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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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순도 백 퍼센트 행복이라면 좋겠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여 쾌락과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고 싶고, 하고 싶고, 자고 싶고, 먹고 싶지만 인간의 사회적/생물학적 조건은 이 모두를 동시 충족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선택하는 것이 있으면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욕망은 충족 이전에는 고통과 같은 말이다. 소설은 인간의 고통을 절절히 보여주고 그것이 말끔하게 소거된 세계까지 보여준다. 그곳은 진정 유토피아일까?

 

이야기를 이끄는 이부異父 형제의 두 연인은 돌이킬 수 없는 신체의 손상을 겪고 자살한다. '남아있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는 생의 유한성과 그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단호하게 전제한다. 인간은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첫째,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쾌락을 향한 집착과 욕망을 애초에 버리는 것이다. 불교 교리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욕망을 모두 버리고 살 수는 없다. 그런 수준은 일반인이 가히 도달하기 힘든 경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적 욕망 자체가 종의 번식을 추동하는 요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 육체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유한성의 제거, 즉 영원히 사는 것이다. 역시 현재 과학 수준으론 불가능하다. 유성 생식하는 동물의 노화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작가는 미셸의 두뇌를 빌려 음험한 해답을 내놓는다. 유전자 변형을 통한 신인류(새로운 종)의 탄생이다. 이들은 슬픔, 욕망, 기쁨,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정신세계에서 산다. 노화는 없고 유성 생식하지 않는다. 귀두와 음핵에만 분포하는 크라우제 소체가 피부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성적 쾌감을 느낀다. 정신적 고통은 없고 육체적 쾌락은 극대화된 신인류다. 구인류가 되어버린 인간은 여전히 희로애락을 느끼며 서서히 소멸해간다.

 

소설의 신인류 화자는 인간이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기 때문에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온갖 부족함 속에서도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인간에게 경의를 표한다. 소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책을 인류에게 바친다.'

 

제목 <소립자>는 미셸이 생물학적 연구에 접목시키려던 물리학적 최소 단위 개념이기도 하지만 철저히 개별자로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을 뜻하기도 한다. 소립자 같은 인간들은 거시적으로 보면 '저마다 자기 길을 가던 중에 우연히 마주쳐' 지나갈 뿐이다. 살며 개인적인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고독과 고통은 다른 무엇보다 인간다운 감정이다. 그런 감정은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외면해야 하는가? 누구라도 외면하고 싶을 것이지만 항상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깊이 숙고하고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애쓴다. 당면한 고통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인간의 숭고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인류 탄생의 단초를 제공했던 과학자 미셸은 연인의 죽음에 시를 짓는다. 고통에 머물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것,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이야말로 인간을 증명한다.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이 소설을 비관적으로 읽고 싶지 않다. 너무 완벽해서 섬뜩하기도 한 신인류의 세상은 작가가 제시하는 구인류(우리)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던 개별자 인간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이다.

1974년 7월의 어느날 밤, 아나벨은 바로 그런 정황에서 자신이 하나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개별적인 삶은 사실상 이 거짓말과 혼동될 수 있다.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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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를 베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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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는 게 온통 구질구질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좀 구질구질하면 어떤가. 남에게 떳떳하면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인격자는 못 되어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그런 삶 말이다. 정작 이렇게 말하는 난 그렇게 살지 못 했다. 힘들면 뺨 맞고 한강에 눈 흘기듯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풀이했다. 보호자나 병동 간호사들에게 한바탕 짜증을 낸 하루의 마지막엔 침대에 누워 나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난 최하구나.'

 

김애란은 소설집 『비행운』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남에게 전가하는, 진정 비루한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내 삶 한 쪽도 그 소설집에 끼워 넣으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무척이나 현실적이어서 찝찝한 책이었다. 반면 윤성희 소설집 『베개를 베다』는 『비행운』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윤리를 그려낸다. 비루한 삶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단, 소설로 행복한 삶의 원형을 보여줄 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뻔한 서정시가 하품 나오듯이 따분해질 수 있고, 실재와 어긋나는 감각에 독자가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착한 이야기를 재밌게 쓰기란(읽기란) 그래서 어렵다. 독자에겐 다행으로 이 책의 착한 이야기들은 뻔하지 않아서 곱씹어 봐야 그 선함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소설 속 선한 사람들의 윤리 감각은 독특하다. 「가볍게 하는 말」의 고모는 둘째 오빠의 칠순 잔치에서 오빠 셋이 이만하면 잘 살았노라고 서로 껴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 말한다.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몰라, 오빠들은." 칠순 잔치에서 빠져나온 고모는 손자에게 몇 년 전 죽은 친구 이야기를 해준다. 친구의 하나 남은 아들이 넋을 놓고 우는데 자신이 이렇게 말해버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냐. 그래도 기운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리고 손자에게 말한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걸 그때는 이 할미가 몰랐단다. 그건 부끄러운 말이란다.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다." 고모는 우리 모두 그렇게 늙어버렸다며 화를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의 누구도 고모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날씨 이야기」의 언니는 어머니 대신 동생들의 학비를 벌고, 동생들 대신 어머니 병간호를 하고, 적금을 부어 동생들의 결혼자금을 모은다. 한 번의 연애 이후 다신 연애를 하지 않고 홀로 늙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희생적인 삶이다. 분명 희생은 고귀하다. 그러나 만약, 소설가가 이를 아름다운 세밀화로 그리고, 독자는 그 이야기에 숭고한 감동을 느끼고 만다면 어떨까. 잘 생각하면 이건 아름답다기보단 몹시 수상한 풍경일 것이다. 한 인간의 희생을 타인의 시선으로 긍정해버리는 것은 그 희생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소설에서 구현되는 언니 삶의 윤리는 그런 낡은 것이 아니다. 언니의 윤리 감각은 이렇다. 잠깐 장 보러 간 사이 자기 집을 뒤지는 앞집 아이에게 "안 이르마. 그러니 가출은 하지마."라고 말하는 것. 왕따로 자살한 아들의 아버지가 방화를 한 현장에 가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대신 복수해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는 것. 새벽마다 "미워하지 않을 것도 미워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몸서리치지만, 실제론 미워해야 할 것도 미워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더욱이 이 모든 건 각박한 삶에서 이뤄졌기에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다. 소설 속 언니처럼 각박하게 살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왜 미워하지 않을 것도 미워만 하며 살았느냐고 말이다.

 

이런 선한 사람들의 윤리는 물질적이고 희생적인 나눔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고 함께 가는 것으로 이뤄진다. 「못생겼다고 말해줘」에서 '나'의 쌍둥이 언니는 죽었다. 그러나 나와 형부, 어머니와 형부는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다. 형부는 내게 미국에서의 근황을 사진에 담아 이메일로 보내고, 어머니에게 언니의 편지를 다시 손으로 써서 보낸다. 이 담담한 관계의 유지는 죽은 언니를 잊으면서도 잊지 않는 그들 삶의 방식이다. 「팔 길이만큼의 세계」의 나는 이혼으로 삶의 실패를 맛봤고 아버지는 없다. 삼촌은 젊어서부터 칠순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자신을 챙긴다. 나는 삼촌에게 "이제 그만 어머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해보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단지 "우리 내년에도 봅시다."라고 말하고 만다.

 

삶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이들의 공생을 공유 결합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전자가 아닌 자신의 팔 하나씩을 엮어서 서로의 삶을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관계 말이다. 이런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나면 첫 작품 「가볍게 하는 말」의 고모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이름만 기억하고 할머니의 이름은 기억 못 한다. 그런 가부장적 세계에서 아들을 잃고 홀로 손자를 키우는 고모에게 손 한 번 내밀지 않은 저들끼리 치하하는 말은 얼마나 가볍게 흩날리는가. 자신을 내주기는커녕 타인의 삶에 대한 인식조차 없기에 남자 형제들의 결합은 아름답지 않고 그저 이기적으로만 보일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볍게 하는 말'을 남기며 살아갈까. 타인의 삶을 상상하지도 않고 말이다. 「낮잠」의 아버지는 친구를 괴롭힌 딸에게 시 낭송을 시킨다.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인간이 되려면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다. 딸의 생각대로 낯간지럽고 쪽팔리는 일이지만, 낯간지러움을 대놓고 언급했기 때문에 독자는 어색함 없이 배시시 웃을 수 있다. 맞다. 위로와 공감은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뭉근히 마음을 적시는 이야기들이었다. 여름에 차가운 이야기가 재밌듯 겨울의 이불 속에선 이런 이야기들이 좋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는 없다. 한편으론 나야말로 삶을 핑계로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모르는 인간으로 산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아니,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즘의 나는 소설 읽은 후의 뭉근한 마음이 두렵다고 느낀다.

언니와 나는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먹었다. "지각하는 아이들을 보지 않으면 난 미쳤을 거야." 우유를 마시면서 언니가 말했다. 새벽마다 우두커니 홀로 앉아 미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미워하지 않을 것도 미워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러니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해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이라도 봐야해." 나는 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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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들려준 이야기 - 인류학 박사 진주현의
진주현 지음 / 푸른숲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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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커리큘럼에 비교 해부학, 해부학이 있기 때문에 토끼 뼈와 사람 뼈를 만져보긴 했다. 일단 예과 2학년 최대 고비 토끼 뼈 맞추기가 있다. 조원들 집 중에서 희생양이 될 자취방을 뽑고, 그 집에서 불쌍한 토끼를 삶는다. 그리고 살을 발라내고 뼈를 다시 맞춰 붙이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진다. 간혹 토끼 뼈 조그만 게 몇 개 없어져서 치킨을 시켜 먹고 그 뼈를 붙였다는 전설이나, 젓가락이나 손가락보단 혀가 살 바르는 데 제일이라는 전설이 내려오긴 했지만 우리는 정도를 밟았다. 다 맞추고 나니 토끼라기보단 왠지 공룡 같아서 다 같이 웃었던 기억이다.


본과 일학년 들어가기 전 겨울방학엔 골학(osteology)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7박 8일 동안 18시간 정도의 잠을 세 번에 나눠 자며 뼈 공부를 하는 과정이었다. 굳이 이런 혹독한 스케줄로 공부할 필요는 없으나 통과의례 같은 전통이었다. 뼈는 206개뿐이지만 뼈의 세세한 indication, 통과 구조물, 부착 구조물까지 합치면 외울 게 만 개도 넘었을 것이다. 끝나곤 Calvaria에 소주 담아 마시는 사발식을 했다. 지금은 거의 까먹었지만(이럴 거면 왜!) 아직 라틴어 근육 이름 같은 것을 어렵지 않게 말할 수는 있다. 예를 들면 Gluteus maximus. 로마 장군 이름 같지만 엉덩이에 붙은 큰 근육, 대둔근이라는 식. 그렇게 겨울방학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본과 진입했으나 실제 시체 해부는 너무 하기 싫어서 만날 딴짓 했다. 간신히 유급 면했다 ㅎㅎ.


이 책은 내가 배웠던 진절머리나는 골학/해부학과는 거리가 멀다. 책에 담긴 뼈와 관련된 풍부한 인류학적 상식, 과학사는 의사가 아니더라도 아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가령 위시본(wishbone)은 새의 V자형 쇄골인데 소망 뼈란 이름은 어디서 기원했는지, 같은 것들. 책을 읽고 생각해보니 만날 시승기 동영상에서 듣던 더블 위시본 서스펜션도 새의 쇄골 모양을 했기 때문이었다 (빙고!). 한국에만 있는 산후조리(sanhujori) 문화가 속설대로 인종 간 골반 구조 차이 때문이었는지도 몹시 궁금했었는데 그것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에 의하면 골반 구조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골반뼈 구조 차이는 없다 (그러니 남녀 모두에게 당당히 쓸 수 있는 출산/육아휴직을 보장해 달라!).


책 후반부엔 한국의 뼈 연구 실태에 대한 저자의 안타까움이 나온다. 여타 과학 선진국과는 달리 한국은 망자의 뼈로 하는 연구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뼈 표본 확보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시신 기증이야 그렇다 쳐도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골도 이전에는 족족 화장해버렸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힌가.


거의 다 잊어만 가는 의학/생물학 지식을 복기해볼 수 있어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내게 이 책은 과학의 아름다움으로도 읽힌다. 글의 아름다움은 새벽 두시 감성 에세이에만 있지 않다. 실증적인 지식을 얻기 위한 어려움과 그걸 딛고 해낸 발견의 기쁨, 그리고 그것이 인류를 한 걸음 진보시킨 기록은 정말 아름답다. 결국 인류의  발전은 실증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며 이과 우월론자의 서평을 마쳐본다. (농담! ㅎㅎ)

멜라닌 세포는 피부색뿐만 아니라 눈동자 색도 결정한다. 호주의 까무잡잡한 원주민들이 선글라스 끼는 걸 본 적이 있으신지? 그에 비해 파란 눈의 백인들은 해가 많이 나지 않는 날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다닌다. 한국 사람이나 호주의 원주민처럼 눈동자가 갈색인 사람들은 눈동자에 유멜라닌이 많다. 검은 피부가 천연 자외선 차단제인 것처럼 검은 눈동자는 천연 선글라스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해가 쨍쨍 내리쬐는 날에도 그걸 참지 못할 정도로 눈을 부셔하지는 않는다. 그에 비해 백인의 파란 눈은 유멜라닌이 없어서 검은 눈동자보다 햇빛에 훨씬 민감하다. 유난히 피부가 하얀 내 동생은 햇빛에 나가면 특히 눈부셔 한다. 어렸을 때 찍은 사진을 보면 해가 있는 곳에서는 늘 얼굴을 잔득 찌푸리고 있다. 아무래도 피부와 눈동자에 모두 유멜라닌 색소 양이 적은 게 틀림없다. 17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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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신형철 산문 2006~2009
신형철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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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을 많이 쓰지만 정작 읽지 않은 책의 서평은 잘 읽지 못한다. 내용을 서평으로 먼저 접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줄거리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서평이 따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잘 읽히는 서평이 있는데, 그것은 서평 자체로도 좋은 하나의 이야기라는 특징이 있다. 책의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는 것보다 읽은 사람이 재해석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좋은 서평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즉, 책을 안 읽은 사람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서평이 좋은 서평이라는 생각이다. 서평가 금정연도 말했다. 좋은 서평은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라고. 그렇게 쓰려고 노력하나 늘 어렵긴 하다 ㅎㅎ.

물론 신형철은 서평가가 아닌 저명한 문학 평론가다. 일전에 읽은 <몰락의 에티카>는 무시무시한 두께에다 수록된 글도 엄정한 형식의 정통 평론이었다. 솔직히 읽기 어려웠고 남에게 선뜻 읽어보라 권하기도 어려운 책이었다. 반면 <느낌의 공동체>에 수록된 글은 비평이나 평론의 위치에서 조금 내려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이나 서평에 가깝다. 시나 책을 읽지 않아도 잘 읽히는 좋은 글인 건 물론이다. 아니, 정정한다. 아주 좋은 글이라고.

그가 왜 많은 평론가 중 독보적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지 알 수 있었다. 책엔 정홍수 문학 평론가의 <소설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페이지가 있다. 거기서 그는 문학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이 문학평론을 문학답게 만드는가. 그는 좋은 글을 만드는 힘의 90퍼센트는 통찰과 논리가 감당하지만 그것에만 기댄다면 그 글은 그냥 좋은 칼럼, 보고서, 논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평론이 문학이 되려면 나머지 10퍼센트에 해당하는 내면과 문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홍수 문학 평론가를 높이는 말이었지만 누구보다 그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가령, 책의 이런 대목을 보자.

"화염병은 시가 될 수 있지만 시는 화염병이 될 수 없다. 이 긴장을 포기하면 시는 사라지고 만다. (166)"

그가 말하는 문학이다. 끝끝내 화염병을 던지지 않고 절제해야 문학이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소설가 양귀자도 언젠가 비슷한 말을 했다.

"내 소설을 꼼꼼하게 읽어주는 한 독자는 그래서 좀더 분명한 메시지를 담을 만도 하지 않느냐고 바라기도 했지만 나는 그 지적의 타당함을, 지름길을,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애써 둘러가는 것이 소설의 길이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같은 뜻이다. 화염병을 끝내 던지지 않는 끈질긴 긴장감을 포기해버린다면 문학은 김수영이 김지하의 시를 두고 혹평했 듯 '인민군 혁명가'와 비슷한 무엇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평론이나 감상은 그 긴장을 조금은 놓아도 된다. 아니, 시인과 소설가가 끝내 절제한 말을 전달해서 독자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는다면 그야말로 평론의 좋은 역할일 것이다. 책에서 이런 문단을 본다.

<이 덤덤한 듯 원숙한 기교 아래로 사무치는 진심이 흐른다. 시인이 끝내 절제한 그 문장을 경박한 내가 대신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정은씨, 살아서, 꼭 살아서 행복하십시오." 123p>

고백하는데 난 책 읽고 우는 타입이 아니다. 다만 거의 울뻔한 적은 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읽었을 때였다. 여전히 울지 않았지만 참으로 오랜만에, 근 이십 년 만에, 이 칼럼의 매듭을 보고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문학에 대한 감상이 그것을 읽는 자를 흔들 때 감상문은 또 다른 완벽한 문학이 된다.

비단 문학뿐 아니라 영화나 미술, 혹은 음악을 감상한 뒤 그것에 대한 감상을 글로 옮겨서 남과 공유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좋은 작품은 읽은 사람에게 "결코 되찾을 수 없을 것을 앗아가거나 끝내 돌려줄 수 없을 것을 놓고" 간다. 혼자 느끼기엔 몹시 아쉽다. 이 감정의 총체를, 어렵지만, 독자들과 글로 나눌 수 있다면 우리는 느낌의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 책은 문학이 향하는 우리 공동체를 바라보는 진중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선량한 문장들을 읽은 후 생겨난 감정이 읽은 사람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고 단언할 순 없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독서의 감동을 삶에서 구현되지 않는, 위선적이고 얄팍한 감상으로 남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선하게 살자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느낌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만난다.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다." 느낌의 공동체 구성원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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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주의보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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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류시화 시인은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에게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말했다. 이 시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대' 정도로 읽어도 되겠지만 다르게 읽을 수도 있다. 만약 곁에 있는 그대와 그리운 그대가 다른 사람이라면 어떨까. 삶엔 그런 위험한 순간이 때때로 찾아온다.

책엔 많은 불륜 커플이 나온다. 왜 그들은 한 관계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걸까. <오대산 하늘 구경>의 여자는 "자신만 알고 있는 내면의 어떤 결핍"이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고 말한다. 후에 남자는 "결핍을 공유"하기 때문에 너와 함께 있으면 위안이 된다고 말한다.

그들은 결혼으로 결핍을 충족하려 하지 않을까. 그보다도, 왜 자신의 결핍을 버리지 못할까. 정신적 결핍은 채워질 수 없고, 이미 그 자체가 자아의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한 자아는 행복해지길 두려워한다. <보리>의 여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생각한다. '아침이 오면 당신과 헤어져야겠지만, 내 어찌 너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떠나지만 미워하지 못할 사람들. 가끔 통속적인 삶에서 헤매는 우리 모습이기도 하다.

2.
읽으며 사랑의 윤리 같은 건 따지지 말고 잠시 내려놓자. 윤대녕 소설 읽을 땐 이건 소설이니까,라고 퉁치면 된다. 인물들의 대사도 오글오글 간질간질 문어체인데 그것도 그냥 이건 소설이니까,라고 퉁치면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이를테면 이런 대사들.

"훗날 바위를 치며 서로 후회하게 될 거요."

"그럼 나와 성을 쌓은 일은 어떻게 하고?"

"부장님 저 정말, 좋아하세요?"
"거듭 말하면 숲에 숨어 있는 새들이 모두 날아갈 텐데."

"내세에서 다시 만나 전생처럼 눈비가 내리는 날이면 보다 고요하면서도 격렬한 사랑을 나누도록 하자. 커다란 하얀 냉장고에 붉은 사과가 가득 들어차 있는 집에서 말이야."

"호텔 안에 다람쥐 두 마리가 들어왔으니 그만 일어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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