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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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 메탈 밴드 예레미를 좋아하는데 그들 노래 중에서 <남겨진 나날들>을 가장 좋아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인간 예수의 심정에 대한 노래다. 가사 일부분은 이렇다. "내가 움켜쥐고 갈구할 나의 단 한 번의 새벽아" "난 내가 삶에 배고프리라 미처 생각지 못했지"

어떤 종교라도 거대화되며 발생하는 비종교적 문제(비윤리적 행태, 자본화)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에 더하여 한국화된 기독교의 문제는 조금 독특한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불신자인 나에겐 한국 기독교가 예수와 하늘 나라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비기독교인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삶의 궤적과 상관없이 신성을 좇으면 천국에 간다는 이 단순한 배타성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일으킨다. 저자는 단순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예수는 어떤 종교도 창시하지 않았다." 기실 기독교의 탄생은 예수 사후의 일인데 그것이 그저 신의 아들 예수에 대한 인민의 존경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 예수가 보여준 헌신적인 삶에 대한 인민의 존경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예수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메시지를 봤다면 뭐라고 생각했을까.

저자는 예수의 행적이 담긴 네 개의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이고 종교적 첨가도 적은 마르코복음으로 예수의 삶을 되짚어본다. 이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게 아니라 "한 평범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가. 흔히 성서에선 예수가 반말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에게까지 반말을 한다. 그러나 당시 예수가 사용했을 아람어엔 존댓말이나 반말이 없다. 이런 왜곡이야말로 "교회가 인간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 버렸"다는 증거다. 저자는 "인간 예수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도 기독교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14)"고 말한다.

한편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말은 흔히 생각하는 무조건적인 용서의 메시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른뺨을 맞았다는 건 오른 손등으로 뺨을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하찮은 사람에게 하는 모욕이었다. 왼뺨도 갖다 대라는 말은 "나는 너와 다름 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때려라"라는 조용한 외침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인간의 존엄이 짓밟힐 땐 단호한 저항과 불복종을 하라고 말했다.

저자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남성 현인이 여성 제자와 함께 활동한 경우는 예수가 거의 유일하다"고 말한다. 마리아 막달라는 남성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를 배신하지도 않았으며 예수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 심지어 성서 어디에도 그가 창녀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예수의 제자로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막달라 마리아는 왜 창녀로 왜곡됐을까. 저자는 초기 기독교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남성 제자들에게 막달라 마리아가 부담스러운 존재였으며, 기독교가 가부장적 종교로 커 가는 과정에서 여성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된 것이다. 저자는 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우리와 동세대의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예수 당시 사람들의 시간에 머문다."

예수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아빠"를 부르며 벌벌 떨었다. 번민하고 제자들에게 역정을 냈다. 그러나 예수는 작은 인간으로서 공포와 번민을 그대로 느끼며 결국 그것을 이겨냈다. 신의 아들 예수가 아닌 인간 예수의 삶이 더 큰 감동을 준다.

꼭 예수가 신의 아들이어야 그를 믿고 섬길 당위성이 생길까? 예수 믿지 않으면 정말 지옥 갈까? 고등학교 때 읽은 밥퍼 목사 최일도의 에세이가 떠오른다. 최일도 목사는 집회 중 사람들이 방언을 열심히 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고 자신은 방언을 할 줄 모르므로 평범한 기도를 계속했더란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님이 그에게 왜 목사님은 방언을 안 하느냐고 물어오길래 다음날 헬라어 주기도문(ㅎㅎ)을 외워서 열심히 읊었더니 그 아주머님이 이건 성령이 임한 거라고 감동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최일도 목사는 여전히 방언을 할 줄 모른다. 다만 여전히 밥을 퍼주는 것으로 인간 예수의 삶을 현세에서 실천한다. 예수를 믿는 것보다 예수 삶을 좇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불신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연말은 춥다. 스스로 구세군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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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사랑들 밀란 쿤데라 전집 2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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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했다.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적어도 밀란 쿤데라 소설 세계에서는 조금 다르다.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집은 쿤데라가 60년대에 쓴 7개 단편을 묶은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왠지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진지함으로 대표되는 듯한데 실은 그렇지 않다. 잘 뜯어서 읽어보면 진지한 표정을 한 채로 웃기는 게 그의 소설이다. 나는 초기작 <농담>부터 최근작 <무의미의 축제>까지 모두 해학이 그의 작품 기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초기 단편집을 보니 그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아마도 연인이 "배신 없는 사랑과 순수성의 울타리(130)"속에만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것일지 모른다.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돌아보면 "이거 전부 그저 농담(39)"인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느냐고.

 

읽다 보면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폭소를 여러 번 터뜨리게 되는데 그 웃음 뒤엔 뜨끔함이 남았던 것도 사실이다. 홍상수 영화의 찌질한 남자 주인공 보고 낄낄대지만 사실 그게 공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사랑이 모두 우스운 건 아니지만 분명 어떤 사랑은 우스웠던 것이 맞다. 말 못할 찌질한 이유로 헤어져놓고 이건 비극인 양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그 여자애 보라고 미니홈피에 읽지도 못하는 일본어 가사를 붙여 넣은 적이 있었다. 으악... 이불을 차야겠다. 채연은 이제 그만 놀리자 흑흑. 그 시절엔 다들 우스운 사랑을 하는 우스운 사람이었다. 나만 그랬다고? 자살하러 간다...

 

원초적 웃음 사이로 날아드는 일침에 자유롭지 않았다. 이제 내게 필립 로스는 인생의 경전이고 밀란 쿤데라는 사랑의 경전과도 같다. 특히 "우리가 사랑의 쾌락에 달려드는 것은 추억 때문(293)"이라는 말을 보니 여전히 앞으로도 우습게 사랑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ㅎㅎ. 그러나 쿤데라가 말하는 사랑의 논리에 이대로 굴복하기는 왠지 억울하다. "사랑은 바로 비논리적인 거(155)"라는 쿤데라 할배의 말엔 애초에 '사람'이 비논리적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느냐고 항변하고 싶기도 하다.

바로 그래서 에드바르트는 신에 대한 열망을 느끼는 것이니, 왜냐하면 오로지 신만이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나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족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로지 신만이 (유일하며, 존재하지 않는 그만이) 비본질적인 만큼 더욱이 더 존재하는 이 세계의 본질적인 안티테제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3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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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3부작 열린책들 세계문학 38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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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나의 거울이다, 혹은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라는 문장을 많이 봤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비슷한 책 제목도 있다. 그러나 누가 먼저 말했어도 상관없다. 내가 감각하는 타인이 온전한 타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살며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간다. 시간이 지나 주위에 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 스펙트럼이 반영된 결과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타인이 된다. 한편,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내게로 향하는 타인의 감정이 온전한 타인의 감정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것의 본질이 내가 상대방에게 투사한 감정이라면. 그때 타인은 진정으로 거울에 맺힌 나의 상像일 것이다.

『뉴욕 3부작』은 세 편의 이야기다. 세 편 모두 언뜻 비슷한 느낌인데, 타인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주체의 자아가 붕괴되는 과정이다. 「유리의 도시」에선 잘못 걸려온 전화로 탐정을 맡게 된 대니얼 퀸이 피터 스필먼을 관찰하고 감시하고 「유령들」에선 탐정 블루가 정체불명의 화이트의 의뢰로 블랙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한다. 「잠겨 있는 방」은 약간 결이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작가가 행방불명된 (그러나 살아있는) 친구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친구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질문이 남는다. 타인의 삶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그들은 왜 붕괴하는가.

세 편 모두에서 주인공은 타인의 삶에 대한 글을 쓴다. 과연 타인의 삶에 대한 글은 관찰과 증언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소설 내에선 불가능해 보인다. 「유령들」의 탐정 블루는 '수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들에서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관찰의 한계를 느낀 탐정들은 관찰 대상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들은 타인을 깊이 들여다볼 때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경험을 한다. 자아 정체성의 역전을 겪은 그들은 혼란스럽다.

이야기의 의도는 마지막 편에 이르러서 드러난다. 앞선 두 탐정 이야기는 마지막 이야기 「잠겨있는 방」의 화자가 자신의 경험을 변주하여 창조한 것이다. 「잠겨있는 방」의 화자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친구였던 팬쇼에게 경외심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행방불명된 (그러나 살아있는 게 분명한) 팬쇼의 전기를 작성하다 그의 아내와 가까워지고 결혼하게 된다. 팬쇼의 어머니와 만나선 정사한다. 몹시 위험한 이 행위는 팬쇼와 자신의 동일시를 전제로 이루어진다. 이 동일시를 통해 그들의 정사는 상징적인 근친상간이 된다. 화자만큼이나 팬쇼를 증오하던 팬쇼의 어머니도 이 자아의 동일시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팬쇼에게 끔찍한 복수를 하는 공모자가 된다. 팬쇼의 전유물들을 침범하고 그의 삶을 추적하는 동안 화자의 자의식은 몹시 흔들린다. 그의 삶은 사라진 팬쇼에게 잠식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걸 깨달은 그에겐 단 하나의 선택만 남는다. 팬쇼를 만나서 죽여야 한다. 이미 침식당한 자아를 지키기 위해선 팬쇼가 정말로 죽어서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면서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그들 모두 타인을 깊이 알려고 할수록 자신의 내면만 깊게 확인하게 된다. 타인은 결코 온전한 타인이 아니고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이 투사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을 망각한 '유령들'이고, 관찰하는 동시에 관찰당하는 공간인 뉴욕은 투명한 '유리의 도시'이고, 힘겹게 타인의 자아에 도달했을 때 그곳은 자신의 내면 속 '닫혀있는 방'이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이 절절하게 다가온다면 그건 타인에게 내 욕망을 투사하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미숙한 방어기제는 삶에서 숱하게 저질러지고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자아를 지키며 살기란 어렵다. '그들은 왜 붕괴하는가'라는 질문의 주어는 언제든지 '나'로 바뀔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그래서 쉽지 않다.

마지막 이야기 속 화자의 혼란스러운 경험을 모두 읽으면 앞의 두 이야기는 또 다른 생명력을 갖는다. 자아의 병리적 현상이 이야기로 어떻게 재창조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물과 장치의 변주, 메타포, 메타픽션의 활용 등등. 그러나 가장 압도적이었던 마지막 이야기조차 진실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된 이야기일 뿐임을 떠올린다면 폴 오스터라는 작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듣기 원하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말속에 진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이야기 속의 인물로 대체시킨다. 마치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기만이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때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알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삶이 계속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 점점 더 불확실해져서 우리 자신의 모순을 점점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된다. 누구도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바로 그 간단한 이유로. 3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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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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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책임이 있는 곤란한 사건에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할까. 쉽게 생각하면 인정 또는 부정의 방법으로 나눌 수 있겠다. 전자는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며 마무리 짓지만, 사실 그 자신에게 문제 상황의 해결은 아니다. 곤란함을 그대로 껴안게 되므로 일종의 체념이나 포기에 가깝다. 그러나 적어도 비겁함은 남지 않는다. 후자는 곤란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그야말로 문제 상황의 해결이지만 윤리의 문제는 남는다. 자신이 외면한 곤란함은 타인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비겁하다. 더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좋은 방법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지원은 16살 딸의 출산에 절망하지만 한 줄기 희망 같은 말을 듣는다. 24주 미숙아는 동맥관 개존증을 가지고 있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지원은 딸의 아이의 수술을 자꾸 미룬다. 지원은 문제에 직면하여 인정도 부정도 아닌 방법을 택했다. 못 이기는 척 상황을 종결하는 방법이다. 문제 상황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겉보기에는 윤리의 문제도 남지 않는다. 어쩔 수 없었어. 그러나 이 방법을 선택할 때 우리는 가장 비겁해진다.

이런 속된 삶의 방식은 소설 곳곳에서 보인다. <우리 안의 천사>의 화자는 동거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것을 마음먹었다가 그의 돈가방을 본다. 처음 본 배다른 형이 준 것이다. 남자친구는 배다른 형에게 간접 살인 제안을 받는다. 자신은 알리바이를 위해 일본 학회에 가 있을 동안 친부의 인슐린을 바꿔치기 해달라고. 그렇게 빠른 상속을 받으면 그것을 나누겠다고. 화자는 망설이는 남자친구의 등에 뺨을 대며 말한다."내가 같이 가줄게"

사랑의 포즈가 몹시도 부정한 각오에 포개어진다. 감정까지 동원하여 죄를 합리화한다. 가장 질 낮은 감정과 가장 고상한 감정이 동일시되려 할 때 윤리적 직관은 말한다. 이건 역겹다고. 그러나 한편으론 두렵기도 한 장면인데 이런 비윤리에 대한 방관, 동조, 합리화는 실제 삶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렵다.

정이현 소설에선 흔한 자기반성이나 성찰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속된 고민을 계속 보여줄 뿐인데 그걸 바라 보는 독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윤리를 시험당한다. 과연 나는 쉬운 선택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지 자문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천사>의 화자는 독백한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 죄는 피할 수 없고 일상은 여전히 변함없을 거란 사실, 그걸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속물로 만든다.

메이 옆의 침상에서 진정제 링거를 맞다가 나는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메이에게 다가가 먼저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들은 메이에게 높임말을 사용해 정중하게 말했는데, 그 애의 예후를 진심으로 염려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누구를 사랑하는 건 감출 수가 없는 일이었다. 1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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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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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교육용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교훈적이다. 주인공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강간 용의자로 몰린 흑인 남성을 변호한다. 작가는 그의 목소리를 빌려 정의와 인권에 대해 말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일상에서 충실히 실천하는 애티커스 핀치의 모습과 그를 보며 성장하는 천방지축 아이들의 이야기가 뭉클하다.

책에서 말하는 앵무새 죽이기란 인종 차별(혹은 사회적 약자 차별)이지만 조금 더 넓은 범위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티커스 핀치는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는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고 말한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자기 본위적 행위는 제한할 수 없다는 자유주의적 가치의 핵심과 상통하는 말이다. 2016년의 한국에도 많은 앵무새와 그만큼 많은 앵무새 사냥꾼이 있다. 김조광수 커플의 혼인신고 기사엔 동성애 반대와 혐오 리플이 달리고, 설리의 옷 안으로 비치는 유두 윤곽을 두고선 너도 나도 입방아를 찧는다. 관습적 도덕성이라는 애매한 가치로 타인을 재단하고, 그에 기초한 법률로 타인을 옭아맬 때 앵무새는 죽는다. 돌아보면 자신도 한 마리 앵무새일지도 모르는데 뭐 그리 팍팍하게 구는지. 생각해보면 아이들이야말로 자유주의적 가치에 충실했던 것 같다. 자신의 자유를 지키는 데만 충실한 게 문제지만 ㅎㅎ. 여하튼 사회의 틀 안에 포섭되며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약해지는 걸까? 어른들은 한 번쯤 아이들의 정제되지 않은 대사를 되새겨볼 만하다. "내가 이러는데 뭐 보태준 거 있냐?" 과연 그렇다.

"우린 아저씨를 놀리지 않았어요. 비웃지도 않았고요." 오빠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던 건 그냥ㅡ"
"바로 너희들이 하고 있던 짓이지, 안 그래?"
"아저씨를 놀려 댄 거 말이에요?"
"아니, 이웃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아저씨가 살아온 삶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여 준 거 말이다." 1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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