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는 동안 한 시간씩 두 번이나 잤으니 정말로 피로한 책이다. 이 책은 한국에서 공대를 졸업하고 독일로 건너가 철학 전공을 한 한병철 교수가 썼고, 독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후 한국어로 번역되어 출판됐다. 번역본이다 보니 '것'을 남발하는 문체가 거슬린다.


저자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고 말한다. 지난 세기는 면역학적 세기로 아무런 위험을 초래하지 않는 타자가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시대였다. 반면 요즘 시대는 이런 부정성의 과잉 상태가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 상태가 병리적 상태를 빚는 성과 사회라 말할 수 있다. 면역학적 시대는 규율과 부정성이 광인과 범죄자를 낳은 반면, 성과 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든다. 즉, 요즘을 살아가는 성과주체는 타자 또는 다른 세계와 투쟁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전쟁 상태에 있으며, 그로 인해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는 말이다.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두 시간이나 존 게 부끄러울 정도로 책이 얇다. 얇은 책 속에 반복되는 이야기는 현대인이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후기 근대적 성과사회의 특유한 명령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괴롭힌다는 내용이다. 완전히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내 직업 선택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의사가 되기로 결정된 순간은 사실상 수능 끝나고 원서를 집어넣을 때였지만 그땐 뭐가 뭔지도 모르고 인생에 대한 큰 고민이 없었으므로 엄밀한 의미의 '선택'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권유와 시류에 인생이 쓸려갔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맞을 것이다. 많은 고민을 했을 때는 의사가 되어 일 년간 인턴 생활을 하고 전공을 결정하는 순간이었다. 환자를 볼 건지 말 건지. 환자를 본다면 바이탈을 다룰 건지 안 다룰 건지. 어차피 성적이 됐으면 피부과 했겠지만 (ㅎㅎ) 그럴 리 없었으므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냐는 고민이 전공 선택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의사란 '그래도 바이탈은 다룰 줄 아는' 의사였기 때문에 내과를 선택했다. 무의식중에 설정된 나의 이상적 자아는 이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피곤해도 환자에게 친절하고, 돈보다는 의료 윤리를 좇으며, 중환자에 매달리고, 환자와 고통을 나누는 의사. 이후의 삶이야 당연히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철저하게 깨닫는 시간이었으므로 난 그야말로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린 셈이었다 (ㅎㅎ). 그런 면에서 4년차 되기 전 3년간 겪은 고통의 삶은 남이 날 괴롭혔기 때문이 아니라 자학의 결과였다. 


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진 않았다. 난 아직도 한국이 면역학적 시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알레르기성 반응이 얼마나 많은가. 외국인, 다른 종교, 성 소수자. 모든 것을 공유해도 성별이 다르면 서로를 증오하기도 한다. 또한 많은 불행을 타인과의 비교에서 찾을 정도로 타인에게 집착하는 사회다. 한병철 교수가 사는 독일의 '피로 사회'가 차라리 낫다. 적어도 남이라는 이유로 죽이진 않으니까. 현학적인 서술도 그렇지만 많은 공감조차 할 수 없는 독일과 한국의 세태 차이가 느껴져 (독일은 분노조차 줄어들고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 한병철 교수의 다른 책은 읽지 않을 듯 싶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점에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와 구별된다. 그러나 지배기구의 소멸은 장로 이어지지 않는다. 소멸의 결과는 자유와 강제가 일치하는 상태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차귀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이러한 자기 관계적 상태는 어떤 역설적 자유, 자체 내에 존재하는 강제구조로 인해 폭력으로 돌변하는 자유를 낳는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29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