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1.

아버지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내 기억이 생길 때부터 나는 늘 할머니와 함께였다. 어느 더운 날이었다. 나와 할머니는 북부 시장에서 도자기를 사서 들어오는 길이었다. 어린 나는 목이 말랐고 맛있어 보이는 오백 원짜리 하드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런데 할머니는 기어코 삼백 원짜리 아니면 안 된다는 게 아닌가. 그건 지금도 파는 스크류바였다. 할머니는 기어코 스크류바 한 개를 샀고 잔뜩 삐진 나는 그걸 한 입도 먹지 않았다. 결국 스크류바는 할머니 혼자 다 먹어야 했다. 그러나 할머니와 나는 분명히 애정을 기초로 한 관계였다. 단지 둘 다 고집이 셌을 뿐이었다 (ㅎㅎ). 훗날 나와 할머니는 가끔 스크류바 이야기를 하며 웃곤 했다.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집에 가끔 내려가면 할머니는 내 생활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셨다. 나이는 들었지만 여전히 할머니와 나는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몇 년 지나 내가 취직했을 무렵엔 할머니에게 치매가 왔다. 할머니는 기억력이 매우 나빠졌고 내게 물었던 걸 또 묻곤 하셨다. 난 했던 말을 반복했고 그걸 지겨워했다. 난 못된 손자였다. 할머니는 삼년 후 돌아가셨다. 한가지 사실을 고백하면 할머니는 아버지의 새어머니였다. 그러므로 나와 할머니는 피가 섞이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배고파하는 나를 위해 즐겁게 국수를 삶으셨고, 늘 당신 주머니에서 천 원 한 장이라도 꺼내주시려 했다. 이런 할머니와 나를 혈연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2. 

사람은 언제 성장하게 될까? 이유 없이 맹목적인 관계가 가능할까? 아랍 소년 모모는 유태인 아주머니 로자에게 양육된다. 어머니 쪽에서 보내주던 양육비가 끊겼을 때도 로자는 모모를 내치지 않는다. 같이 자라던 아이들이 하나둘 떠나도 모모는 로자의 곁에 남는다. 로자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모모는 '완벽하게 죽고 싶다'는 로자의 말을 기억한다. 모모는 로자를 그녀의 동굴로 옮긴다. 모모는 삶의 비밀을 알게 되고 로자를 떠나보내면서 열 살에서 열네 살이 된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낼 때 큰 고통을 느낀다. 그러나 사람은 고통으로부터 성장한다. 로자가 죽고 모모는 홀로 남겨졌지만 앞으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모모는 '생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아는 소년이므로. 그리고 이렇게 말할 줄 아는 소년이므로. 미토르니히 조르겐. 


3.

할머니는 생전 소원대로 화장되지 않은 채 할아버지 곁에 묻혔다. 삽으로 흙을 떠서 관 위로 던질 때 할머니와 함께 했던 유년도 같이 묻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원묘지의 하늘은 파랗고 잔디의 연두색은 선명했다. 그제야 어떤 관계는 이유 없이 맹목적일 수 있음을 알았다. 가끔 내 앞의 생이 팍팍해지면 혓바닥이 빨개지도록 스크류바가 먹고 싶어진다.

육십 년 전쯤, 내가 젊었던 시절에 말이야, 한 처녀를 만났단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여덟 달 만에 끝장이 났어. 그런데 육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거든. 그때 나는 그 처녀에게 평생 잊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어.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도 잊지 않고 있단다. 사실, 가끔씩 걱정이 됐지. 살아가야 할 날이 너무 많았고, 더구나 기억을 지워버리는 지우개는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니, 보잘것없는 인간인 내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니? 그런데 이제 안심이구나. 나는 죽을 때까지 자밀라를 잊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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