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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그림자 1 ㅣ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기억한다, 추억한다라는 단어가 발산하는 의미들을 흠뻑 느끼게 되는 책이다. 그다지 많은 세월을 살지는 않았지만 한 해 두 해 갈수록 달라지는 건 점점 더 추억, 과거, 기억 이런 단어들에 매달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2권 옮긴이의 말까지를 몽롱하지만 나는 듯한 속도로 읽고 난 뒤, 무심결에 떠오르는 과거의 한 장면이 있었다. 그렇게 특별히 기억될만큼 특이한 사건이 있었던 건 아닌데, 아무래도 '변화'라는 것이 가장 많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던가보다. 불과 5년전만 해도 새롭고, 매일 같이 얼굴을 보고, 함께 몰려다니고 했던 그 사람들이 지금은 어떤 관계들은 미묘해지고 또 어떤 관계들은 완전히 단절되어 서로를 잊은 채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저 추억으로만 웃을 수 있는 서글픈 관계들이다. 또 모를 일이다. 그렇게 단절되고 잊혀졌던 과거 속 관계들이 나도 모르게 '운명의 상처로 남은 우연으로 인해' 건들여지고 되살아날지.
이 책을 고른 건 순전히 이것이 '책'에 관한 이야기라는 어떤 광고문구를 읽었기 때문이다. '책의 역사' 따위를 기대했던 건 결코 아니었지만 이렇게 엄청난 운명의 엇갈림들이 펼쳐질 줄도 전혀 기대하지 못했다. 책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쓴 사람과 그것을 읽은(을) 사람을 전제할 것이다. 정말 세상 어딘가에 '잊혀진 책들의 묘지' 같은 어마어마한 책 저장고가 있다면, 어떤 이야기가 일단 책으로 태어난 이상 그것을 만들어 낸 사람 조차도 그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책 속의 수많은 활자들은 분명 그것을 쓴 이와는 다른 사람에 의해 '읽혀짐'을 기다리며, 할 수만 있다면 홀로 날개를 펼쳐서라도 누군가의 책상 위에 놓여지기를 고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게되는 것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일이 아닐 거란 확신이 든다. 마치 어떤 운명적 만남을 마주하는 것처럼 인연이 생성되는 것과 비슷한 과정에 의해 그렇게 될 거란 생각이다. 다니엘이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서 『바람의 그림자』를 집어낸 순간, 멈춰있던 톱니바퀴가 서로 맞부딪히며 움직이기 시작했듯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바르셀로나는 애석하게도 소설 속 바르셀로나와는 정반대로 '빛'으로 가득한 도시였다. 관광객들을 위한 각종 이벤트로 가득한 람블라스 거리와 보는 것 만으로도 속이 달콤해지는 과일 시장, 가우디의 성가족 성당과 구엘 공원, 몇 쌍의 연인들이 서로의 허리를 두르고 있던 좁다랗고 그나마 쓸쓸한 해변. 덧붙여 바르셀로나 근교의 장엄한 몬세랏 수도원의 소년 합장단이 불러내는 성스러움까지. 스페인이란 나라가 여행객들에겐 그리 친절치 못한 도시여서 밤거리를 돌아다녀보지 못해서였을까. 내 기억들과 이 책의 묘사를 아무리 대조시켜 보아도 결코 '바다 안개의 천사'를 그려볼 수 있는 이미지를 찾을 수 없었다.
참 이상한 게 『해변의 카프카』를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책을 읽고나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 말을 글로 풀어내는 데는 너무 힘들었었다. 『바람의 그림자』를 읽고서는 스물 몇 년 내 삶이 한 번 들었다 놓아지는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주책스러울만치 손놀림이 빨라진다. 그냥 한바탕 엉엉 울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음에도 별 다섯 개에 하나 더 보태주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