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왜 신을 믿는가. 왜 종교에 기대는가. 이 소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민요섭의 살해로부터 시작된다. 민요섭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나 나환자촌을 방문하고, 불행과 고통이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찾아 옴을 깨닫는다. 이 부조리함에서 기독교에 회의를 느낀다. 민요섭은 일종의 무신론자가 되어 전설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의 여정을 상상하여 글로 남기기 시작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독실한 유대교의 신자였으나 유대교의 교리와 야훼의 신성에 의문을 품고 종교와 유일신의 기원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돈다. 그 여정에서 여러 종교가 공유하는 보편성 - 이를테면 신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보이는 도식들, 신들의 태어남과 죽음에서 보이는 법칙성 - 을 찾는다. 각 종교의 교리에 실망하다 예수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와 설전을 벌이던 아하스 페르츠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인 예수에게 기쁨을 느낀다. 영혼의 삶이 중요하다 말했던 예수가 실제로 빵과 물고기로 실존의 구원을 베푸는 모습에 감격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기적을 베푼것을 이내 후회한다. 권능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기적으로 군중의 의지를 강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다만 그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야훼의 권능을 빌린 것뿐이라고. 여기서 다시 아하스 페르츠는 반발한다. 이제 더 큰 기적 없이는 그들을 감격시킬 수 없다면서. 결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말씀의 은총에서 밀어내 버렸다면서. 


아하스 페르츠를 통해 민요섭은 영혼보다 육신의 삶, 인간의 실존 자체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의 아들 예수와 같은 날 태어난 아하스 페르츠는 종교가 속박하는 인간성과 자유의지의 회복을 갈구하는 사람의 아들이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고자 했던 민요섭은 다시 기독교의 품으로로 돌아간다. 이런 치밀한 무신론의 논리를 쌓아올린 그가 왜 종국엔 기독교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을까. 


민요섭의 사상에 경도된 조동팔의 실천적 삶이 과격한 일탈의 양상을 보임에 따라 다시 회의감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궁극적 이유는 빵과 기적 없는 구원의 한계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고통이 덜어지지 않는 불행한 삶들에 절망했다. 실천으로만의 구원에 큰 한계와 절망을 느끼고 기독교로 회귀한다. 반기독교 사상을 종교와 같이 여기고 말았던 조동팔의 맹목적 추종과 마지막 광기는 큰 오류를 범한다. 본말 전도된 맹목적 사상 추종은 인간보다 신을 우선하는 광신도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세상이 이토록 불완전하다. 우리는 왜 신을 믿는가. 왜 종교에 기대는가.

생각해 보아라.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구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를. 120p

천지창조 뒤 <심히 보기에 좋았더라>는 구절이 반복됨과 아울러 조상들은 곳곳에서 야훼의 인간창조를 자비와 사랑의 발로로 말하고 있으나, 지난 일과 당장에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서 아하스 페르츠 자신이 더 자주 본 것은 자기를 섬기고 떠받드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야훼였을 뿐이었다. 162p

선(善)은 존중돼야 하고 악(惡)은 투쟁돼야 하며, 삶은 유지돼야 한다ㅡ
187p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아하스 페르츠의 관심을 끈 것은 배화교의 이원론이 아니었던가 한다. 왜 선악을 불문하고 재난이 우리를 찾아오는가, 신의 사랑과 자비가 어찌하여 인간의 고통과 비탄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ㅡ 지난날 아하스 페르츠를 조상들의 신으로부터 뛰쳐나오게 한 그 괴로운 물음의 답이 그 속에서 가능할 것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190p

원래 야훼는 엘 사타이산에 은거하던 목양자의 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모세의 광기가 접한 호렙사느이 영이 더해져 야훼는 곧 가나안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군신으로 변질되었다. 그 뒤 엘리야와 호세아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부여했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바빌로니아인들의 창조론과 우주론을 표절하는 한편 페르샤인들의 사탄과 종말론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야훼는 완성되었다.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을 뿐이다 196p

그 다음에 당신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셨소. 보복하지 말라 하셨으며,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소.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내놓고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 주며, 오 리를 가지거든 십 리를 가주라 하셨소.
진실로 묻거니와, 도대체 당신은 그 모든 가르침의 실천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인간의 창조가 오직 당신 아버지의 선(善)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시오? 그러나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여인의 몸을 빌려 태어난 자 중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따라 출발할 것이지만 결코 아무도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 나머지ㅡ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 교훈은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오. 비록 당신으로 하여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오. 236p

지혜 없는 선과 마찬가지로 선 없는 지혜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느냐. 죄는 지혜 없는 선의 딴 이름이며 악은 선 없는 지혜의 딴 이름에 다름 아니다. 너희도 겪었으리라, 자유 없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정의 없는 자유가 얼마나 괴롭고 쓰디쓴 것이었던가를. 280p

선이 홀로만을 주장할 때 독선이 되듯 지혜가 홀로만을 주장하면 악이 될 뿐이다. 독선을 악으로 바꾸어본들 물에 빠진 이를 건져 불구덩이에 내던짐과 무엇이 다르랴. 295p

세계의 개선이 지연되는 것은 앞서가는 철학과 논리를 행동이 허겁지겁 뒤따랐기 때문이오. 나는 오히려 그들더러 뒤따르라 하고 행동으로 앞서가는 쪽을 택했소. 행동의 아름다움은 작더라도 확실한 걸 얻어내는 데 있소......
30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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