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지음 / 마음산책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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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곡성>을 봤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이거 뭐지'라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곡성> 리뷰를 찾아 읽었다. 리뷰를 읽고 내가 정확히 해석하지 못한 서사와 은유를 겨우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다음 날 <곡성>을 한 번 더 봤다. 영화를 더 '정확히'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그러리라 믿고 싶다 흑흑)은 책을 읽고 또는 영화를 보고 정확한 의미를 몰라 그저 감탄만 하곤 한다. 그야말로 '무력한 감탄의 주체'인 셈이다. 


신형철은 좋은 해석이 심오한 인식을 이끌고, 그 인식이 다시 작품을 심오하게 만든다고 말하며 해석의 세 단계 중 첫 단계인 사실 관계 확인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읽으려는(보려는) 노력은 좋은 해석으로 가는 첫 단계가 된다. 그렇다면 왜 정확하게 읽어야 하는가.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란 말이 그의 대답이다. 사랑이란 말이 너무 무겁다고 느끼면 이해란 말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인물의 개별성을 손쉽게 보편성으로 치환하는 것을 경계하고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비평이라 말한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해석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의심은 정확하다. 요즘은 텍스트를 넘어 타인에 대한 쉬운 단언마저 종종 목격하니 말이다. 영화와 문학이 삶과 떨어지지 않는 (적어도 일부분을 접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야기를 접한 후 스스로에게 그것을 적용시키고 이렇게 질문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정확하게 이해받고 있는가. 나는 너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신형철은 한 영화를 대여섯 번 보고, 일주일 동안 그것에 대해 글을 썼다고 한다. 그는 머리말의 마지막에서 그녀를 정확히 사랑하는 일로 남은 생이 살아질 것이라 썼다. 난 이런 문장을 쓸 수 있는 그가 부러웠다. 정확히 읽으려는, 정확히 쓰려는, 정확히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은 내가 해보지 않은 것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서평 종종 쓰지만 정작 정확히는 읽지 못했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많이 반성했다. 얼마큼 읽고 겪어야 저렇게 쓸 수 있을까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요원하다. 다가갈 수 없는 경지의 뇌섹남이다. 그저 질투만 난다. 제길 난 짜파게티만 정확하게 끓일 줄 아는데. 면 다 익힌 다음 물 버리고 스프 비벼 먹는 사람들에게 짜파게티를 정확하게 끓이라고 꼰대질이나 해야겠다.

사랑을 받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타인의 사랑은 질문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이 질문과 더불어 내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서서히, 어떤 일이 벌어진다. 그 일은 스피노자가 말한 두 가지 방향을 따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커지거나 작아진다. 내 안에 비어 있다 생각한 부분이 채워지면서 커지거나, 채워져 있다 생각한 부분이 사실은 비어 있었음을 깨달으면서 작아지거나, 후자의 변화, 즉 타인의 사랑이 내가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결여를 인지하도록 이끄는 것, 바로 이것이 나로 하여금 타인의 사랑에 응답하게 만드는 하나의 조건이 된다. 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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