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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삶이 순도 백 퍼센트 행복이라면 좋겠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여 쾌락과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고 싶고, 하고 싶고, 자고 싶고, 먹고 싶지만 인간의 사회적/생물학적 조건은 이 모두를 동시 충족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선택하는 것이 있으면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욕망은 충족 이전에는 고통과 같은 말이다. 소설은 인간의 고통을 절절히 보여주고 그것이 말끔하게 소거된 세계까지 보여준다. 그곳은 진정 유토피아일까?
이야기를 이끄는 이부異父 형제의 두 연인은 돌이킬 수 없는 신체의 손상을 겪고 자살한다. '남아있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는 생의 유한성과 그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단호하게 전제한다. 인간은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첫째,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쾌락을 향한 집착과 욕망을 애초에 버리는 것이다. 불교 교리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욕망을 모두 버리고 살 수는 없다. 그런 수준은 일반인이 가히 도달하기 힘든 경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적 욕망 자체가 종의 번식을 추동하는 요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 육체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유한성의 제거, 즉 영원히 사는 것이다. 역시 현재 과학 수준으론 불가능하다. 유성 생식하는 동물의 노화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작가는 미셸의 두뇌를 빌려 음험한 해답을 내놓는다. 유전자 변형을 통한 신인류(새로운 종)의 탄생이다. 이들은 슬픔, 욕망, 기쁨,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정신세계에서 산다. 노화는 없고 유성 생식하지 않는다. 귀두와 음핵에만 분포하는 크라우제 소체가 피부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성적 쾌감을 느낀다. 정신적 고통은 없고 육체적 쾌락은 극대화된 신인류다. 구인류가 되어버린 인간은 여전히 희로애락을 느끼며 서서히 소멸해간다.
소설의 신인류 화자는 인간이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기 때문에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온갖 부족함 속에서도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인간에게 경의를 표한다. 소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책을 인류에게 바친다.'
제목 <소립자>는 미셸이 생물학적 연구에 접목시키려던 물리학적 최소 단위 개념이기도 하지만 철저히 개별자로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을 뜻하기도 한다. 소립자 같은 인간들은 거시적으로 보면 '저마다 자기 길을 가던 중에 우연히 마주쳐' 지나갈 뿐이다. 살며 개인적인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고독과 고통은 다른 무엇보다 인간다운 감정이다. 그런 감정은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외면해야 하는가? 누구라도 외면하고 싶을 것이지만 항상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깊이 숙고하고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애쓴다. 당면한 고통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인간의 숭고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인류 탄생의 단초를 제공했던 과학자 미셸은 연인의 죽음에 시를 짓는다. 고통에 머물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것,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이야말로 인간을 증명한다.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이 소설을 비관적으로 읽고 싶지 않다. 너무 완벽해서 섬뜩하기도 한 신인류의 세상은 작가가 제시하는 구인류(우리)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던 개별자 인간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이다.
1974년 7월의 어느날 밤, 아나벨은 바로 그런 정황에서 자신이 하나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개별적인 삶은 사실상 이 거짓말과 혼동될 수 있다.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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