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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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전공의 3년차 종양 내과 파트를 돌 때 난소암 말기 할머니를 맡은 적 있었다. 보호자들이 집에서 보살피기 어렵다는 이유로 환자는 대학 병원에 왔다. 사실 병원은 환자에게 요양 목적으론 그리 좋은 공간이 아니다. 내성균에 의한 원내 감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할머니는 열이 났고 나는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검사를 시행했다. 발열 원인은 자발성 세균성 복막염이었다. 말기 암환자였지만 감염으로 생이 더 짧아져선 안될 것이기에 항생제 치료를 시작했다. 항생제 외에도 복수와 말초 부종을 조절하기 위해 이뇨제가 투여되는 터라 환자의 콩팥 수치는 불안정했다. 나는 염증 수치와 콩팥 수치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혈액 검사를 이틀에 한 번 냈다. 교수님은 치료의 큰 방향만 결정하지 3년차의 세세한 오더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이건 환자를 좀 더 정교하게 치료하기 위한 나의 판단이었다. 할머니는 이틀에 한 번 채혈 당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의 구역질이 심해졌다. 장 마비를 생각했고 일차 감압을 위해 L-tube를 삽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노련한 늦가을 인턴 선생이 L-tube 삽입에 실패하는 게 아닌가. 몇 번을 시도해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병동에 가서 직접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병동을 지나가던 종양 내과 주임 교수님도 직접 시도해보셨지만 그 또한 실패였다. 주임 교수님은 일단 오늘은 이대로 놔두자 말씀하시고 나를 스테이션 컴퓨터 앞으로 데려간 후 말씀하셨다. 차트 열어보자. 환자의 차트와 검사 결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환자의 담당의가 아니었던 주임 교수님은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보신 후 몇 가지 이유로 식도 협착이 왔을 수도 있겠단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셨다. 왜 피를 이렇게 자주 뽑는 거지? 할머니가 속으로 무슨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차라리 자길 죽여달라고 생각하고 있을걸.


사람들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걸 모두 알지만, 정작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끝까지 삶만을 생각하는 게 인간이다. 환자는 물론이고, 환자의 가족, 심지어 의료진도 예외가 아니다. 외과 의사인 저자는 주변인들과 아버지의 죽음을 회고하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한다. 현대 의학의 발전은 예측하지 못한 급격한 죽음을 줄였지만 느리고 완만한 죽음을 늘리기도 했다. 느리고 완만한 죽음이란 곧 고통의 시간도 길다는 뜻이다. 불행히도 이 고통이란 환자의 고통만 뜻하지 않는다. 신체 기능이 매우 떨어져 있는 노인들이 집에서 지낼 때 병수발하는 가족들의 고통 또한 커진다. 그런 이유로 가족들은 노환을 겪는 부모를 요양원에 맡긴다. 요양원에선 노인 환자의 건강을 해칠만 한 요소를 통제한다. 그곳에선 식사, 간식, 운동, 취미 활동, 개인의 삶 모두 제한된다. 요양원 생활을 하는 노인 환자들의 우울증이 늘어난다. 심지어 그런 방식으로 더 나은 삶을 보장받지도 못한다. 기존 요양원의 이런 문제점을 인지한 사람들이 새로운 모델의 요양원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곳에선 병든 노인일지언정 개인의 삶이 존재하고, '원한다면 피자나 초콜릿을 먹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건강의 기계적 관리가 아니다. 노인 환자들의 삶에서 중요한 관계와 기쁨을 어떻게 유지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늙어서도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저자의 아버지도 의사였지만 척수 종양에 걸린 후 자신의 치료를 두고 큰 혼란을 겪는다. 불치의 암 앞에선 평생을 의사로 살아온 사람도 그저 평범한 일반인이 되어버린다. 항암치료나 고식적 수술로 생존 기간이 늘어나고 신체 기능이 좋아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존 기간의 이득도 얻지 못하고 신체 기능도 이전보다 떨어질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까지 환자와 보호자와 의사들은 대부분 최선의 결과만 상상하며 치료를 시작하고, 실패하면 방법을 바꾸고, 환자가 죽을 때까지 무엇이든 시도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의학적 충동을 '관성'이라고 비판하며 무조건적인 질병의 치료보단 환자가 원하는 걸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령 사지마비의 가능성이 있는 수술을 앞두고 어떤 환자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미식축구 경기를 볼 수 있다면 나름 행복한 여생이니 수술을 시행하자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어떤 환자는 생존 기간 연장 가능성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길 원하므로 수술을 거부할 수도 있다.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인지, 그걸 이뤄 내기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358)'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어야 한다. 이런 노력으로 닿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앞서 말한 난소암 할머니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이후 나는 할머니의 혈액 검사를 줄여나갔다. 감염이 잘 조절되었으므로 운이 따르기도 한 결과다. 이후 어찌어찌 코로 관을 다시 넣었고, 그걸 잘 유지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고향 익산의 요양병원으로 전원 갔다. 


본과 2학년 때 눈물 콧물 짜며 보던 <하얀 거탑>은 지금 생각하면 순 엉터리 병원 정치 드라마지만, 여전히 좋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 병리과 교수로 분했던 변희봉은 이렇게 말한다. "최교수, 명백히 죽음의 징후를 보이는 환자에게 과도한 시술을 행하는 건 환자가 안락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어. 삶의 마지막을 보내기에 병원은 적당한 장소가 아니지. 그... 진주라는 꼬마에게 진통제보다는 아이스크림 하나가 더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난소암 할머니에게 아이스크림은 아무래도 무리였겠지만 콧줄 대신, 정맥 영양 대신, 이뇨제 대신, 항생제 대신, 대학 병원 대신 더 좋은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린 환자의 신체를 전장 삼아 질병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저자는 환자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끝까지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의 새로운 역할이라고 말하는데, 당시의 나는 환자에게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길 바라는지 물어본 적 없었다. 그걸 내 역할이라 생각한 적조차 없었다. 난소암 할머니에게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산다는 건 뭐였을까. 모른다. 고향에 있는 요양 병원에선 자녀와 손주들 얼굴을 하루라도 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치료의 종착지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환자의 마지막 좋은 삶이 고작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 지금도 무안해진다. 


무엇이든 시도해 볼 준비가 되어 있는 새라를 대하면, 나는 어느새 그녀의 폐암과 관련된 실험적인 치료법을 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에게 적용한 화학요법 중 하나가 갑상선암을 약간 줄어들게 만든 것 같고, 심지어 이 실험적인 치료법이 두 개의 암에 동시에 작용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보다 환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쉬웠다. 감정적이 되거나, 격해지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덜했다.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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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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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곡성>을 봤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이거 뭐지'라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곡성> 리뷰를 찾아 읽었다. 리뷰를 읽고 내가 정확히 해석하지 못한 서사와 은유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음 날 <곡성>을 한 번 더 봤다. 영화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그러리라 믿고 싶다 흑흑)은 책을 읽고 또는 영화를 보고 정확한 의미를 몰라 그저 감탄만 하곤 한다. 그야말로 '무력한 감탄의 주체'인 셈이다. 


신형철은 좋은 해석이 심오한 인식을 이끌고, 그 인식이 다시 작품을 심오하게 만든다고 말하며 해석의 세 단계 중 첫 단계인 사실 관계 확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읽으려는(보려는) 노력은 좋은 해석으로 가는 첫 단계가 된다. 그렇다면 왜 정확하게 읽어야 하는가.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란 말이 그의 대답이다. 사랑이란 말이 너무 무겁다고 느끼면 이해란 말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인물의 개별성을 손쉽게 보편성으로 치환하는 것을 경계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비평이라 말한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의심은 정확하다. 요즘은 텍스트를 넘어 타인에 대한 쉬운 단언마저 종종 목격하니 말이다. 영화와 문학이 삶과 떨어지지 않는 (적어도 일부분을 접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야기를 접한 후 스스로에게 그것을 적용시키고 이렇게 질문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정확하게 이해받고 있는가. 나는 너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신형철은 한 영화를 대여섯 번 보고, 일주일 동안 그것에 대해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머리말의 마지막에서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라 썼다. 난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정확히 읽으려는, 정확히 쓰려는, 정확히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은 내가 해보지 않은 것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서평 종종 쓰지만 정작 정확히는 읽지 못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이 반성했다. 얼마큼 읽고 겪어야 저렇게 쓸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요원하다. 다가갈 수 없는 경지의 뇌섹남이다. 그저 질투만 난다. 제길 난 짜파게티만 정확하게 끓일 줄 아는데. 면 다 익힌 다음 물 버리고 스프 비벼 먹는 사람들에게 짜파게티를 정확하게 끓이라고 꼰대질이나 해야겠다.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사랑은 질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과 더불어 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은 스피노자가 말한 두 가지 방향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커지거나 작아진다. 내 안에 비어 있다 생각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커지거나, 채워져 있다 생각한 부분이 사실은 비어 있었음을 깨달으면서 작아지거나, 후자의 변화,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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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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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누군가에게 사과한 적이 언제였던가. 사소한 사과는 생각나지만 큰 사과는 기억나지 않는다. 큰 죄를 지은 적은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속죄는 선행하는 죄가 있어야 성립된다. 그러나 간혹 이유 없이 일단 사과하고 본 적은 없었는가?


소설의 두 주인공 시봉과 진만(나)은 사회 복지 시설에서 성장한다. 말이 복지 시설이지 모자라고 없는 사람들을 가둬놓고 강제 노역 시키는 못된 시설이다. 이곳의 두 복지사는 시시때때로 시봉과 진만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복지사는 폭력을 행사하며 '네 죄가 뭔지 아냐고' 묻고 죄를 고백하길 강요한다. 시봉과 진만은 없는 죄이지만 그것을 고백하면 고백하지 않을 때보다 덜 맞는다는 걸 알고 죄를 고백한다. 


이후 시봉과 진만은 복지사들의 명령에 따라 원생들의 죄를 찾아내 대신 사과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복지사들의 명령을 넘어선다. 복지사들에게 자신을 때려달라고, 그것으로 사과가 완성된다고 말한다. 흠씬 맞는 그들은 마음이 편하고, 또 한편 우쭐하기까지 한 기분을 느낀다. 원생들은 죄를 대속하고 대신 맞는 그들을 향해 죄의식을 느끼고 울며 무릎 꿇기까지 한다. 그런 원생들에게 그들은 "또, 뭐 다른 죄는 없나요?"라고 묻는다. 그들은 기묘하지만 흡사 예수와도 같다.  


시설의 정체가 드러나 원장과 복지사들이 구속되고 시봉과 진만은 사회로 나와 대신 사과하는 일을 시작한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죄지은 게 없느냐며, 잘 생각해보라며 사과를 강요한다. 그들에게 사과를 강요받는 사람들은 처음엔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만 점점 마음속에서 자신의 사소한 죄를 키우기 시작한다. 사과를 강요받던 사람들은 정말로 큰 오류를 저지르고 망가진다. 


시봉과 진만은 없는 죄를 고백한 다음엔 그 죄목을 반드시 실천한다. 개새끼야라고 욕했다는 거짓 고백 후 맞은 그들은 진짜 개새끼야라고 뒤에서 욕을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설 속 세계에서 일반적인 죄와 속죄의 과정(죄 → 속죄 → 용서)이 역전되어 있다. 속죄로서 죄가 증명되고, 그 죄는 반드시 폭력으로 응보 된다. 복지사들이 이유 없는 폭력이 불합리한 세계를 창조했다면 시봉과 진만의 폭력으로 속죄하는 방식은 불합리한 세계를 완성시킨다. '죄는 모른척해야 잊혀지는 법 (215)' 인데 '죄는 많고도 많으니까 (92)' 사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선 어떤 실패가 목격되면 반드시 누군가의 책임을 묻는다. 사회의 잘못이 개인의 잘못으로 환원되고, 개인은 그 잘못을 사과해야 한다. 이 소설은 희생양을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풍자다. 없는 죄를 고백해야 하고, 어쩔 땐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소설 밖의 이야기를 잠깐만 하자. 최근 한 간호사가 췌장 수술을 마친 환자의 생징후를 의사 지시대로 1시간마다 체크하지 못했다가 환자를 사망하게 만들었고, 다른 간호사는 항구토제 대신 근이완제를 주사하여 환자가 사망케 하였다. 저수가 의료체계에서 한 명의 간호사가 감당해야 하는 능력 밖의 업무를 반복하다 생긴 일이다. 인간이 하는 일에 완벽은 없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들의 유죄는 맞지만 그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구조 안에 있었다. 이 세상에선 세상이 만든 많고도 많은 죄 중 하나를 개인이 속죄해야 한다. 다시 소설 안으로 들어올까. 마지막 장면에선 진만이 시연을 업고 병원 밖으로 나선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지만, 병원 십자가는 높은 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인간은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은 '앞으로도 계속 사과를 하며 살아갈 것 (179)'이다. 

처음, 복지사들은 우리가 원생들 대신 사과할 때마다, 우리를 칭찬해주었다.
"그렇지, 이 자식들아. 너희들이 그런 걸 우리한테 먼저 말해줘야지."
"잘하네, 반장. 우리가 반장 하난 잘 뽑았어!"
복지사들은 그렇게 말한 후, 우리에게 이제 그만 가보라고 말했다. 앞으로도 계속 수고하라며 우리 머리를 쓰다듬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시봉과 나는 계속 복지사들 앞에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뭐야, 더 할 말이 있는 거야?"
"왜 그러는데?"
우리는 말했다.
"그냥 보내시면 어떡해요?"
"그러면 대신 사과하는 게 아니잖아요?"
시봉과 나는 계속 복지사들에게 말했다.
"우리를 그냥 보내면 그건 고자질이 되고 말잖아요."
"사과를 받으셔야죠."
"우리를 우리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시봉과 내가 그렇게 번갈아서 말하자, 키 큰 복지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우리의 뺨을 세게 한 대씩 때렸다.
"에이, 씨발. 말 좆나 많네. 그럼 우리 보고 뭘 어쩌라는 거야!"
시봉과 나는 맞은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 말했다.
"바로 그거예요! 우리를 더 때려주세요! 그래야 대신 사과가 되지요!" 8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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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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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동안 한 시간씩 두 번이나 잤으니 정말로 피로한 책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 공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철학 전공을 한 한병철 교수가 썼고,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후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됐다. 번역본이다 보니 '것'을 남발하는 문체가 거슬린다.


저자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고 말한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세기로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가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시대였다. 반면 요즘 시대는 이런 부정성의 과잉 상태가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 상태가 병리적 상태를 빚는 성과 사회라 말할 수 있다. 면역학적 시대는 규율과 부정성이 광인과 범죄자를 낳은 반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든다. 즉, 요즘을 살아가는 성과주체는 타자 또는 다른 세계와 투쟁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전쟁 상태에 있으며, 그로 인해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는 말이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두 시간이나 존 게 부끄러울 정도로 책이 얇다. 얇은 책 속에 반복되는 이야기는 현대인이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후기 근대적 성과사회의 특유한 명령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는 내용이다. 완전히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내 직업 선택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의사가 되기로 결정된 순간은 사실상 수능 끝나고 원서를 집어넣을 때였지만 그땐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인생에 대한 큰 고민이 없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의 '선택'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권유와 시류에 인생이 쓸려갔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맞을 것이다. 많은 고민을 했을 때는 의사가 되어 일 년간 인턴 생활을 하고 전공을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환자를 볼 건지 말 건지. 환자를 본다면 바이탈을 다룰 건지 안 다룰 건지. 어차피 성적이 됐으면 피부과 했겠지만 (ㅎㅎ) 그럴 리 없었으므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냐는 고민이 전공 선택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의사란 '그래도 바이탈은 다룰 줄 아는' 의사였기 때문에 내과를 선택했다. 무의식중에 설정된 나의 이상적 자아는 이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피곤해도 환자에게 친절하고, 돈보다는 의료 윤리를 좇으며, 중환자에 매달리고, 환자와 고통을 나누는 의사. 이후의 삶이야 당연히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철저하게 깨닫는 시간이었으므로 난 그야말로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린 셈이었다 (ㅎㅎ). 그런 면에서 4년차 되기 전 3년간 겪은 고통의 삶은 남이 날 괴롭혔기 때문이 아니라 자학의 결과였다. 


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진 않았다. 난 아직도 한국이 면역학적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알레르기성 반응이 얼마나 많은가. 외국인, 다른 종교, 성 소수자. 모든 것을 공유해도 성별이 다르면 서로를 증오하기도 한다. 또한 많은 불행을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을 정도로 타인에게 집착하는 사회다. 한병철 교수가 사는 독일의 '피로 사회'가 차라리 낫다. 적어도 남이라는 이유로 죽이진 않으니까. 현학적인 서술도 그렇지만 많은 공감조차 할 수 없는 독일과 한국의 세태 차이가 느껴져 (독일은 분노조차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한병철 교수의 다른 책은 읽지 않을 듯 싶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장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차귀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2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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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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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내 기억이 생길 때부터 나는 늘 할머니와 함께였다. 어느 더운 날이었다. 나와 할머니는 북부 시장에서 도자기를 사서 들어오는 길이었다. 어린 나는 목이 말랐고 맛있어 보이는 오백 원짜리 하드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런데 할머니는 기어코 삼백 원짜리 아니면 안 된다는 게 아닌가. 그건 지금도 파는 스크류바였다. 할머니는 기어코 스크류바 한 개를 샀고 잔뜩 삐진 나는 그걸 한 입도 먹지 않았다. 결국 스크류바는 할머니 혼자 다 먹어야 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나는 분명히 애정을 기초로 한 관계였다. 단지 둘 다 고집이 셌을 뿐이었다 (ㅎㅎ). 훗날 나와 할머니는 가끔 스크류바 이야기를 하며 웃곤 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집에 가끔 내려가면 할머니는 내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셨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할머니와 나는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몇 년 지나 내가 취직했을 무렵엔 할머니에게 치매가 왔다. 할머니는 기억력이 매우 나빠졌고 내게 물었던 걸 또 묻곤 하셨다. 난 했던 말을 반복했고 그걸 지겨워했다. 난 못된 손자였다. 할머니는 삼년 후 돌아가셨다. 한가지 사실을 고백하면 할머니는 아버지의 새어머니였다. 그러므로 나와 할머니는 피가 섞이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배고파하는 나를 위해 즐겁게 국수를 삶으셨고, 늘 당신 주머니에서 천 원 한 장이라도 꺼내주시려 했다. 이런 할머니와 나를 혈연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2. 

사람은 언제 성장하게 될까? 이유 없이 맹목적인 관계가 가능할까? 아랍 소년 모모는 유태인 아주머니 로자에게 양육된다. 어머니 쪽에서 보내주던 양육비가 끊겼을 때도 로자는 모모를 내치지 않는다. 같이 자라던 아이들이 하나둘 떠나도 모모는 로자의 곁에 남는다. 로자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모모는 '완벽하게 죽고 싶다'는 로자의 말을 기억한다. 모모는 로자를 그녀의 동굴로 옮긴다. 모모는 삶의 비밀을 알게 되고 로자를 떠나보내면서 열 살에서 열네 살이 된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큰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사람은 고통으로부터 성장한다. 로자가 죽고 모모는 홀로 남겨졌지만 앞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모모는 '생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아는 소년이므로. 그리고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소년이므로. 미토르니히 조르겐. 


3.

할머니는 생전 소원대로 화장되지 않은 채 할아버지 곁에 묻혔다. 삽으로 흙을 떠서 관 위로 던질 때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도 같이 묻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원묘지의 하늘은 파랗고 잔디의 연두색은 선명했다. 그제야 어떤 관계는 이유 없이 맹목적일 수 있음을 알았다. 가끔 내 앞의 생이 팍팍해지면 혓바닥이 빨개지도록 스크류바가 먹고 싶어진다.

육십 년 전쯤, 내가 젊었던 시절에 말이야, 한 처녀를 만났단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여덟 달 만에 끝장이 났어. 그런데 육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거든. 그때 나는 그 처녀에게 평생 잊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어.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도 잊지 않고 있단다. 사실, 가끔씩 걱정이 됐지. 살아가야 할 날이 너무 많았고, 더구나 기억을 지워버리는 지우개는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니, 보잘것없는 인간인 내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니? 그런데 이제 안심이구나. 나는 죽을 때까지 자밀라를 잊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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