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
토머스 해리스 지음, 공보경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 특허청에서 보낸 편지였다.
"내가 발명한 십자가상 시계에 관한 거야. 특허를 내줄 수는 없지만 시계 문자판에 대한 저작권 등록을 알아보라고 조언을 해왔더군. 보여줄게."
그리고 냅킨만 한 크기의 종이에 그린 그림을 음식 반입구 트레이에 담았다. 스탈링이 트레이를 당겼다. 
"보통 십자가상에서 두 손은 2시 45분이나 1시 50분을 가리키거든. 발은 6시 방향에 있고. 인기 좋은 디즈니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이 시계의 문자판에서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두 팔이 시침과 분침이 되는 거야. 발은 6시 방향에 고정돼 있어. 그리고 위쪽에는 작은 초침이 후광처럼 돌아가지. 어떻게 생각해?"
해부학적 스케치의 품질은 꽤 좋은 편이었다. 예수의 얼굴은 바로 스탈링의 얼굴이었다.(284쪽)


영화에는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좀 상상을 해봤는데, 이내 얼굴이 찡그려졌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냥 디즈니 시계의 시침과 분침처럼 혐오감이 들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세상에 정말 이런 시계가 있을까? 있다면 사는 사람도 있을까? 이런 소리 하면 제정신이 아니구나 할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영화와 책 속의 인물이니까 그래도 한니발 렉터에게 일말의 동정이란 게 있었는데 저 부분을 읽고 나선 묘하게 몸서리가 났다. 신성한 것을 모독하고 고통을 즐기며 잔혹하고 인간의 상상을 넘어선 캐릭터라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음에도, 저 묘사는 이상하게 내 안의 금기를 건드린 듯 혐오감이 일고 싫었다. 


워낙 영화가 유명하고, 또 책을 읽기 전에 최근 영화를 다시 본 터라 책을 읽으면서 영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는 원전의 플롯을 짜깁기하고 빼서 스토리를 만들었는데, 정말 멋진 편집이다. 원전에서 이 사람과 관계된 것을 저 사람에게 부여하고, 이 사건을 저 사건과 연결시킨 부분들이 굉장히 매끄럽고 또 영화적이다. 영화에서 생략한 부분들은 미드 <한니발>에서 요소요소 잘 살리고 있는데, 원전 <양들의 침묵>이 잉태하고 거기서 파생된 버전들은 원전이 탄탄하기에 더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는 클라리스 스탈링의 감정선을 더 세밀하고 천천히 따라갈 수 있어서 좋았다. 아무래도 영화는 한니발이 몇 번 등장하지 않아도 워낙 강렬하고 스펙터클한 신이 많아서 클라리스보다는 한니발이 부각되는 느낌이 있었는데(나만 그럴지도...), 책에서는 영화가 생략하거나 암시한 스탈링의 생각들을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에서 비롯된 삶의 균열을 악착같이 딛고 일어서 강인하게 버티고 있지만, 한편 어머니와 동생들과 떨어져 가게 된 친척집 목장에서 구하지 못한 양들의 울음소리는 생명에 대한 부채감으로 스탈링을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형편이 어려워진 엄마는 맏이인 클라리스를 친척집에 보내는데, 그녀가 가게 된 목장은 나이든 말과 양을 도살하는 도살장이었다. 어느 날 양의 비명과 같은 울음소리에 잠이 깬 클라리스는 현장을 목격했고, 어린 그녀가 안고 도망치기에는 너무 버거웠던 양 대신 눈이 거의 멀다시피 한 '한나'라는 말을 끌고 도망친다. 


연약한 생명에 대한 연민과 그들의 고통에 괴로워하는 클라리스. 한편 무례함에 대한 혐오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예술적 완벽성에만 반응하는 한니발. 클라리스와 한니발은 선과 악의 대척점에 있지만 두 사람은 묘하게 공감하고 이해하며 서로의 생각을 읽는다. 클라리스는 생물학적 아버지를 잃었으나 한니발은 그녀의 정서적 공백과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한다. 기묘하고 아름답지 않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또 한 명의 아버지 역할을 하는 인물 잭 크로포드는 말하자면 다정하지 않은 아버지다. 아직 연수원 학생 신분인 클라리스와는 계급 차이가 한참 나는 상관이긴 하지만 소통이 일방적이고, 뭔가 챙겨주는 듯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는 부재한다. 어쨌거나 클라리스의 재능을 알아본 건 그였고, 클라리스의 성장을 위해서는 이런 방임형 아버지가 필요하긴 했지만. 그런 크로포드 옆에 죽어가는 아내를 둔 건, 이 인물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한니발과 잭 크로포드(그리고 스미스소니언의 필처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 외에 클라리스 주변에 있는 남성들은 모두 클라리스에게 적대적이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피해자로, 주변인으로,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낯설과 이질적인 것으로 본다. 그 대표적 인물이 칠턴인데, 솔직히 한니발보다 더 밥맛없고 역겨운 인물이다. 이런 상황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는 클라리스의 모습은, 오를 수 없는 우물에 갇힌 캐서린과 다를 바 없다. 클라리스가 제임 검의 집 지하실에서 흑단 같은 어둠 속을 헤맬 때, 속수무책으로 어둠 속의 허공을 헛되이 휘저을 때 그 무력감은 극에 달했다. 도움의 손길 하나 없는 극단적 고립 속에서 그녀가 범인을 검거하고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들을 뒤로 한 채 승리할 때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환호보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안도감이 먼저였다. 


"스탈링의 상처가 서서히 치유되고 있었다." (629쪽)


한니발이 책 마지막에 쓴 편지에서처럼, 클라리스가 "보게 될 지하감옥은 이게 마지막이 아니"고, 클라리스가 "사건을 해결할 때마다 양들은 한동안 침묵"할 것이다. 


"양들의 울음소리는 당신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고, 그 울음소리는 아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거야."(637쪽)


이건 클라리스의 숙명이고, 굴레다. 어쨌든 '한동안'이나마 양들은 침묵할 것이고 그동안 그녀는 곤히 잠들 수 있을 것이다. 

내용을 다 알고 본 책이었는데도 긴장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미드 <한니발>에서는 판권 문제로 클라리스 스탈링을 등장시키지 못했고, 나무의 철학 출판사에서는 <레드 드래곤>이 빠진 시리즈를 내놨다. 아마 이것도 판권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판권 때문이라면 문제가 잘 해결돼서 꼭 이 시리즈로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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