회·역사·문화적 배경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려 한 것”이라고 논문 집필 배경을 밝혔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루이스 캐럴 지음, 존 테니얼 그림, <거울나라의 앨리스>
'앨리스와 험프티 덤프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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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목요일 밤 11시55분~12시25분

<책 읽어주는 여자 밑줄 긋는 남자>

연출 : 김훈석, 고현미

진행 : 호란(클래지콰이 싱어)

 

  

'레몽 장'의 『책 읽어주는 여자 La Lectrice』와 '카롤린 봉그랑'의 귀여운 소설『밑줄 긋는 남자 Le Souligneur』두 소설의 제목을 딴 참 좋은 방송 EBS의 프로그램.

 

 § 2006년 3월 16일 첫방송

*앤 패디먼, 『서재 결혼시키기』(2001)
- 굉장히 재미있는 책이다. 당신이 책을 좋아하고 미혼이라면, 두 존재의 결합인 결혼에 '책꽂이들의 결합'이 추가된다는 새로운 사실을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단, 아쉬운 점은 우리에게 낯선 작가들의 이름들이 너무 많이 등장해서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 어서 한국판 '서재 결혼시키기' 같은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 2006년 3월 23일 2회

* 슈테판 볼만,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2006)
- 신문에서 광고보고 혹해서 서점에서 지나가다 스윽 봤는데, 약간 실망했다. 책의 내용이야 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스타일이 내 것이 아니었다. 책 읽는 여자들을 모티브로 삼은 미술작품들의 도판과 내용을 곁들인, 그림이 너무 많은 책이었다. 서점 가서 다시 한번 내용을 훑어봐야겠다. 살 생각은 들지 않는다.






§ 2006년 3월 30일 3회

*공선옥 외,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2006)


- ebs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소외'와 '차별'의 현장을 기록한 인권사진집. 2003년 출간된 <눈 밖에 나다>에 이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인권사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펴내는 두 번째 책이다. 도시의 뒷골목과 집회현장, 산간벽지 등을 찾은 14인의 사진작가, 소설가, 시인들이 차별에 관한 10가지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담아냈다."
- 나의 독서편식이 일순간에 드러나는 대목이 바로 이런 부분들이다. 많이 보고 듣고 배워야겠다.

* 곽상필 외, 『눈 밖에 나다』(2003)
 
- 역시 ebs 설명에 따르면
"국가인권위원회(위원장 김창국)가 기획하고, 출판사 휴머니스트에서 발간한 < 눈 밖에 나다>는 우리 사회 차별 받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집이다. 사진 작가의 손 끝에서 잡아낸 프레임의 강렬한 이미지를 빌려 우리 사회의 소수자와 차별의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 2006년 4월 6일 4회

* 헬렌 니어링,『소박한 밥상』(2001)
"'조화로운 삶'의 주인공 헬렌 니어링이 말년에 쓴 소박한 요리책이자, 탐식에 길들여진 우리를 일깨우는 진정한 먹을거리에 관한 깊은 성찰이 담긴 요리 철학 에세이. 평화주의자·사회주의자·농부·엄격한 채식인으로서 1백세까지 건강한 삶을 살다 간 저자의 채식·자연 건강법과 삶에 관한 탁월한 지혜들이 담겨 있다." by EBS

- 땡긴다!

 



§ 2006년 4월 13일 5회

*홍은택의『블루 아메리카를 찾아서』(2005)
-
한겨레 신문 책과 지성 섹션에 연재되던 여행기인데, 신문에서는 한번밖에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자전거로 미국 횡단하기, 생각만으론 멋진 일인데 실제로 하라 그러면 꽁무니를 슬슬 뺄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여행의 욕구가 스멀스멀하기는 하지만.

 






 § 2006년 4월 20일 6회 

 * 정호승의『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2006)
시집과 에세이집을 읽고 너무너무 좋아라 했던 정호승 시인, 편안해 보이는 생김새도 거기에 한몫했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멋지지 않은 허스키 보이스에 단번에 실망하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 2006년 4월 27일  7회

*프랑수아 를로르,『꾸뻬 씨의 행복 여행』(2004)
- 안읽어봤으니 ebs의 도움을 얻는 수밖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가 행복의 참된 의미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는 소설로, 작가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파리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였다. 늘 불안한 심리한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어떤 심리학적 설명보다 한 편의 이야기가 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얻은 경험과 생각들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이 책은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일본 등 12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각 나라마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물질적인 풍요에서 정신적인 만족이 행복의 일반적인 기준이 되어가는 시대에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은 현대인의 복잡한 심리의 핵심을 짚어내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 행복의 참된 의미. 찾았다 할지라도 그걸 참된 의미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 행복한 사람일껄~



§ 2006년 5월 4일 8회

* 『비틀즈 시집』(2004년)
노래가 곧 시 아닐까.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저마다 다른 모습의 추억으로 들어있을 비틀즈.
나는 '헤이 주드'랑 '페니레인'을 제일 좋아한다. 불행히도(?) 그에 얽히 애틋한 사연 같은 건 없지만..

 

 

 

§ 2006년 5월 11일 9회

* 박현욱,『아내가 결혼했다』(2006년)

제목이 너무 말도 안되는 것이어서인지, 처음에는 보고도 저게 무슨 뜻인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어디선가 주워들은 '당신을 사랑하지만 또 다른 남자도 사랑한다' 아내의 담담한 멘트가 모순적이게도 수긍이 간다. 배신이라고 딱히 못박을 수없는 저 이중감정.

사실 이 날 처음으로 이 프로그램을 봤는데 너무 원색적이고, 호란의 얼굴을 너무 클로즈업해서 조금 거부감이 났다.

§ 2006년 5월 11일 9회

*다수의 작가들,『뽀뽀 상자』(2003년) 
어린시절이란 우리들의 과거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한 세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해 준 단편집. '창가의 토토'를 읽었을 때도 그랬지만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놔두어도 잘 자라는 존재이고, 어른들의 과보호로 그 순수함에 생채기를 내서는 안된다는, 아니 그럴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단편에는 별표시.

 


-목차-
*뽀뽀 상자|파스칼 브뤼크네르
*선생님은 여자|알렉상드르 자르댕
*작은 낙원|낸시 휴스턴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막스 갈로
아르멜과 스틱스|미셸 데 카스티요
내 사랑 라이카|다니엘 피쿨리
벽의 저편|파스칼 로즈
*하느님이 어머니를 창조하시다|파울로 코엘료
기차를 기다리던 아이|장 도르메송
그날 밤 조에는 숨을 쉬지 않고...|얀 케펠렉
나무 속의 여신|크리스티앙 자크
파루슈|클로드 미슐레
*어느 이방인의 일생|단 프랑크
푸가 혹은 예술가의 어린시절|장 루오
*새로운 세계에서 태어난 어떤 젊은 생각|J.M.G. 르 클레지오
엘리아니이 노래|장 피에르 밀로바노프
60년대의 대지|마르크 랑브롱


§ 2006년 5월 18일 10회

*원저 안도현, 그림 최규석, 변기현,『만화 짜장면』(2003년)

『짜장면』은 생애 가장 찬란했던 한 시점에 대해 이야기한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있었던 열 일곱, 열 여덟의 방황과 반항, 그리고 열정까지...
익히 알듯이 안도현 선생의 순수한 감성이 묻어나는 원작 속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살아있다. 그의 문장에서 느껴지는 경쾌함은 지금까지 보여줬던 작업과 마찬가지로 많은 이들의 시적 상상력을 부추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질주하는 오토바이의 굉음으로, 자장면이 아닌 짜장면으로, 짜장면에 들어가면 짜장면 냄새로 변해버리는 양파로, 노란 꽁지머리로 형상화된다. 이러한 『짜장면』의 면면들이 만화 『짜장면』을 가능케 했다.  by E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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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2월 25일 한겨레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1895년 영화가 탄생하면서 곧 이어 나온 작품들 가운데 공상과학(SF) 영화가 눈에 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멜리에스의 <달세계 여행>(1902)이 그 대표적 작품인데, 사람들은 공상을 ‘실감나게’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영화에서 찾은 것이다. 그로부터 SF영화는 다양한 ‘현실들’을 제공하면서 철학적 사고를 자극하는 분야가 되었다.

1977년 처음 출시된 루카스의 <스타워즈>는 작가의 말대로 “여섯 개의 이야기로 된 한 편의 영화”로서 서구인들에게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SF 작품이다. 저명한 역사학자 매즐리시는 “<스타워즈>는 신화적 주제를 고전적으로 표현한 뛰어난 영화이며,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비교할 만한 20세기의 작품”이라고 했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는 “영원토록 살아남을 영화들은 사실 굉장히 단순해 보이는 영화들이다. 그런 영화들에는 심오한 사상이 담겨 있지만, 겉으로만 보기에는 관객들이 어렸을 때 좋아하던 옛날 얘기 같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스타워즈>가 담고 있는 심오한 사상은 무엇일까?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이 영화가 선과 악이 부딪치는 선명한 이미지 속에서 “인간의 행동을 통해 성취되거나, 부서지거나, 억압되는 생명의 힘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스타워즈>의 키워드 ‘포스(Force)’가 의미하는 것 또한 그런 ‘힘’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철학자 마크 롤랜즈 역시, 각기 실재적이고 독자적인 원리로서 대립하는 선과 악을 이 작품의 주제로 본다.

하지만 이 정도로 사상의 심오함에 이를 수는 없다. 우리는 선과 악이 미묘하게 교섭하는 지점들을 잘 보아야 한다. 이 영화의 선악 개념은 악에 우선하는 선의 위상도 아니고, 동등한 자격으로 대립하는 선과 악의 관계도 아니다. <스타워즈>는, 주인공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에피소드 1, 2,3) 그리고 루크가 아버지 베이더와 대적하는 과정을 통해서(에피소드 4, 5, 6), 선과 악은 ‘형평적 상반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악과 선의 투쟁에서 악은 선에 대해 항상 유리한 위치를 점한다. 악은 자신의 본질에 충실하면 그만이지만(즉 일관되게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지만), 선은 악에 대해서도 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둠과 밝음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둠은 자기 자신 안으로 침잠할수록 더욱 어두워질 수 있지만, 밝음은 어둠조차도 밝혀야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다. 즉 자기 존재 이유를 충족시킬 수 있다.

악과 선이 형평적 상반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은 그들이 서로 맞설 때 악은 어드벤티지를 갖고 선은 핸디캡을 감수하는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에게는 싸운다는 것조차 악한 것이며, 설사 악을 굴복시키고 승리하더라도 타자의 굴복과 승리라는 성취조차 선의 본질은 아니다. 그렇다면 선은 악에게 항상 패할 것인가? 선은 어떻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가?

선과 악의 비균형적 상반 관계의 비밀은 존재의 고통, 그 심연에 눈을 돌려야 알 수 있다. 선의 존재 의미는 ‘비극적 서사’로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선은 악에게 희생물을 담보로 잡혀야만, 악해지지 않으면서도 악의 공세를 견뎌 낼 수 있고 악이 물러서게 할 수 있다.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제다이의 오랜 전설에 의해 ‘포스’의 균형을 맞추어줄 인물로 예언된 바 있다. 하지만 악에 유혹된 그는 암흑의 황제에게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아들 루크를 구하기 위해 황제의 공격을 물리치고 자신은 죽음으로써 결국 죄과를 치른다.

아나킨은 제다이 기사단의 영웅으로 태어났으나 시스 제국의 봉사자 베이더로서의 삶을 살다가, 젊은 제다이인 자신의 아들을 구하고 영웅적 삶을 마감한 것이다. 아나킨-베이더의 희생은 선의 세계가 악의 공격을 막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잡혔던 불가피한 담보였던 것이다(다스 베이더의 철가면 뒤로 들리는 저 음산한 숨소리는 담보 잡힌 존재의 고통을 담고 있다). 그럼으로써 영웅의 비극은 마침내 선에 봉사하는 것이다. 영웅의 희생이 비극적 서사로 이행되어 그 완결을 볼 때, 우리는 악에 대해 항상 불리한 선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될 가능성과 그 존재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김용석/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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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20일 한겨레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미하엘 엔데의 <모모>

 

 

 

 

미하엘 엔데의 <모모>(1970년)를 읽은 독자라면 누구든 이 동화가 시간 이야기라고 할 것이다. ‘시간 도둑들과 도둑맞은 시간을 찾아 주는 한 소녀에 대한 신기한 이야기’라는 긴 부제 또한 시간의 주제를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매우 기발한 캐릭터인 세쿤두스 미누투스 호라 박사의 이름은 라틴어로 시간의 단위 초·분·시를 의미한다. 호라 박사와 함께 사는 신비한 거북 카시오페이아 역시 속도와 시간의 의미를 암시한다. ‘시간의 꽃’을 들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달려가는 모모의 모습에서 시간 이야기는 그 절정에 이른다. 그 외의 등장인물들 역시 느긋한 시간의 삶을 살다가 회색 도당들에게 시간을 저당 잡힌 뒤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사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모모>는 우리에게 시간의 이야기만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시간을 이야기하면서 무엇보다도 공간의 의미를 전하기 때문이다. 이는 우선 작품 속 다양한 장면 묘사에서 관찰할 수 있다. 엔데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원형극장과 그 주변을 세세히 그리고 의미 있게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쓴다. 즉 공간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시간을 늘려 이야기하는 것이다. 모모가 카시오페이아의 인도를 받아 호라 박사를 찾아갈 때도 공간의 교묘한 배치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을 묘사한다.

호라 박사는 모모에게 “카시오페이아는 시간의 밖에” 있다고 말한다. 미래를 내다보는 이 오묘한 거북은 시간의 밖에 있음으로써(즉 시간을 무시함으로써) 가장 공간적이다. 그는 한없이 느린 동작으로 공간의 저 미세한 구석까지도 음미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시간을 우아하게 무시하는 그의 동작은 공간을 만끽하는 방법이다.

시간과 공간의 역설적 관계에 대한 뛰어난 은유는 그 어느 것보다도 모모의 절친한 친구 베포 할아버지의 ‘비질하기’에 있다. 청소부 베포는 “한 걸음, 한 번 숨쉬고, 한 번 비질... 그러다가 가끔 멈춰 서서 생각에 잠겨 앞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뒤쪽에 깨끗한 거리를 두고, 앞에는 지저분한 거리를 두고 그렇게 청소를 하다 보면 종종 위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베포는 공간을 관조하면서 비질을 함으로써 찬란한 삶의 의미들을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색 신사에게 시간을 담보 잡힌 뒤로는 시간에 쫓겨 한 치 앞에 놓인 공간에도 눈길 한 번 주지 못한 채 서둘러 비질을 계속하는 일상을 보내야 한다.

<모모>는 시간 도둑들에 속아 시간에 쫓기고 시간을 불필요하게 아낌으로써, 공간의 의미와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모모가 호라 박사에게서 받은 ‘시간의 꽃’으로 회색 도당들의 시간 창고를 파괴함으로써 시간은 되돌아오고 정지되었던 공간은 다시 살아난다. 모모가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마을 사람들이 진정으로 되찾은 건, 시간이 아니라 공간인 것이다. 삶의 의미로 충만한 공간 말이다.

<모모>의 또 다른 비밀은, 모모라는 이름조차 공간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남부 출신인 엔데는 삼십대 중반 이후 로마 근교에 이주해서 살았다. 여기서 모모의 이야기를 구상했다. 로마는 라틴어의 발생 지역이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모(mo)’는 이탈리아어로 ‘지금’이라는 뜻이다. 특히 로마 지역 사람들이 회화에서 자주 쓰는 ‘모’라는 말은 ‘흐르는 시간에서 떼어낸 현재’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모모(momo)’는 지금이라는 의미의 강조적 반복이 된다.

이야기 속에서 모모는 매우 충실하게 현재를 산다. 옛 원형극장 터에서 동네 사람들이 전하는 현재의 삶에 관한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주는 게 모모의 미덕이지 않았던가. 모모는 아낌없이 현재를 살기 때문에, 과거의 어느 때인가 태어나서 미래의 언제인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그의 말처럼 “언제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그의 이름처럼,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모모의 현재성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시간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놓치는 것이지만, ‘현재’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 개념이다. 현재에 대한 인식은 삶을 시간 밖으로 끌어내 ‘의미의 공간’에 안착시키는 기제이기 때문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Salvador Dali

          (1904-1989)

 


The Persistance of Memory(1931)
기억의 영속성

- 시계는 딱딱할지 모르나, 상대성 원리에 따르면 시간은 유연하다고 한다.
 시간은 속도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이 작품은 상대성 원리가 발견한 시간의 유연성의 은유라 한다.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2, 2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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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3월 27일 한겨레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세네카의 <행복한 삶에 관하여>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로마 제국 초기의 사상가이다. 그는 소년 네로의 개인 교수였고 네로 황제가 선정을 베풀던 통치 초기에 정치적 조언자였으나, 네로가 폭군으로 변해가면서 그로부터 멀어졌고 결국 황제의 명에 의해 자살로 생애를 마감했다.

세네카는 로마 제국 시대의 사상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주로 받았지만, 그에 머물지 않고 고대 그리스 사상의 다양한 갈래들을 종합하여 나름의 철학을 이루어냈다. 그가 공인으로서 경력의 정점에 있었던 58년에 쓴 <행복한 삶에 관하여>에도 이런 사상적 특성이 담겨 있다.

세네카의 행복론에는 물론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행복으로 가는 길’에 대한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일의 소중함을 역설하고,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미덕을 앞장세우고 쾌락은 쫓아오게 하라”고 가르친다. 세네카는 순간의 쾌락이 주는 행복감이 아니라, 삶의 지속적인 행복과 그에 따라오는 보람과 기쁨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은 책의 제15장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래서 세네카 사상의 연구가들은 그가 15장에서 글을 맺었어야 한다고 비평하기도 한다. 총 28장이 전해오는 이 작품의 17장부터(16장은 15장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마지막 장까지는 현실에서 세네카의 삶을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한 ‘변명’인데, 그것이 궁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그의 말과 행동이 다른지, 절제의 미덕을 가르치는 그가 어떻게 해외에까지 많은 재산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는지, 그의 일상적 삶은 왜 그리도 호사스러운지 등의 비난에 대해서 다양한 이유를 들어서 변론하고 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서 보면 이 책을 흥미롭게 읽는 열쇠는 오히려 17장 이후의 부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네카는, 세상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따르는 것이 그래도 불완전한 인간이 자유를 얻는 길이며 이에 궁극적으로 행복이 따라온다고 가르친다. “우주의 법칙에 따라 참아야 하는 것은 의연하게 참아야” 하며, “인간의 힘으로는 회피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당황하지 않고” 초연함으로써 자유로운 것이며 이에 행복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네카는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따름으로써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 모르지만, 타인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헐뜯고, 그가 모은 재산의 정당성에 대해 의혹을 품으며,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을 때, 그는 고뇌했던 것이다.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안타까울 정도로 반복되는 긴 글 속에서 자기 변명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세네카의 이런 태도는 우리에게 두 가지 생각거리를 제시한다. 우선 세네카는 ‘합리적 변명’을 하고 있지만(그것이 나름의 체계 안에서는 논리 정연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그 변명이 자신이 설파한 “세상의 이치에 따라서 살아야 하고, 의연하게 참아야 한다”는 원칙에 모순된다는 것이다(그는 탁월한 ‘행복론’에 부록처럼 덧붙여 놓은 궁색한 변명들로 명작을 손상할 게 아니라, 의연하게 참았어야 했으리라).

이 보다 더 중요한 생각거리는, 궁극적으로 행복은 인간 관계의 차원에서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내가 세상의 깊은 도리를 깨닫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행복해졌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을 때, 결국 나 자신도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전범으로 삼아 행복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고뇌의 한숨이 따르고 불행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이유는, 그가 자신의 가르침처럼 그렇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수많은 타인들의 불행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전을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고전이 전하는 교훈과 명언을 곰곰이 새기며 읽을 수도 있고, 고전의 모순과 결함을 짚어가며 읽을 수도 있다. 이는 남을 가르치려는 의도로 쓰여진 사상 고전일 경우 더욱 유용한 독서 방법이다. 흔히 고전은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한다. 샘을 마르지 않게 하는 것은, 고전 그 자체가 아니다. 새로이 고전을 읽는 세대마다 물을 긷는 방식과 두레박의 크기인 것이다. 그때마다 길어 올리는 샘물의 질과 양 또한 달라지기 때문이다.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수용미학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2)

텍스트는 '불확정성'을 갖고 있다. 이것이 오히려 독자에게 텍스트의 내용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할 자유를 준다. 말하자면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구체화하느냐가 독자에게 맡겨지는 셈이다. 독자는 책을 읽는 가운데 텍스트의 내용을 다시 한번 '미적'으로 구체화하게 된다. 독서 행위는 단지 텍스트의 내용만 파악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독서는 동시에 미적인 행위이다. 문학작품을 구체화하는 건 '의미의 구성'이자 '미적 구체화'다. 문학 텍스트를 미적으로 구체화할 때, 텍스트이 '효과구조'와 독자의 '반응구조'는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문학작품의 본질은 텍스트 속에 감추어진 의미가 아니라, 바로 이 두 가지 구조가 발휘하는 힘에 있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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