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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용광로에 추락해 비명횡사한 젊은 넋을 추모하는 시 <그 쇳물 쓰지 마라>로 유명한 댓글 시인 제페토의 첫 시집이다. 시집은 3부로 구성됐다. 1부와 2부는 실제 기사와 시가 묶였고, 3부는 기사 없는 시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대개의 시에서 (설령 참여시라도) 시가 그리는 구체적인 풍경은 독자가 상상해야 한다. 그것이 시의 묘미지만, 대상이 모호한 시가 시적 설득에 실패한다면 시는 미지의 언어로 휘발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시가 모든 독자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가 실재와 유리됐다는 느낌을 주면 아무리 감각적인 시라도 시에 감정을 이입하긴 쉽지 않다.
제페토의 시는 기사와 맞물리면서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낸다. 그의 시는 '시'가 아니라 '기사/시'이다. 현실이 시와 맞물릴 때 독자는 시적 세계(그러나 현실)에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있다.
언뜻 윤리적으로 보이는 이런 시의 형식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가령 <그 쇳물 쓰지 마라>는 젊은 넋을 위로하는 듯 보이지만 냉정히 말하면 시는 독자의 탄식을 이끌어낼 뿐 죽은 사람에게 결코 닿지 않는다. 다행히 제페토는 이런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은 고릴라에 대한 시 <고리롱>에서는 '애도니 넋이니 그거 말장난 (51)'이라고 말한다. 시가 섣부른 애도로 변하여 '스스로 거룩해지는 실수 (6)'를 범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형식의 한계-시는 결코 아픔을 직접 치유할 수 없다-를 그는 어떻게 극복할까. 60살 넘어 점자를 배우기 시작한 시각 장애인에 대한 시 <명치>에선 '가을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라고 읽는 일/ 골목길에서 수없이 울었다, 라고 읽는 일/ 딸이 세상을 떠났다, 라고 읽는/ 그런 일 말입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어서 그는 묻는다. '손끝에 만져지는 슬픔이란/ 어떤 느낌입니까/ 혹시 잠 못 드는 밤/ 명치끝에 만져지는 그것은/ 따님의 이름입니까'. 그는 보이지 않는 절대적 암흑의 세계를 쉽게 위로하지 않는다. 단지 짐작하려 애쓸 뿐이다. 가을여행을 떠날 수 없었던, 골목길에서 울었으나 결코 겉으로 울음을 보일 수 없었던, 딸이 세상을 떠났다고 읽을 수 없었던 세계를 겨우 짐작하여 묻는다. 철판에 깔려 숨진 노동자에 대한 시 <나는>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역군 아닌데/ 종현이 아버지인데/ 지수 씨 남편인데/ 썩 괜찮은 아들인데// 나는 사람인데'. 한 사람의 죽음이 산업 재해라는 네 음절로 줄여질 때, 그 단어는 폭력으로 기능한다. 죽은 사람은 역군이 아니라 끝까지 사람이었다는걸, 사람이어야 한다는 걸 말한다.
그는 '예뻐서 혐오스러운 (53)' 세계를 해체하여 자칫 쉽게 잊히고 말 슬픔의 순간을 시로 박제한다. 기사에서 보이지 않는 사연이 시로 보충됐을 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신 말할 때, 보편적인 아픔은 시적 언어를 통해 개별화된다. 아픔을 개별화하려 노력할 때 시는 고리롱의 가식적인 박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 된다. 고작 문장 몇 줄일 뿐인 시가 세상을 치유하기란, 죽은 이를 위로하기란 끝까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우리가 치유는 하지 못해도, 잊지는 말자고 말하는 듯 보인다.
윤리적 발화가 시의 전부는 아니다. 단지 언급을 안 했을 뿐, 그의 시는 윤리성의 측면을 떼놓고 봐도 충분히 좋아 보인다. 시집의 3부는 기사 없는 시 단독의 모음이다. 시가 좋은 이유를 굳이 분석하며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내 지식과 언어는 시를 평가하긴 부족하니, 섣부른 평가보단 그저 같이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다. 그저 읽고 느끼는 것만으도 충분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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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너의 얼굴 잊혀간다는 것이
눈물 날 만큼 두려웠다
첫 키스 나누었던
카페 겨울나그네
그날 밤 우리는 무얼 했던가
손잡고 지하상가를 걸었던가
어쨌든 그 시절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사랑도 그러하리라 믿었기에
길 위에 조금 흘린다 해도 아까울 리 없었다
이제는 아득해졌다
어떤 날엔 안주 없이 독한 술을 들이켜고
꼴사나운 자해를 했는데
그러면 까맣게 잊었던 사소한 추억이
비질비질 상처로부터 흘렀다
그랬었지, 하고 씁쓸한 미소로 잔을 들다가도
행여 잊혀질까 두려워
오른쪽 넓적다리뼈에 깊은 음각으로 새겼다
그러나 우리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는
가슴 치며 무너졌다
비틀거리며 자정의 천변에 불을 지르고
성당 문을 걷어차며 신을 모독했다
돌아오는 재개발 주택가 골목길.
나는 엄습한 부끄러움에 뺨을 치고
희뿌연 허공에 부탁하듯 다짐했다
술 깨는 아침에는
지난밤 아무 일 없던 것으로 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