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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전공의 3년차 종양 내과 파트를 돌 때 난소암 말기 할머니를 맡은 적 있었다. 보호자들이 집에서 보살피기 어렵다는 이유로 환자는 대학 병원에 왔다. 사실 병원은 환자에게 요양 목적으론 그리 좋은 공간이 아니다. 내성균에 의한 원내 감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할머니는 열이 났고 나는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검사를 시행했다. 발열 원인은 자발성 세균성 복막염이었다. 말기 암환자였지만 감염으로 생이 더 짧아져선 안될 것이기에 항생제 치료를 시작했다. 항생제 외에도 복수와 말초 부종을 조절하기 위해 이뇨제가 투여되는 터라 환자의 콩팥 수치는 불안정했다. 나는 염증 수치와 콩팥 수치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혈액 검사를 이틀에 한 번 냈다. 교수님은 치료의 큰 방향만 결정하지 3년차의 세세한 오더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므로 이건 환자를 좀 더 정교하게 치료하기 위한 나의 판단이었다. 할머니는 이틀에 한 번 채혈 당했다. 그러던 중 할머니의 구역질이 심해졌다. 장 마비를 생각했고 일차 감압을 위해 L-tube를 삽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노련한 늦가을 인턴 선생이 L-tube 삽입에 실패하는 게 아닌가. 몇 번을 시도해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병동에 가서 직접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병동을 지나가던 종양 내과 주임 교수님도 직접 시도해보셨지만 그 또한 실패였다. 주임 교수님은 일단 오늘은 이대로 놔두자 말씀하시고 나를 스테이션 컴퓨터 앞으로 데려간 후 말씀하셨다. 차트 열어보자. 환자의 차트와 검사 결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환자의 담당의가 아니었던 주임 교수님은 그것들을 찬찬히 살펴보신 후 몇 가지 이유로 식도 협착이 왔을 수도 있겠단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셨다. 왜 피를 이렇게 자주 뽑는 거지? 할머니가 속으로 무슨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차라리 자길 죽여달라고 생각하고 있을걸.
사람들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걸 모두 알지만, 정작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에도 끝까지 삶만을 생각하는 게 인간이다. 환자는 물론이고, 환자의 가족, 심지어 의료진도 예외가 아니다. 외과 의사인 저자는 주변인들과 아버지의 죽음을 회고하며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말한다. 현대 의학의 발전은 예측하지 못한 급격한 죽음을 줄였지만 느리고 완만한 죽음을 늘리기도 했다. 느리고 완만한 죽음이란 곧 고통의 시간도 길다는 뜻이다. 불행히도 이 고통이란 환자의 고통만 뜻하지 않는다. 신체 기능이 매우 떨어져 있는 노인들이 집에서 지낼 때 병수발하는 가족들의 고통 또한 커진다. 그런 이유로 가족들은 노환을 겪는 부모를 요양원에 맡긴다. 요양원에선 노인 환자의 건강을 해칠만 한 요소를 통제한다. 그곳에선 식사, 간식, 운동, 취미 활동, 개인의 삶 모두 제한된다. 요양원 생활을 하는 노인 환자들의 우울증이 늘어난다. 심지어 그런 방식으로 더 나은 삶을 보장받지도 못한다. 기존 요양원의 이런 문제점을 인지한 사람들이 새로운 모델의 요양원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곳에선 병든 노인일지언정 개인의 삶이 존재하고, '원한다면 피자나 초콜릿을 먹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건강의 기계적 관리가 아니다. 노인 환자들의 삶에서 중요한 관계와 기쁨을 어떻게 유지할지 고민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늙어서도 삶을 의미 있게 살도록'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저자의 아버지도 의사였지만 척수 종양에 걸린 후 자신의 치료를 두고 큰 혼란을 겪는다. 불치의 암 앞에선 평생을 의사로 살아온 사람도 그저 평범한 일반인이 되어버린다. 항암치료나 고식적 수술로 생존 기간이 늘어나고 신체 기능이 좋아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존 기간의 이득도 얻지 못하고 신체 기능도 이전보다 떨어질 수도 있다. 이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까지 환자와 보호자와 의사들은 대부분 최선의 결과만 상상하며 치료를 시작하고, 실패하면 방법을 바꾸고, 환자가 죽을 때까지 무엇이든 시도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저자는 이러한 의학적 충동을 '관성'이라고 비판하며 무조건적인 질병의 치료보단 환자가 원하는 걸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가령 사지마비의 가능성이 있는 수술을 앞두고 어떤 환자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미식축구 경기를 볼 수 있다면 나름 행복한 여생이니 수술을 시행하자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어떤 환자는 생존 기간 연장 가능성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몸에 대한 통제권을 놓지 않길 원하므로 수술을 거부할 수도 있다. 환자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인지, 그걸 이뤄 내기 위해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358)'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어야 한다. 이런 노력으로 닿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앞서 말한 난소암 할머니 이야기를 마저 하자면, 이후 나는 할머니의 혈액 검사를 줄여나갔다. 감염이 잘 조절되었으므로 운이 따르기도 한 결과다. 이후 어찌어찌 코로 관을 다시 넣었고, 그걸 잘 유지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고향 익산의 요양병원으로 전원 갔다.
본과 2학년 때 눈물 콧물 짜며 보던 <하얀 거탑>은 지금 생각하면 순 엉터리 병원 정치 드라마지만, 여전히 좋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 병리과 교수로 분했던 변희봉은 이렇게 말한다. "최교수, 명백히 죽음의 징후를 보이는 환자에게 과도한 시술을 행하는 건 환자가 안락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가 될 수 있어. 삶의 마지막을 보내기에 병원은 적당한 장소가 아니지. 그... 진주라는 꼬마에게 진통제보다는 아이스크림 하나가 더 위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난소암 할머니에게 아이스크림은 아무래도 무리였겠지만 콧줄 대신, 정맥 영양 대신, 이뇨제 대신, 항생제 대신, 대학 병원 대신 더 좋은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린 환자의 신체를 전장 삼아 질병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저자는 환자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끝까지 살아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의사의 새로운 역할이라고 말하는데, 당시의 나는 환자에게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길 바라는지 물어본 적 없었다. 그걸 내 역할이라 생각한 적조차 없었다. 난소암 할머니에게 마지막까지 좋은 삶을 산다는 건 뭐였을까. 모른다. 고향에 있는 요양 병원에선 자녀와 손주들 얼굴을 하루라도 더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한 치료의 종착지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환자의 마지막 좋은 삶이 고작 그런 것이라 생각하면 지금도 무안해진다.
무엇이든 시도해 볼 준비가 되어 있는 새라를 대하면, 나는 어느새 그녀의 폐암과 관련된 실험적인 치료법을 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녀에게 적용한 화학요법 중 하나가 갑상선암을 약간 줄어들게 만든 것 같고, 심지어 이 실험적인 치료법이 두 개의 암에 동시에 작용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기까지 했다. 그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보다 환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쉬웠다. 감정적이 되거나, 격해지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덜했다. 2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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