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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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무의미의 축제라니 제목 참 멋들어진다. 여자가 "요즘 쥬드 씨는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라고 물으면 무슨 책을 읽고 있든 상관없이 "밀란 쿤데라의 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있습니다."라고 말해야지. 폼 나니까. "이기호의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읽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폼이 안 나잖아... 이미지 세탁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거짓말은 스스로 용서할 수 있다. 어 그런데, 읽어보니 책 속엔 나처럼 허풍 떠는 인간들뿐이다 (ㅎㅎㅎ). 


150페이지 정도의 짧은 책 속에 많은 인물이 나온다. 그들의 에피소드와 발화는 서로 얽혀 의미와 무의미를 규정한다. 종국엔 그의 다른 소설 '불멸'에서 그랬듯 소설 내의 진실과 허구의 경계까지 허물어진다. 우리는 종종 무의미한 삶에 진저리 친다. 그런데 쿤데라는 일상이 무의미의 '축제'라 말한다. 왜일까?


2.

이야기 속 인물들은 서로 속이고 속는다. 다르델로의 암 환자 행세, 칼리방의 캄보디아인 행세, 사람들이 유머와 포도주를 음미하는 법. 이것들은 거짓이고, 실재를 가리는 표상이다. 이는 병치된 스탈린의 이야기와 연결된다. 


3.

스탈린은 흐루쇼프를 비롯한 협력자들에게 자고새 우화를 들려준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회의장에서 그것을 반박하는 이는 없다. 그들은 화장실에 모여 분개한다. 스탈린은 벽 너머에서 그것을 엿듣고 크게 웃는다. 스탈린의 폭력과 현실의 부조리는 단순한 농담조차 받아들일 수 없는, 항거할 수도 없는 거짓말로 만든다. 


스탈린은 표상 뒤에 실재가 있다고 말한 이마누엘 칸트를 부정한다. 표상 뒤에 실재는 없으며, 세계는 표상과 의지일 뿐이라고 말한 쇼펜하우어를 긍정한다. 인류는 전혀 객체적이지 않고 나의 주관적 표상이라 강변한다 (118). 우리는 거짓을 바라보지만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판단조차 되지 않는다. 일상은 무의미하다. 


스탈린과 협력자 무리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사람이 있다. 칼리닌이다. 칼리닌은 전립선 비대증 때문에 항상 요의와 싸운다. 가끔 긴 회의 끝엔 자리에서 오줌을 싼다. 스탈린은 자신이 부정한 이마누엘 칸트가 태어난 도시에 칼리닌의 이름을 붙인다. 칼리닌그라드가 탄생한다. 그저 팬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소변과 맞서 투쟁하는 것이 거짓 세상에 남은 유일한 진실이 된다. 비속함이야말로 인간을 정의하는 속성이다. 그렇기에 칼리닌그라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칼리닌그라드로 남는다 (94). 비속한 인간을 하나의 의미로 남긴 건 아이러니하게도 거짓에 분개하는 자들을 비웃던 스탈린이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


4.

어느 날 알랭은 배꼽티를 입은 여인들을 보고 배꼽이 새로운 성적 표상이 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배꼽은 단순한 성적 표상이 아니다. 배꼽은 어머니와 태아를 물리적으로 연결해주는 탯줄이 잘려나간 흔적이다. 배꼽은 그를 버린 어머니를 증명하는 흔적이다. 알랭이 보기에 여자들의 배꼽은 다 똑같지만, 그것은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자손으로 생이 반복되는 징후다. 알랭의 어머니는 알랭을 버렸지만, 알랭은 평생 어머니를 갈망한다. 무의미하던 배꼽은 삶의 의미가 된다. 알랭은 여자의 배꼽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5.

소설 속 인물뿐만 아니라 현실의 우리도 연극적 삶에 둘러싸여 있다. 남에게 보여주는 내 삶 또한 연극적이다. 이런 거짓들은 우리의 말과 몸짓이 이루는 의미를 무의미로 변화 시킨다. 그러나 나와 타인들이 구성하는 거짓 세상은 개조할 수도 없고, 한심하게 굴러가는 걸 막을 도리도 없다. 쿤데라는 저항할 수 있는 길은 세상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96). 


그저 먹고 싸는 인생에서 의미를 찾기란 어렵다. 나도 무의미한 삶에 늘 진저리 치지만 정작 그것을 떨쳐내려 노력하진 않았다. 아 인생, 넘나 의미 없는 것. 그러나 의미 있는 것만을 좇는 삶의 태도가 항상 행복을 불러오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지나친 열정은 삶을 마모시키기도 한다. 내 20대도 강제된 열정에 의해 마모됐을지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삶을 지키기 위해, 행복하기 위해 무의미를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라몽의 말처럼 내가 하찮고 의미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할까 보다. 이제 독한 술과 기름진 안주 먹으며 살찐 배를 부여잡고 한탄하지 말자. 내 삶은 무의미하다고 한탄하지 말자. 용기를 내서 삶의 비속함과 무의미를 인정하면 그것도 축제가 될지 모르니까.

"나르키소스라는 건 거만한 사람이라는 게 아니야. 거만한 사람은 다른 이들을 무시하지. 낮게 평가해. 나르키소스는 과대평가하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 눈에 비친 자기 모습을 관찰하고 더 멋있게 만들고 싶어 하거든. 그러니까 그는 자기의 모든 거울들에 친절하게 신경을 쓰는 거지." 26p

"시간은 흘러가. 시간 덕분에 우선 우리는 살아 있지. 비난받고, 심판받고 한다는 말이야. 그다음 우리는 죽고, 우리를 알았던 이들과 더불어 몇 해 더 머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 죽은 사람들은 죽은 지 오래된 자들이 돼서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되고 완전히 무(無)로 사라져 버리는 거야. 아주 아주 드물게 몇 사람만이 이름을 남겨 기억되지만 진정한 증인도 없고 실제 기억도 없어서 인형이 되어 버려." 34p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나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139p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그 당시에 나는 무엇보다 당신과 여자들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카클리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죠. 아주 친한 친구인데. 당신은 몰라요. 그래요. 넘억갑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1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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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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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향하지 못하는 자의 집요한 내면 응시


주인공 미조구치는 못생긴 말더듬이다. 생래적인 열등감을 지니고 있는 그는 우이코를 짝사랑한다. 그녀는 미조구치와 정반대의 미美를 가졌다. 그는 그녀에게 경멸에 찬 말을 듣는다. 이어 우이코는 탈영병 애인과 함께 죽는다. 역설적으로 우이코는 영원히 박제된다. 


미조구치는 승려 아버지에게 금각의 美에 대해 듣는다. 금각은 미조구치의 상상 속에서 절대적인 美가 된다. 금각은 마음속의 절대 美로서 그가 美에 닿으려 하는 순간― 여자들과의 정사 ―마다 번번이 그를 방해한다. 


열등감에서 비롯된 자기 파괴는 세상을 향해 위악을 행하는 가시와기를 만나 더욱 가속화된다. 그는 금각을 태우기로 결심한다.


美를 향한 갈망. 닿지 않기에 아름답고 닿지 않기에 파괴한다.


파괴될 것이라 생각한 금각은 일본의 패전에도 초연히 남았다. 그는 금각은 무력하지 않기에 모든 무력의 근원이라 말한다. 자신의 어둠과 허무를 금각에서 바라본다. 가지지 못할 완벽함은 인간에게 절망감을 준다. 금각은 불타야 한다.


'왜냐하면 금각 그 자체가, 정성 들여 구축되고 조형된 허무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눈앞의 젖가슴도, 겉은 환하게 살의 광체를 발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부는 똑같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실질은, 똑같이 육중하고 호사스러운 어둠이었다.

 나는 결코 인식에 도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식은 오히려 유린되며 모멸당하고 있었다. 삶과 욕망은 물론이고······! 하지만 깊은 황홀감은 나를 떠나지 않았기에, 잠시 동안 마비된 듯, 나는 그 적나라한 젖가슴과 대면하고 있었다. 161p'


"금각은 무력하지 않아. 결코 무력하지 않아. 하지만 모든 무력의 근원이지. 188p"


세상을 바꾸는 건 인식인가, 행위인가.


작가는 미조구치와 가시와기의 대담을 통해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미조구치는 말더듬이다. 세상과 소통하기 어려운 그는 인식을 거부하고 행위를 통한 세상의 변모를 말한다. 반대로 가시와기는 안짱다리에 움직임이 불편하다. 그렇기에 인식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식의 눈으로 바본 세계는 영구히 불면이고, 또는 영구히 변모한다. 가시와기가 말하는 인식의 모순은 남천참묘의 공안을 통해 소설의 핵심을 관통한다.


"또 나왔군. 행위로 나왔어. 하지만 네가 좋아하는 미적인 것들은, 인식의 보호 아래에서 무사안일하게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언젠가 말했던 '남천참묘'의 그 고양이 말이야. 비길 데 없이 아름다운 그 고양이 말이야. 양쪽 중들이 다툰 것은, 각자의 인식 속에서 고양이를 보호하여, 기르고, 편히 쉬게끔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남천 스님은 행위자니까, 단숨에 고양이를 베어버렸지. 나중에 온 조주는, 자신의 신발을 머리 위에 올렸지. 조주가 하려던 말은 이거야. 역시 그는 미가 인식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개개의 인식, 각각의 인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인식이란 인간의 바다이기도 하고, 인간의 벌판이기도 하며, 인간 일반의 존재 양식이지. 그는 그것을 말하려 했다고 생각해. 너는 이제 와서 남천이 되겠다는 거니? 미적인 것, 네가 좋아하는 미적인 것, 그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인식에 위탁된 나머지 부분, 잉여 부분의 환영(幻影)이야. 네가 말하는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의 환영이야. 원래 그런 건 없다고도 할 수 있지. 할 수 있지만, 그 환영을 강력하게 만들고, 최대한의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역시 인식이야. 인식에 있어서 미는 결코 위안이 아니라구. 여자이고, 아내이기도 하겠지만, 위안은 아니야. 하지만 결코 위안이 아니면서 미적인 것과, 인식과의 결혼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지. 덧없는, 물거품과도 같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지만, 무언가가 생겨나지. 세상에서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그거야. 227p"


美, 醜


소설을 읽는 내내 미조구치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금각을 불태우고 나서 "살아야지"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더욱 그랬다. 절대적 미와 함께 자신도 발화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을 다 읽고 미조구치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잠들었다. 


나에게도 열등감이 있다. 어렸을 땐 외모와 환경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자라며 내게 어긋나 있던 것들이 남들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았다. 괴롭진 않았지만 불공평하다 생각했다. 신체의 성장 후에도 열등감은 여전했다. 내가 갈구하나 얻을 수 없던 재능을 남에게서 볼 때 종종 적의로 마음이 끓었고 그럴 때면 그것을 일부러 외면했다. 외면은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나를 변화시키지도, 파괴시키지도 못한 채 부유했으므로. 그러나 나는 나를 진정 미워하진 않았다. 나는 열등감을 승화시키지 못했지만 나와 세계를 파괴시키며 살진 않았다. 적당한 체념으로 잊고 살았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을 생각한다. 인식과 행동은 다르다. 외모로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그들을 받아준 적은 없었다. 차라리 말하지 않으면 위선이 아니지만, 말하면 위선이 된다. 책 조금 읽고 깨우친 것 마냥 혐오를 비판하는 요즘의 나는 위선자다. 나는 생리적으로 추함을 혐오한다. 


추한 자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고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것은 현실에서 이뤄질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마음을 때렸다. 그러나 추한 자들에겐 세상과의 소통이 허락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작품을 두고 '미美'를 논한 적 없다고 한다. 평론가들이 내내 왈가왈부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미美보다 추醜를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왜 금각은 불타야 하는가. 가지지 못하는 것은 파괴되어야 하는가. 세상에 닿을 수 없는 추醜는 슬프다. 나는 미조구치를 이해할 수 없다. 동의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조구치를 이해하고 싶다.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남들을 이해시키겠다는 표현의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 눈에 띄는 것들이 나에게는 숙명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독은 자꾸만 살쪄 갔다, 마치 돼지처럼. 13p

자나깨나 나는 우이코가 죽기를 바랐다. 지상에서 수치는 근절되리라. 타인은 모두 증인이다. 그러나 타인이 없으면 수치라는 것도 생기지 않는다. 나는 우이코의 모습, 어두운 새벽 속에서 물처럼 빛을 발하며 내 입을 잠자코 주시하던 그녀의 눈 뒤에서, 타인의 세계 ― 즉, 우리들을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고, 자진하여 우리들의 공범이 되며 증인이 되는 타인의 세계 ― 를 본 것이다. 타인이 모두 멸망하여야 한다. 내가 정말로 태양을 향하여 얼굴을 들기 위하여는, 세계가 멸망하여야 한다······. 16p

나는 지금까지, 그토록 거부로 가득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자신의 얼굴을,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이코의 얼굴은 세계를 거부하고 있었다. 달빛은 그녀의 이마와 콧등과 얼굴 위에 가차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부동의 얼굴은 다만 그 빛에 씻기고 있었다. 조금만 눈을 움직이고 조금만 입을 움직인다면, 그녀가 거부하려는 세계는 그것을 기화로 한꺼번에 밀어닥치리라. 18p

한편, 어머니와 단가 사람들은 나와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면이 암시하는, 살아 있는 자들이 속한 세계의 유추를, 나의 완고한 마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면이 아니라, 나는 단지 죽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시체는 다만 보여지고 있었다. 나는 다만 보고 있었다. 본다고 하는 것, 평소에 아무런 의식도 없이 하고 있는 대로, 본다고 하는 것이, 이토록 살아 있는 자의 권리의 증명이며, 잔혹함의 표시일 수도 있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 참신한 체험이었다. 큰 소리로 노래 부르는 일도 없고, 소리치며 뛰어다니지도 않는 소년은, 이런식으로 자신의 생을 확인하는 법을 배웠다. 36p

토끼풀밭은 앉기에 좋았다. 햇빛이 그 부드러운 잎사귀에 흡수되어 자잘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기에, 그 일대가 지면으로부터 약간 들떠 있는 듯이 보였다. 앉아 있는 가시와기는, 걷고 있을 때와는 달리, 남들과 다름없는 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일종의 험악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육체적인 불구자는 미모의 여자도, 남들에게 보여진다는 사실에 지치고, 보여지는 존재라는 사실에 질려서, 궁지에 몰린 끝에, 존재 그 자체로 마주 쳐다보는 것이다. 먼저 보는 쪽이 이긴다. 도시락을 먹고 있는 가시와기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이 자기 주변의 세계를 훤히 내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98p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불안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지. 불안은 없어.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건, 태양이나 지구나, 아름다운 새나, 보기 흉한 악어가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거지. 세계는 비석처럼 움직이지 않아. 105p

나는 쓰루카와의 죽음을, 1년 가까이 애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독이 시작되자, 나는 그것에 쉽게 익숙하여졌고, 아무와도 거의 말을 하지 않는 생활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스러이 깨달았다. 삶에 대한 초조감도 나에게서 사라졌다. 죽어지내는 나날은 상쾌하였다. 143p

대체로 나의 체험에는 우연의 일치와도 같은 것이 작용하여, 거울로 된 복도처럼 하나의 영상은 무한히 깊은 곳까지 이어져 있었기에, 새로이 접하는 사물에도 과거에 보았던 사물의 모습이 확실히 비치었고, 이러한 유사성에 이끌려서 어느 틈엔가 복도 안쪽 한없이 깊숙한 곳에 있는 방 안에 발을 들여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운명이라는 것에, 우리들은 갑자기 부딪히는 것이 아니다. 훗날 사형을 당하게 되는 사내는 평소에 다니던 길의 전봇대나 건널목에서도, 끊임없이 사형대의 환상을 보기 때문에 그 환상에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165p

"어린애 같은 떼거리는 쓰지 마." 하고 가시와기는 비웃었다.
"나는 너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구. 이 세계를 변모시키는 건 인식이라고. 알겠냐, 다른 것들은 무엇 하나 세계를 바꾸지 못해. 인식만이, 세계를 불변인 채로, 그대로의 상태에서 변모시키지. 인식의 눈으로 보면, 세계는 영구히 불변이고, 또한 영구히 변모한다구.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너는 말하겠지. 하지만 이 삶을 견디기 위해서, 인간은 인식을 무기로 삼게 되었다고 할 수 있지. 동물에게는 그런 건 필요없어. 동물에게는 삶을 견딘다는 의식 따위는 없으니까. 인식은 견디기 힘든 삶이 그대로 인간의 무기가 된 거지만, 그러면서도 견디기 힘든 것이 조금도 경감되지 않아. 그것뿐이야." 2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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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의 사랑 - 개정판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7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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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한강이 등단 후 20대 중반에 발표한 단편들을 모은 첫 소설집이다. 1994-1995년에 쓴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벌써 20년이 지난 소설들인지라 개정판에서는 지금의 감성에 맞게 소소한 어미들을 다듬었으며,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작품은 뺐다고 한다. 지금은 중견 작가가 된 한강의 대표 정서는 누가 뭐래도 슬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결같은 기조는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등의 최근작까지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러므로 한강의 초기작들을 읽는 건 그의 슬픔이 자리 잡은 원류(原流)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한강의 소설을 몇 편 읽어 본 사람이면 그의 초기작도 당연히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의 이야기가 쓰였겠거니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짐작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야기들은 심연의 상처를 가진 이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로 시작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절대적인 상실감-혈육의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중심인물 두 명의 대립을 통해 이야기가 서술된다. 『여수의 사랑』의 정선과 자흔, 『어둠의 사육제』의 영진과 명환, 『야간열차』의 영환과 동걸, 『진달래 능선』의 정환과 황 씨, 『붉은 닻』의 동식과 동영의 관계가 모두 그러하다. 『질주』에서는 직접적인 인물의 병치가 없고 회고로부터 고통이 환기되는 구조를 가지지만, 혈육의 죽음이라는 상실감의 근원은 앞선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들은 대부분 한 명의 초점 화자가 다른 인물을 바라보고 있는 구조이며 중심인물들은 제각각의 상처와 상실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난하며 체념적인 이들은 동거를 통해 (여수의 사랑, 진달래 능선, 어둠의 사육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을 사랑하기도 어려운 불완전한 인간들이기에 남을 이해하기란 더욱 어려워 보인다. 희망 없는 바닥의 날들은 그저 견뎌내야 하는 걸로 보인다.


혈육을 잃은 절대적인 상실감, 지키지 못한 가족, 가난. 이런 상처들은 치유할 수 있는 것인가? 한강은 쉽사리 치유를 말하지 않는다. 어느 작품들도 쉽사리 희망을 비추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상실감은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기에 함께 공명(共鳴) 한다. 작중 인물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절망의 병존 속에서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건 타자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과거를 만나고 화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밤하늘은 숨이 막히도록 어두웠다. 베란다 방에서 여러 번 밤을 지새워본 나는 아파트촌 위의 하늘이 가장 어두울 때를 지나서 새벽이 동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장 지독한 어둠이 가장 확실한 새벽의 징후임을 나는 수차례 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새벽을 의심했다. 고질병을 가진 사람이 한차례의 통증이 지나갈 때마다 죽음을 확신하듯, 나는 얼마 안 있어 지나가고 말 어둠이 영원할 것만 같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135p

친구 녀석들의 모임이 재개되었다. 나는 왠지 그곳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다. 혼자라는 것은 피가 끓고 눈이 부신 젊음이 있을 때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지 이제는 내 몸에 잘 맞는 껍질이었다. 그 껍질 속에서 나는 편안했다. 186p

정환은 그동안 자신의 앙상한 희망을 혹사했다. 곰이나 원숭이 같은 짐승들을 먹이지 않고 채찍으로 다스리는 곡예사처럼 정환은 자신의 희망을 함부로 다루고 소모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것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환의 지친 육체를 괴롭히는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작정의 희망이었다. 의지나 가능성과는 무관한 성질의 감정이었다. 2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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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사
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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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 사십사는 숫자 44이다. 이 숫자는 등장인물의 나이를 의미하기도 하고 단편 『四十四』에서 여주인공 제민이 입는 옷 사이즈를 의미하기도 한다. 중년(中年)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마흔 살 안팎의 나이. 또는 그 나이의 사람. 청년과 노년의 중간을 이르며, 때로 50대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작가는 사전에 나오지 않는 중년의 의미를 여러 이야기를 통해 말한다. 우선 소설집 내 모든 작품의 주인공들은 중년이다. 소설집의 제목처럼 44세의 주인공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 정확한 나이가 명시돼 있지 않지만 40대 중반이거나 50쯤 되는 중년이 나오기도 한다. 작가는 중년은 대개 무기력하고, 졸렬하며, 비겁하다고 말한다. 


『흉몽』은 어느 순간 갑자기 입술이 잘려나간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문예사의 편집자로, 유능했으나 남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이였다. 입술이 잘려나간 후 그의 삶은 온통 엉망이 된다. 자살도 실패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대상을 찾지 못한 분노를 투사할 대상이다. 이렇게 삶은 예고 없이 일그러질 수 있고, 그때 우리가 행한 무례들은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사라진 이웃』에서는 실직 후 술만 마시다 이혼 한 무기력한 가장이 나온다. 용역 일을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고 창피만 당한 뒤 용역 일을 잃는다. 이 가장은 무력하게 껍질 안으로만 들어가는 달팽이 같다. 무력하게 침잠한 중년은 딸의 삶도 알지 못한다. 


『더 송 The song』에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중년의 교수가 나온다. 그는 요즘 흔히 말하는 '개저씨'에 가까운 인물이다. 졸렬하고, 무례한 그의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끝내 남 탓만 한다.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에서도 중년의 교수가 나온다. 지금 살고 있는 젊은 애인과 동거를 시작할 때 이전의 애인을 졸렬하게 내친다. 시간이 지나 지금의 애인에게 짜증과 분노가 치밀지만, 그는 "사랑이 어딨나.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중얼거리며 차 밖으로 그녀의 애완견을 던져 버릴 뿐이다. 


만약 곱게 늙는 법을 곱게 전달했으면 참 재미없는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인간이 망가지고, 피와 살점이 튀는 이야기로 뻔한 교훈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한편 무기력한 인생은 뜻하지 않게 변곡점을 찍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아내의 시는 차차차』에선 은행을 다니다 조기 퇴직하고 치킨집을 말아먹은 후 백수로 지내는 중년 남성이 나온다. 그는 교사 아내에게 용돈을 받고 지내던 중 우연히 백화점 문화센터의 교양 시 강좌에 참여하게 된다. 그곳에서 기발한 방법으로 '술집 시 선생'으로 거듭나고 6년 전 만났던 여성을 다시 품게 된다. 그의 아내에겐 새로운 남자가 생긴 듯하지만, 상관없다. 그의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인생의 희비를 함수 그래프로 그릴 수 있다면 어떻게 그려질까. 이 소설집에 의하면 그래프 전체 모양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중년은 변곡점에 해당할 것이다. 오르기만 했던 삶이 갑자기 내려가고, 반대로 내려가기만 했던 삶은 사소한 일을 발판 삼아 다시 올라가기도 한다.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되살아난 기억이 행하는 폭력에 대한 서술이다. 


『한 박자 쉬고』에선 주인공이 과거 자신을 심하게 괴롭히고 끔찍한 기억을 안기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본능적으로 분노가 치밀고, 거부감을 느끼지만 끝까지 그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 이전의 관계를 다시 강요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해 보이지만 공포를 기억하는 몸은 생각과 다르게 반응한다. 그는 잊고 싶었던 기억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중년은 그렇게 무기력하다.


『四十四』에선 마흔네 살의 미혼여교수가 나온다. 그녀는 우연히 오래전의 연인이었던 윤 교수를 만난다. 윤 교수는 젊었을 적 그녀가 갖지 못한 걸 가지고 있고, 세련된 외모를 가졌었다. 하지만 지금 중년의 그녀보다 더 늙어버린 윤 교수는 머리도 벗어지고 이전의 용모를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녀는 교수에게 품었던 연정이 모두 사라지는 걸 느끼지만, 윤 교수는 그녀에게 추근 댄다. 지금은 원하지 않는 이전의 관계를 강요당할 때 기억은 폭력으로 작용한다.


『네 친구』는 『四十四』의 여주인공 제민의 친구 혜진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그녀는 대학교 친구 세 명과 이태원의 한 식당에서 만난다. 그곳에는 이전에 처음으로 원 나이트 한 남자가 셰프로 일하고 있다. 이 짓궂은 우연과 친구들의 몽니는 혜진에게 수치심을 준다. 한편 병치되는 혜진의 회상에서 교회에서 만난 한 여자는 도저히 기억나지 않지만 혜진에게 오래전 자신이 고통받았다는 듯한 뉘앙스의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네 친구에서 나머지 한 명은 원 나이트 한 셰프일까, 교회에서 만난 여자일까. 어쨌든 셰프와의 기억은 수치를 주는 폭력으로 작용한다. 교회 여자는 정말 자신이 기억 못 하는 것일지도, 아니면 교회 여자가 미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인지하지 못하던 망각을 인지할 때 그것이 폭력으로 작용함을 말한다.


참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선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이걸 다 읽고 나면 중년의 삶이란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탄식을 내뱉게 된다. 이 적나라한 중년의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소아가 작은 성인이 아니듯, 중년도 나이만 먹은 청년이 아니다. 작가는 아마도 염치없는 중년들의 이야기로 하여금 독자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나이 듦이지만, 우리가 피해야 할 것들은 모조리 이 이야기 속에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중년이 채 십 년도 남지 않았구나. 어쨌든 나는 다시 탄식한다.

누가 내게 이런 짓을 한 것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왜?`가 중요했으나 `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툭하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선생님 말이 되질 않잖아요.` 왜라는 물음은 필연성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소설에서 그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요.` 필자들은 머쓱해하며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여 원고를 다시 보내왔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소설도 완벽한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작품은 없었다. 169p

시간은 지나가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 사람 마음속 깊숙한 곳에 탑을 쌓는다. 기억 속에 가라앉은 시간의 끝은 뾰족한 바늘처럼 생겨서 복원해내면 따끔하게 마음의 가장자리를 찌르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카로운 시간의 기억을 다시 찾지 않을 만큼 깊숙한 곳에 숨겨놓는다. 그러곤 어디에 그 시간을 두었는지 잊어버리고선 우왕좌왕한다. 서로 사랑할수록, 함께한 시간이 많이 쌓일수록 그 끝은 벼려진 바늘과 같아진다. 그 끝을 기억하지 못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왜 상처받고 상처 주는지 모른 채 시간은 계속하여 흘러만 간다. 깊은 시간을 나눈 우정도 비슷하다. 우정은 시기와 질투 같은 다른 감정으로 얽히기 쉽다. 가족끼리 대화가 안 되는 이유는 대개 서로에 대한 감정이 먼저 튀어나와서인데, 친구 사이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245p

"봤어? 나이는 곱절이나 처먹어서, 애만큼도 삶의 철학이라는 게 없어. 바로 그거야, 차이. 저들이 버티는 이유, 인간으로써 권리 어쩌고 하는 거 말이야. 그런데 아니거든, 세상은. 시바, 이런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거잖아. 시바, 이 세상은 원래 졸라, 불평등하거든. 그걸, 아니까 민주주의 하자고 난리인 거 아니야. 민주주의 그건 언제나, 미래의 일이란 얘기야. 자본주의에서 무슨 평등이야, 시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만 평등한 거야. 알겠어?" 278p

"여자애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아저씨가 그 애에게 그런 동정을 보내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라고요. 사람은 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 있잖아요. 조금 심하게 얘기하면 동일한 계급에서 동정과 연민은 웃긴 일이라구요. 상위계급에서만 그런 것들을 보낼 수가 있는 거죠." 284p

김 목사가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군데군데 켜진 홍등이 밤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이른 저녁부터 사창가를 서성이는 청년들이 보였다. 아테네에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종종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사창가도 3천 년의 세월을 견딘 것이라 했다. 이 거리를 지나쳐간 남자와 여자와 시간들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졌다. 고대의 시간으로부터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신의 형상도 막막한 건 마찬가지였다. 3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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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왜 신을 믿는가. 왜 종교에 기대는가. 이 소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민요섭의 살해로부터 시작된다. 민요섭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나 나환자촌을 방문하고, 불행과 고통이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찾아 옴을 깨닫는다. 이 부조리함에서 기독교에 회의를 느낀다. 민요섭은 일종의 무신론자가 되어 전설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의 여정을 상상하여 글로 남기기 시작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독실한 유대교의 신자였으나 유대교의 교리와 야훼의 신성에 의문을 품고 종교와 유일신의 기원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돈다. 그 여정에서 여러 종교가 공유하는 보편성 - 이를테면 신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보이는 도식들, 신들의 태어남과 죽음에서 보이는 법칙성 - 을 찾는다. 각 종교의 교리에 실망하다 예수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와 설전을 벌이던 아하스 페르츠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인 예수에게 기쁨을 느낀다. 영혼의 삶이 중요하다 말했던 예수가 실제로 빵과 물고기로 실존의 구원을 베푸는 모습에 감격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기적을 베푼것을 이내 후회한다. 권능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기적으로 군중의 의지를 강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다만 그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야훼의 권능을 빌린 것뿐이라고. 여기서 다시 아하스 페르츠는 반발한다. 이제 더 큰 기적 없이는 그들을 감격시킬 수 없다면서. 결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말씀의 은총에서 밀어내 버렸다면서. 


아하스 페르츠를 통해 민요섭은 영혼보다 육신의 삶, 인간의 실존 자체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의 아들 예수와 같은 날 태어난 아하스 페르츠는 종교가 속박하는 인간성과 자유의지의 회복을 갈구하는 사람의 아들이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고자 했던 민요섭은 다시 기독교의 품으로로 돌아간다. 이런 치밀한 무신론의 논리를 쌓아올린 그가 왜 종국엔 기독교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을까. 


민요섭의 사상에 경도된 조동팔의 실천적 삶이 과격한 일탈의 양상을 보임에 따라 다시 회의감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궁극적 이유는 빵과 기적 없는 구원의 한계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고통이 덜어지지 않는 불행한 삶들에 절망했다. 실천으로만의 구원에 큰 한계와 절망을 느끼고 기독교로 회귀한다. 반기독교 사상을 종교와 같이 여기고 말았던 조동팔의 맹목적 추종과 마지막 광기는 큰 오류를 범한다. 본말 전도된 맹목적 사상 추종은 인간보다 신을 우선하는 광신도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세상이 이토록 불완전하다. 우리는 왜 신을 믿는가. 왜 종교에 기대는가.

생각해 보아라.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구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를. 120p

천지창조 뒤 <심히 보기에 좋았더라>는 구절이 반복됨과 아울러 조상들은 곳곳에서 야훼의 인간창조를 자비와 사랑의 발로로 말하고 있으나, 지난 일과 당장에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서 아하스 페르츠 자신이 더 자주 본 것은 자기를 섬기고 떠받드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야훼였을 뿐이었다. 162p

선(善)은 존중돼야 하고 악(惡)은 투쟁돼야 하며, 삶은 유지돼야 한다ㅡ
187p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아하스 페르츠의 관심을 끈 것은 배화교의 이원론이 아니었던가 한다. 왜 선악을 불문하고 재난이 우리를 찾아오는가, 신의 사랑과 자비가 어찌하여 인간의 고통과 비탄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ㅡ 지난날 아하스 페르츠를 조상들의 신으로부터 뛰쳐나오게 한 그 괴로운 물음의 답이 그 속에서 가능할 것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190p

원래 야훼는 엘 사타이산에 은거하던 목양자의 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모세의 광기가 접한 호렙사느이 영이 더해져 야훼는 곧 가나안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군신으로 변질되었다. 그 뒤 엘리야와 호세아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부여했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바빌로니아인들의 창조론과 우주론을 표절하는 한편 페르샤인들의 사탄과 종말론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야훼는 완성되었다.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을 뿐이다 196p

그 다음에 당신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셨소. 보복하지 말라 하셨으며,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소.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내놓고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 주며, 오 리를 가지거든 십 리를 가주라 하셨소.
진실로 묻거니와, 도대체 당신은 그 모든 가르침의 실천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인간의 창조가 오직 당신 아버지의 선(善)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시오? 그러나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여인의 몸을 빌려 태어난 자 중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따라 출발할 것이지만 결코 아무도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 나머지ㅡ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 교훈은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오. 비록 당신으로 하여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오. 236p

지혜 없는 선과 마찬가지로 선 없는 지혜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느냐. 죄는 지혜 없는 선의 딴 이름이며 악은 선 없는 지혜의 딴 이름에 다름 아니다. 너희도 겪었으리라, 자유 없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정의 없는 자유가 얼마나 괴롭고 쓰디쓴 것이었던가를. 280p

선이 홀로만을 주장할 때 독선이 되듯 지혜가 홀로만을 주장하면 악이 될 뿐이다. 독선을 악으로 바꾸어본들 물에 빠진 이를 건져 불구덩이에 내던짐과 무엇이 다르랴. 295p

세계의 개선이 지연되는 것은 앞서가는 철학과 논리를 행동이 허겁지겁 뒤따랐기 때문이오. 나는 오히려 그들더러 뒤따르라 하고 행동으로 앞서가는 쪽을 택했소. 행동의 아름다움은 작더라도 확실한 걸 얻어내는 데 있소......
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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