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의 제왕
이장욱 지음 / 창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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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은 은밀하고 부끄럽다. 진짜 치부는 쉽사리 드러내지 못한다. 남에게 그것을 보여줄 땐 최소한의 포장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곽의 고백은 은밀하지도 부끄럽지도 않고 최소한의 포장도 없는 날것이다. 고백의 일반적 속성을 무시한다. 곽의 무덤덤한 고백은 자신의 상처와 치부를 드러내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그의 고백은 환갑이 넘은 아주머니와의 첫 경험에서 시작해 아버지를 칼로 찔렀던 불우한 가족사, 누이의 자살까지 이른다. 그 속에는 부끄러움도 분노도 없다. 그 고백을 마주한 사람들은 불편함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낀다. 찝찝한 불쾌함을 느끼지만 결국은 탐닉할 수밖에 없는 무언가를. 더럽고 흉측한 나신을 마주하고 눈 둘 곳이 없지만 그 나신의 얼굴이 자신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놀라움으로 눈을 뗄 수 없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불편함을 오랫동안 좌시하지는 않았다. 곽은 술자리에서 동기가 짝사랑하던 J와의 갑작스러운 정사와 J의 임신을 고백한다. 찝찝한 불편함은 이내 질투와 적의로 폭발한다. 이후 곽은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람들은 다시 그를 찾는다. 모임이 아니라 각자 만나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면서. 아이러니하게, 곽을 밀어내게 만든 찝찝한 고백을 자신들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포장되지 않은 진짜 고백을 말이다. 진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는 내밀한 속을 아무렇게나 드러내는 곽 말고는 없었으므로. 이렇게 고백은 또 다른 고백을 이끌어내고 사람들은 곽에 대한 혐오만이 아니라 동경까지 아우른 양가감정을 가지게 된다.

 

동기의 장례식 가는 택시 안에서 다시 곽의 입술이 열린다. 또 무엇인가를 고백하려는 것처럼. 곽의 벌어진 입은 마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커먼 동굴과 같다. 그 동굴을 통해 쉽게 고백하곤 하지만 진짜 고백은 하지 못 했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외면하고 싶은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그 입에 고요한 살의를 느끼면서. 우리는 진짜 고백을 하고 싶은 걸까, 그게 두려운 걸까. 아니면 둘 다일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기이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알 수 없는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그의 고백에 이끌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자기 자신에게 탐닉할 때 느껴지는 집중력으로 매번 곽의 이야기를 경청했던 것은, 바로 우리였으니까 말이다. 이제 와서 고백하거니와, 나 역시 곽을 멀리 하면서도 곽에게 이끌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동아리 밖에서 곽을 만나 술을 마시고 곽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어쩌면 즐겼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나는 곽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이야기를 지껄였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누군가에 대한 흠모나 적의이기도 했으며, 타인이 가진 허점에 대한 비루한 관심이기도 했다. 곽의 이야기는 건조하면서도 감상적이었고 잔인하면서도 달콤했는데, 그럴수록 나의 고백 역시 더욱 노골적이 되어갔다. 곽의 침묵이 나의 고백을 부추길 때, 나는 쾌감에 몸을 떨며 내 내밀한 모든 것을 곽에게 고백했던 것이다. 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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