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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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두 번째 읽는다. 처음 읽었을 땐 혼란해서 서평을 쓸 수 없었다. 액슬러의 삶에 나를 이입할 수 없었다. 내게 액슬러가 겪었던 것 같은 시련이 찾아온다면 난 어떻게 될까? 내가 밥 벌이할 수 있게 하는 자격 같은 게 말소된다면. 방에서 소주 병나발 불며 폐인이 되었을까? 아아 혼란스럽고 상상하기도 싫다.


액슬러는 첫 좌절 ― 연기력 소멸 ― 로 완전한 몰락은 겪지 않는다. 자신의 직업 정체성을 잃어버렸지만, 65세이고 모아놓은 재산이 넉넉했으므로 순순히 은퇴를 받아들인다. 이어 그는 페긴을 만나고 삶을 새로운 성적 모험으로 던진다. 중요한 건 두 번째 좌절이다. 그는 두 번째 좌절을 이겨내지 못했다. 레즈비언이었던 페긴을 여성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의 성적 모험 ― 레즈비언과의 쓰리섬 ― 은 페긴을 다시 레즈비언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성(姓) 적 자신감이었으나 결과적으론 패배한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과 아이를 가지는 상상까지 했던 그는 그녀를 여성에게 뺏기고 만다. 남성성의 몰락이다. 그에겐 남은 게 없다. 낮은 곳에서의 추락은 바닥에 닿는 시간이 더 짧다. 그는 죽고 싶어 했으나 죽음은 결코 쉽지 않다. 죽고 싶어 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15p)였으므로. 그의 생이 그랬던 것처럼 자살도 완벽한 연기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자신에게 명성을 안겨준 연극 「갈매기」의 자살하는 주인공으로 돌아간다. 


정해진 운명과 싸우기도 쉽지 않은데 예고 없는 불행은 오죽할까. 삶이 저무는 데 예고는 없다. 그러나 필연적이다. 주인공이 조금만 더 초연했더라면, 안타깝다. 하지만 나도 전락을 이겨낼 자신은 없다. 필립 로스는 한 인간이 완벽하게 전락하는 과정을 무심하게 서술한다. 에로티시즘의 묘사는 거침없다. 광기마저 엿보인다. 폭발하는 종반부에선 마지막 혼신의 연기가 완벽한 전락과 등가 치환된다. 연기자로의 부활은 자신의 소멸이다. 삶은 이율배반적이다.

밤이면 그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고 자신의 재능도, 이 세상에서의 자기 자리도, 자신의 본모습까지도 박탈당한 남자의 역할에 갇힌, 결점만 줄줄이 모아놓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혐오스러운 남자의 역할에 여전히 갇힌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아침마다 그는 몇 시간씩 침대에 숨어 있곤 했는데, 그런 역할에서 숨는다기보다는 단순히 그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살에 대한 게 전부였지만, 그것을 흉내내지는 않았다.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였으니까. 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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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의 제왕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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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은밀하고 부끄럽다. 진짜 치부는 쉽사리 드러내지 못한다. 남에게 그것을 보여줄 땐 최소한의 포장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곽의 고백은 은밀하지도 부끄럽지도 않고 최소한의 포장도 없는 날것이다. 고백의 일반적 속성을 무시한다. 곽의 무덤덤한 고백은 자신의 상처와 치부를 드러내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의 고백은 환갑이 넘은 아주머니와의 첫 경험에서 시작해 아버지를 칼로 찔렀던 불우한 가족사, 누이의 자살까지 이른다. 그 속에는 부끄러움도 분노도 없다. 그 고백을 마주한 사람들은 불편함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낀다. 찝찝한 불쾌함을 느끼지만 결국은 탐닉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더럽고 흉측한 나신을 마주하고 눈 둘 곳이 없지만 그 나신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놀라움으로 눈을 뗄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불편함을 오랫동안 좌시하지는 않았다. 곽은 술자리에서 동기가 짝사랑하던 J와의 갑작스러운 정사와 J의 임신을 고백한다. 찝찝한 불편함은 이내 질투와 적의로 폭발한다. 이후 곽은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다시 그를 찾는다. 모임이 아니라 각자 만나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면서. 아이러니하게, 곽을 밀어내게 만든 찝찝한 고백을 자신들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포장되지 않은 진짜 고백을 말이다. 진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는 내밀한 속을 아무렇게나 드러내는 곽 말고는 없었으므로. 이렇게 고백은 또 다른 고백을 이끌어내고 사람들은 곽에 대한 혐오만이 아니라 동경까지 아우른 양가감정을 가지게 된다.

 

동기의 장례식 가는 택시 안에서 다시 곽의 입술이 열린다. 또 무엇인가를 고백하려는 것처럼. 곽의 벌어진 입은 마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커먼 동굴과 같다. 그 동굴을 통해 쉽게 고백하곤 하지만 진짜 고백은 하지 못 했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그 입에 고요한 살의를 느끼면서. 우리는 진짜 고백을 하고 싶은 걸까, 그게 두려운 걸까. 아니면 둘 다일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의 고백에 이끌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자기 자신에게 탐닉할 때 느껴지는 집중력으로 매번 곽의 이야기를 경청했던 것은, 바로 우리였으니까 말이다. 이제 와서 고백하거니와, 나 역시 곽을 멀리 하면서도 곽에게 이끌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동아리 밖에서 곽을 만나 술을 마시고 곽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즐겼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곽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지껄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누군가에 대한 흠모나 적의이기도 했으며, 타인이 가진 허점에 대한 비루한 관심이기도 했다. 곽의 이야기는 건조하면서도 감상적이었고 잔인하면서도 달콤했는데, 그럴수록 나의 고백 역시 더욱 노골적이 되어갔다. 곽의 침묵이 나의 고백을 부추길 때, 나는 쾌감에 몸을 떨며 내 내밀한 모든 것을 곽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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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황제
김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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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서평 쓸 때 있어 보이게 쓰려고 하거나 내재적 의미를 찾기에만 급급하다가 정작 재밌다, 재미없다에 대한 이야기를 못할 때가 있었다. 사실 서평이 음식평은 아니라서 맛 평가하듯 쓰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무게 잡는 서평을 쓰고 훗날 그것을 다시 보면 재밌게 읽은 소설에 죄지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소설집에겐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서평을 이 말부터 시작할까? 재밌다. 너무 재밌다. 


김희선 작가는 현대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라면의 황제」로 알게 됐다. 소설은 라면이 유해 식품으로 지목되어 거의 마약 취급 받는 미래에서 과거 한 평생 라면만 먹은 남자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내용이다. 설정부터 작정한 B급 냄새가 폴폴 풍긴다. '일인당 라면 소비량이 많은 지역일수록 거주자의 월평균 소득이 감소한다'는 보고서를 시작으로 '어린 시절 라면 소비량과 명문대 진학률은 반비례한다'등의 조사 결과가 뒤를 잇기 시작하며 라면은 죄와 타락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급기야 라면 금지 법안이 통과되기에 이른다.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생각하는 세계에서 사라진 라면을 추종하는 점조직 비밀 결사 동호회(ㅋㅋ)가 생겨나고, 라면이 사라지기 전 27년간 라면만 먹었던 김기수 씨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기자가 점조직 비밀 결사 라면동호회 리더를 만난다. 김기수 씨는 왜 평생 라면만 먹었던 것일까? 직접 읽어보시길. 


작가는 대략 이런 식의 구라를 대놓고 걸쭉하게 풀어낸다. 거의 모든 소설에서 강원도 W 시가 등장하는데 춘천에서 태어나 강원대학교 약대를 졸업하고, 원주시에서 약사 생활을 했다는 그의 이력을 보면 소설 속 W 시는 원주시가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이기호도 원주시 출신인데, 원주엔 뭔가 재밌는 글을 쓰게 만드는 수맥이 흐르는 것 같다.    


이렇게 재밌는 구라들은 현실과의 기묘한 접점을 가진다. 「교육의 탄생」은 국민교육헌장 탄생의 비화를 사라진 천재 수학자의 생애와 연결한 음모론 소설이다. 국민교육헌장은 지금에야 외울 일이 없지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첫 구절은 한 번쯤 본 적 있을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이 처음 생겼던 시대의 국가는 개인에게 국가와의 동일시를 강요했다. 당시 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그러나 역시 의문이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그냥 태어났고 나 하나 잘 살길 바랄 뿐인데. 국민교육헌장은 역시 수상하다. 이때 문학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엄숙한 비판보단 우스운 상상을 진지한 포즈로 써 내려가는 것. 사라진 천재 수학자와 구소련 심리학자와 국민교육헌장의 사연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개굿이다. 


인간이 사라진 지구, 진품인지 가품인지 모를 페르시아 양탄자의 사연, 녹색 채소 외계인의 이야기, 말만 들어도 궁금하지 않은가? 흥미가 동한다면 사서 읽어 보시길.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 위엔 먼지가 내려앉아있었다. 그가 소설을 쓰다 말고 다시 약국에서 약을 팔까 봐 겁이 난다.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쓰는 양반은 계속 글을 써야 한다. 이상 한국 소설 애호가의 오지랖 걱정 서평이었다. 


그 이후 향토사학자는 인호군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라면동호회 본부(알고 보니 그 컨테이너 박스였다)가 경찰의 급습을 받아 와해됐다는 말도 있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어쨌든 거기서 경찰은 몇 개의 솥과 식용유 두 통, 그리고 밀가루 서너 포대 등을 증거물로 압수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라면이 사라졌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라면은 그 후로도 언제까지나 명맥을 이어갔고(지금도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이면 어딘가에서 라면 끓이는 냄새가 지표를 뚫고 피어올라 지나가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지 않은가) 김기수씨의 기일엔 매년 꽃이 놓였다. 물론 어쩌다가 간혹 놓이지 않는 해도 있었지만 말이다.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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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위의 세계 - 2012년 제4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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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가 없는 소설이다. 서사를 굳이 말하자면 미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체류한 경험뿐이다. 특별한 긴장을 불러오는 사건이 없다. 서사가 부재하는 자리는 사고(思考)가 채운다. 사변적 소설이 아니라 사변 그 자체, 정념 그 자체인 소설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화자는 정적이고 사고는 동적이다. 몸뚱어리가 머무는 동안 생각은 주변 사물과 인간을 따라 끊임없이 분열한다. 작가는 관찰에서 비롯된 생각의 모든 가능성을 탐색한다. 작가를 흉내 내서 평하면 이렇다. "이런 서술 방식은 매우 흥미롭기도 하고 흥미롭지 않기도 했다. 흥미롭지 않다는 생각에 대해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이전의 소설들과 다르게 사건보다 사고의 흐름을 좇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생각하니 이건 조금 특별한 글 같았고 그래서 흥미롭지 않다고 느낀 내 감정이 흥미로워졌다." 뭐, 이런 식의 '생각과 말의 어지러운 장난 (270)'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작가는 이런 고약한 서술 방식을 작정한 듯한데, 스스로 자신의 글을 '무색의 관념(126)',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139)', '생각의 익사체(209)' 등으로 정의한다. 이런 서술은 결론 없는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와 질문인데, 과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쓴 것일까? 작가는 소설 안에서 소설가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고 글에 개입한다. 따라서 이 소설은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메타 픽션)이다. 일상의 경험이 어떻게 사고로 전환되는지, 사고가 어떻게 문장으로 변환되는지에 대해 고백한다. 이건 일견 쉬운 고백이 아니라 일종의 고발로 느껴지기도 한다. 


일상의 경험을 글로 쓰는 습관을 들인 사람이거나, 규칙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실제의 경험이 글로 전환될 때의 왜곡을 경험한 적 있을 것이다. 가령 분노나 연민의 과장, 필요 이상의 타자 희화화 같은 것들. 그런 왜곡은 스스로 인식하지만 매끄럽고 좋은 글을 위해 용인하곤 한다. 왜곡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결국 쓰기 경험이 누적됨에 따라 왜곡을 인지하는 쪽으로 진행될 것이다. 왜곡이 심해질 때 글쓰기라는 행위(글 자체도)는 자칫 위험해질 수 있다. '의식과 감정을 조작하(190)'는 글쓰기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심하게 겪은 글은 실재가 아닌 '어떤 작위의 세계'가 된다. 


글이 완전한 상상의 결과물이라거나, 그것을 표방했을 때는 이런 고민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쓰는 사람은 일상의 경험을 항상 글쓰기의 재료로 인식하는 건 아닌지, '순간의 경험을 글로 옮기기에 유리하게 조작(190)'하는 건 아닌지 돌이켜봐야 한다. 특히 자전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라면 글이 경험을 훼손시키는 건 아닌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은 사고가 사방팔방 뻗어나가도록 내버려 두고, 그것이 그대로 문장으로 옮겨질 때의 현상을 보여준다. 독특한 방식으로 글이 생산되는 방식의 윤리를 고찰케 하는 실험적 소설이다. 그러나 자의식이 글과 하나가 될 때 글이 진정 가치 있게 되느냐. 꼭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글은 양식에 따라 저마다의 목적이 있고 경험과 글이 완전히 일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경험은 어떻게든 가공과 왜곡을 거칠 수밖에 없다. 다만 쓰는 사람은 그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글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되는지, 글 안의 타자보다 자신이 섣불리 우위에 서는 것은 아닌지를 늘 따져봐야 할 것이다.


아주 징그럽고 독한 소설이었다. 작가의 글처럼 어떤 누구의 글이라도 '어떤 작위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흥미가 동한다면 읽어도 좋지만 여전히 재미는 없으니 각오 단단히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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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쇳물 쓰지 마라
제페토 지음 / 수오서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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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광로에 추락해 비명횡사한 젊은 넋을 추모하는 시 <그 쇳물 쓰지 마라>로 유명한 댓글 시인 제페토의 첫 시집이다. 시집은 3부로 구성됐다. 1부와 2부는 실제 기사와 시가 묶였고, 3부는 기사 없는 시 단독으로 이루어졌다.


대개의 시에서 (설령 참여시라도) 시가 그리는 구체적인 풍경은 독자가 상상해야 한다. 그것이 시의 묘미지만, 대상이 모호한 시가 시적 설득에 실패한다면 시는 미지의 언어로 휘발되어버릴 가능성이 있다. 시가 모든 독자에게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가 실재와 유리됐다는 느낌을 주면 아무리 감각적인 시라도 시에 감정을 이입하긴 쉽지 않다. 


제페토의 시는 기사와 맞물리면서 하나의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낸다. 그의 시는 '시'가 아니라 '기사/시'이다.  현실이 시와 맞물릴 때 독자는 시적 세계(그러나 현실)에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있다. 


언뜻 윤리적으로 보이는 이런 시의 형식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가령 <그 쇳물 쓰지 마라>는 젊은 넋을 위로하는 듯 보이지만 냉정히 말하면 시는 독자의 탄식을 이끌어낼 뿐 죽은 사람에게 결코 닿지 않는다. 다행히 제페토는 이런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죽은 고릴라에 대한 시 <고리롱>에서는 '애도니 넋이니 그거 말장난 (51)'이라고 말한다. 시가 섣부른 애도로 변하여 '스스로 거룩해지는 실수 (6)'를 범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형식의 한계-시는 결코 아픔을 직접 치유할 수 없다-를 그는 어떻게 극복할까. 60살 넘어 점자를 배우기 시작한 시각 장애인에 대한 시 <명치>에선 '가을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라고 읽는 일/ 골목길에서 수없이 울었다, 라고 읽는 일/ 딸이 세상을 떠났다, 라고 읽는/ 그런 일 말입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어서 그는 묻는다. '손끝에 만져지는 슬픔이란/ 어떤 느낌입니까/ 혹시 잠 못 드는 밤/ 명치끝에 만져지는 그것은/ 따님의 이름입니까'. 그는 보이지 않는 절대적 암흑의 세계를 쉽게 위로하지 않는다. 단지 짐작하려 애쓸 뿐이다. 가을여행을 떠날 수 없었던, 골목길에서 울었으나 결코 겉으로 울음을 보일 수 없었던, 딸이 세상을 떠났다고 읽을 수 없었던 세계를 겨우 짐작하여 묻는다. 철판에 깔려 숨진 노동자에 대한 시 <나는>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나는 역군 아닌데/ 종현이 아버지인데/ 지수 씨 남편인데/ 썩 괜찮은 아들인데// 나는 사람인데'. 한 사람의 죽음이 산업 재해라는 네 음절로 줄여질 때, 그 단어는 폭력으로 기능한다. 죽은 사람은 역군이 아니라 끝까지 사람이었다는걸, 사람이어야 한다는 걸 말한다.  


그는 '예뻐서 혐오스러운 (53)' 세계를 해체하여 자칫 쉽게 잊히고 말 슬픔의 순간을 시로 박제한다. 기사에서 보이지 않는 사연이 시로 보충됐을 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대신 말할 때, 보편적인 아픔은 시적 언어를 통해 개별화된다. 아픔을 개별화하려 노력할 때 시는 고리롱의 가식적인 박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한 노력이 된다. 고작 문장 몇 줄일 뿐인 시가 세상을 치유하기란, 죽은 이를 위로하기란 끝까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우리가 치유는 하지 못해도, 잊지는 말자고 말하는 듯 보인다.


윤리적 발화가 시의 전부는 아니다. 단지 언급을 안 했을 뿐, 그의 시는 윤리성의 측면을 떼놓고 봐도 충분히 좋아 보인다. 시집의 3부는 기사 없는 시 단독의 모음이다. 시가 좋은 이유를 굳이 분석하며 설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내 지식과 언어는 시를 평가하긴 부족하니, 섣부른 평가보단 그저 같이 나누는 게 좋을 것 같다. 그저 읽고 느끼는 것만으도 충분할 때가 있다.


-


<어떤 날>


너의 얼굴 잊혀간다는 것이

눈물 날 만큼 두려웠다

첫 키스 나누었던

카페 겨울나그네

그날 밤 우리는 무얼 했던가

손잡고 지하상가를 걸었던가

어쨌든 그 시절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사랑도 그러하리라 믿었기에

길 위에 조금 흘린다 해도 아까울 리 없었다


이제는 아득해졌다

어떤 날엔 안주 없이 독한 술을 들이켜고

꼴사나운 자해를 했는데

그러면 까맣게 잊었던 사소한 추억이

비질비질 상처로부터 흘렀다

그랬었지, 하고 씁쓸한 미소로 잔을 들다가도

행여 잊혀질까 두려워

오른쪽 넓적다리뼈에 깊은 음각으로 새겼다

그러나 우리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서는

가슴 치며 무너졌다

비틀거리며 자정의 천변에 불을 지르고

성당 문을 걷어차며 신을 모독했다


돌아오는 재개발 주택가 골목길.

나는 엄습한 부끄러움에 뺨을 치고

희뿌연 허공에 부탁하듯 다짐했다

술 깨는 아침에는

지난밤 아무 일 없던 것으로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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