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황제
김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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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서평 쓸 때 있어 보이게 쓰려고 하거나 내재적 의미를 찾기에만 급급하다가 정작 재밌다, 재미없다에 대한 이야기를 못할 때가 있었다. 사실 서평이 음식평은 아니라서 맛 평가하듯 쓰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무게 잡는 서평을 쓰고 훗날 그것을 다시 보면 재밌게 읽은 소설에 죄지은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소설집에겐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므로 서평을 이 말부터 시작할까? 재밌다. 너무 재밌다. 


김희선 작가는 현대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라면의 황제」로 알게 됐다. 소설은 라면이 유해 식품으로 지목되어 거의 마약 취급 받는 미래에서 과거 한 평생 라면만 먹은 남자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내용이다. 설정부터 작정한 B급 냄새가 폴폴 풍긴다. '일인당 라면 소비량이 많은 지역일수록 거주자의 월평균 소득이 감소한다'는 보고서를 시작으로 '어린 시절 라면 소비량과 명문대 진학률은 반비례한다'등의 조사 결과가 뒤를 잇기 시작하며 라면은 죄와 타락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급기야 라면 금지 법안이 통과되기에 이른다. 원인과 결과를 뒤집어 생각하는 세계에서 사라진 라면을 추종하는 점조직 비밀 결사 동호회(ㅋㅋ)가 생겨나고, 라면이 사라지기 전 27년간 라면만 먹었던 김기수 씨의 생애를 재구성하려는 기자가 점조직 비밀 결사 라면동호회 리더를 만난다. 김기수 씨는 왜 평생 라면만 먹었던 것일까? 직접 읽어보시길. 


작가는 대략 이런 식의 구라를 대놓고 걸쭉하게 풀어낸다. 거의 모든 소설에서 강원도 W 시가 등장하는데 춘천에서 태어나 강원대학교 약대를 졸업하고, 원주시에서 약사 생활을 했다는 그의 이력을 보면 소설 속 W 시는 원주시가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이기호도 원주시 출신인데, 원주엔 뭔가 재밌는 글을 쓰게 만드는 수맥이 흐르는 것 같다.    


이렇게 재밌는 구라들은 현실과의 기묘한 접점을 가진다. 「교육의 탄생」은 국민교육헌장 탄생의 비화를 사라진 천재 수학자의 생애와 연결한 음모론 소설이다. 국민교육헌장은 지금에야 외울 일이 없지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첫 구절은 한 번쯤 본 적 있을 것이다. 국민교육헌장이 처음 생겼던 시대의 국가는 개인에게 국가와의 동일시를 강요했다. 당시 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워야 했다. 그러나 역시 의문이다. 나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게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그냥 태어났고 나 하나 잘 살길 바랄 뿐인데. 국민교육헌장은 역시 수상하다. 이때 문학의 역할은 분명해진다. 엄숙한 비판보단 우스운 상상을 진지한 포즈로 써 내려가는 것. 사라진 천재 수학자와 구소련 심리학자와 국민교육헌장의 사연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개굿이다. 


인간이 사라진 지구, 진품인지 가품인지 모를 페르시아 양탄자의 사연, 녹색 채소 외계인의 이야기, 말만 들어도 궁금하지 않은가? 흥미가 동한다면 사서 읽어 보시길.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 위엔 먼지가 내려앉아있었다. 그가 소설을 쓰다 말고 다시 약국에서 약을 팔까 봐 겁이 난다. 이렇게 재밌는 글을 쓰는 양반은 계속 글을 써야 한다. 이상 한국 소설 애호가의 오지랖 걱정 서평이었다. 


그 이후 향토사학자는 인호군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라면동호회 본부(알고 보니 그 컨테이너 박스였다)가 경찰의 급습을 받아 와해됐다는 말도 있었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어쨌든 거기서 경찰은 몇 개의 솥과 식용유 두 통, 그리고 밀가루 서너 포대 등을 증거물로 압수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라면이 사라졌느냐 하면, 그건 절대 아니었다. 라면은 그 후로도 언제까지나 명맥을 이어갔고(지금도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춥고 을씨년스러운 날이면 어딘가에서 라면 끓이는 냄새가 지표를 뚫고 피어올라 지나가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있지 않은가) 김기수씨의 기일엔 매년 꽃이 놓였다. 물론 어쩌다가 간혹 놓이지 않는 해도 있었지만 말이다. 10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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