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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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후배 L과 술 마셨다. 내 근황을 묻는 그의 말에 그저 거의 매일 뭔가를 읽는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L은 대뜸 군대에 있을 때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세 번이나 읽었다고 말했다. 읽을 때마다 힐링 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L을 오래 봐서 알지만, 그는 책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세 번이나 읽었다고 말했다. 그런데다가 힐링? 나 히가시노 게이고도 몇 권 읽어봐서 아는데, 힐링이라니? 그 양반 소설은 늘 사연 많은 살인을 풀어나가는 날카로운 형사 이야기(ㅎㅎ)인데? 의아했다. 한 번 읽어보란 L의 강권에 그러마고 대충 대답하고 술이나 계속 마셨다. 그리고 두 달 지난 지금 책을 다 읽었다.


과연 그랬다. 살인 사건과 형사가 나오지 않는 힐링 소설이다. 이야기는 32년 전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던 나미야 할아버지의 잡화점에 우연히 들어간 3인조 범죄자들이 겪는 신비한 경험이다. 시간축이 뒤틀려 있는 나미야 잡화점에서 3인조는 과거의 고민들을 현세에서 맞이한다. 가방끈 짧고 교양도 없는 3인조의 무례한 답장은 웃음이 나오면서도 기묘하게 현실적이다. 과연 나미야 잡화점엔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나미야 잡화점에 상담을 의뢰한 사람들은 나미야 잡화점의 조언대로 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조언을 따랐지만 현실이 그다지 잘 풀려나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상담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한 답을 남에게 확인받으며 위안과 확신을 얻으려 한다. 그게 아니더라도 현실의 문제는 결국 자신의 손에 달려있으므로 조언이 미치는 영향은 한정적이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상담은 자신의 고민을 객관화하는 과정이기에, 답변대로 행동하든 하지 않든 그 자체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대답해주는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상담 요청한 사람들의 인생이 변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고민에 대답하는 3인조도 변해간다. 쉬운 문장으로 깊은 고민을 풀어나가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었다. L을 다시 만나면 덕분에 좋은 소설 잘 읽었다고 말해야지.


나미야 할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겼다. 자신의 지도가 백지인 사람들은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으니 멋진 일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자신의 지도가 마구 덧칠돼 있어서 더 이상 뭔가를 더 그릴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뒤집은 다음 다시 그리면 된다구요? 넹... 말은 쉽네요... 어쨌든 인생은 난문(難問)이라는 말씀만은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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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인 2017-08-11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에도 나미야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책을 읽는 내내, 나에게도 ‘나미야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페이스북에 ‘나미야 잡화점을 현실로‘라고 검색하니 실제로 누군가가 익명 편지 상담을 운영하고 있더라구요.
namiya114@daum.net 여기로 편지를 받고 있고, 광주광역시 동구 궁동 52-2, 3층 나미야할아버지 로 손편지를 보내면 손편지 답장도 받을 수 있다고 하네요.
아마 이 책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대부분 저같은 생각을 한번쯤 해보셨을 거라 생각돼 이곳에 공유합니다.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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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윤대녕을 좋아한다. 사실 윤대녕은 요즘 젊은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는 작가는 아니다. 그의 소설은 꽤나 전형적이다. 주인공은 시크한 남자 인텔리고, 흡연하고, 혼자 허름한 횟집에서 소주를 마시고, 특별히 노력 안 해도 여자랑 잘 엮이곤 한다 (한마디로 아재 감성). 특히 시대와 무관한 개인의 역사와 상실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점에서 통속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물며 소설 속 대사는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 그러니 소설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윤대녕은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작가가 아니겠소? 


이기호는 단편 소설 <나쁜 소설>에서 이런 윤대녕 소설의 특징을 짚어낸 바 있다. 윤대녕 소설에 빠져있는 남자 주인공이 춘천 가는 기차에서 맞은편에 앉은 여자에게 말을 건다. 소설 속에서 떨리던 목소리로 대답하던 여자와는 달리 현실의 여자는 그냥 무시하고 창밖이나 쳐다본다. 소설과 현실은 다르다.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주인공은 옛 여자친구에게 "상처에 중독된 사람"이란 대사를 치고 밖으로 나온다. 그걸 듣는 여자친구의 어이없는 표정은 독자의 폭소를 자아낸다. 이처럼 윤대녕 소설은 확실히 현실과 소설 사이의 벽 같다. (<나쁜 소설>이 윤대녕을 비판하는 건 아니다. 소설이 현실에 적용되는지를 다룰 뿐이다. 정말 재밌으니 한 번 읽어보시길 ㅋ) 


그러나 나는 그런 '벽' 때문에 윤대녕 소설을 좋아한다. 해학을 기대하고 이기호를 읽듯이 가끔은 현실에서 쉽게 지나치는 쓸쓸함을 느끼고 싶어 윤대녕을 읽는다. 


그렇다면 그의 산문은 어떨까. 제목과는 달리 글 속의 이야기들은 전혀 극적이지 않다. 제대하고 절간에 처박혀서 소설이나 썼던 이야기나, 끊임없이 내면으로 침잠하던 시절의 이야기나, 동료들과의 사소한 만남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결국 그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지나간 사소한 순간을 돌이켜 보면 극적인 순간일 때가 있었고 그걸 그때는 모른다는 말이다.


소설가들의 산문을 읽으면 그들의 글과 삶이 닮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윤대녕의 산문엔 김연수의 능청스러운 유머도, 김훈의 깊은 사유의 문장도, 젊은 작가들의 쿨함도 없다. 단지 그의 글은 정갈하고 글 속의 그는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머물다가 할 뿐이다. 나도 그렇게 현실로부터 자신을 철저히 격리하고 싶은 때가 종종 있다. 딱히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가끔은 그런 방식으로 (혼자 허름한 횟집에서 소주를 까며 ㅋㅋ) 세상과 독대하고 싶은 것이다. 세상은 너무 사소하게 나를 지치게 하니까. 그러나 그런 극적인 일탈을 하기엔 지금 먹고살기도 너무 바쁘네 하핫.

대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의 시작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애의 집착이다. 자신과 닮은꼴 찾기. 숱한 물고기들이 그러하듯 사람도 원래 암수 한몸이었다가 남, 여로 각기 쪼개진 다음 잃어버린 다른 한짝을 찾아 영원히 헤매고 다닌다는 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속설에는 누구도 예외가 없다.. 첫사랑인 경우에 더욱 그러하고 맨 마지막 사랑도 그렇게 완성된다. 그래서 무릇 나이 든 부부들은 남매지간처럼 닮아 보이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모든 사랑은 편애의 속성을 띄게 마련이며 작별할 때는 성격차가 주 원인이 된다. 너는 나와 닮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또한 사랑은 계속된다. 프랑스 어느 여류 작가의 말처럼 `모든 사랑은 첫사랑, 다음 사랑도 첫사랑`이라는 명제에 따르는 것이다. 1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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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 부끄러움을 모르는 카리스마,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
오찬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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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엔가 집 앞 곰탕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다른 테이블의 중년 남성 두 명이 낮술을 마시는 걸 봤다. 낮술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술은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들고 낮부터 기분 좋다고 나쁠 건 없으니까 ㅎㅎ. 게다가 곰탕에 소주라니 참 좋은 조합이다,라고 생각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둘은 남들 신경 안 쓴다는 듯 굉장히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으며, 소주를 추가 주문할 때마다 여자 종업원에게 꼬박꼬박 반말이었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줘!"


최근에 이런 이들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생겼다. 개저씨다. 그들이 평소에 어떤 권위를 지니고 살았더라도(대단해 보이지도 않았지만) 자신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그 권위를 내세울 권리는 전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평소 자신이 직장이나 가정에서 누리던 '중년 남성'의 권위를 일상에서 안하무인격으로 쏟아낸다. 이들에게 피해를 입는 대상은 주로 여성이지만, 젊은 남성들도 개저씨들 때문에 피해 받긴 마찬가지다. 


대학병원에서 수술하는 과의 구성원은 남초인 경우가 많고, 그런 과의 분위기는 대략 이렇다. 그 과에 예쁜 여자 인턴이나 피케이가 들어오면 그들은 그녀들을 데리고 술을 마신다. 그 사이 힘들고 거친 일들은 남자 후배 의국원이나 인턴에게 쏠린다. 그 순간 역할 상 술집 여급이나 다름없는 여의사와 여학생도 피해자고 그 틈바구니 속에서 혼자 노동하는 젊은 남자 의사도 피해자다. 비릿한 중년 남자 교수들이나 고년차 레지던트들만 좋다. 그 외에도 민폐 해병대, 지잡대 카카오톡, 영상 통화범 등 여러 사례가 있다. 모두 다 부당한 권위의식으로 남을 짓누르려 하는 개저씨의 연장선상에 있다. 난 남자지만 개저씨들은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국공 합작처럼 남녀 합작으로 개저씨들을 격퇴해야 한다.


이 책은 제목처럼 왜 남자가 이상해졌는지만 말하지 않는다. 여자가 이상해진 이유도 말한다. 가령 한국 기독교의 기도 풍경은 아줌마들의 열성적인 기도로 대표되는데, 이유는 이렇다. 엄마들은 지금껏 가정에서 노동은 끊임없이 했지만 공식적인 생산성은 인정받지 못했다. 남편이 생산성 있게 살도록 내조하고 자녀들이 생산성 있는 사람이 되도록 뒷바라지해야 했다. 그러니 자녀들의 성공은 '엄마 덕택'이라는 말을 꼭 들어야 한다. 이런 엄마들의 유일한 성취는 자녀의 성공이다. 이들이 기도를 하는 건 하느님과의 소통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이유에서다. 내 행복이나 다름없는 자녀의 성공. 이렇게 병든 사회의 병든 종교가 완성된다. 


난 완전한 남녀평등주의자는 아니다. 남녀 간에 신체적 능력 차이가 존재하기에 서로가 더 잘 할 수 있는 분야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군 하사들이 행군 안 하는 것이나, 남자 경찰이 죽은 고라니를 치울 때 SNS에서 드립 잘 친 여경이 승진하는 것, 경단녀 동행면접 기사 따위를 보면 짜증이 난다. 그런 게 진정한 남녀평등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의 이면에 남자들의 부당 이득은 숨겨져 있지 않은지도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숙한 여자 운전자가 김여사라는 단어로 지목될 때 왜 난폭한 남자 운전자는 딱 집어서 남성으로 지목되지 않는가? 왜 딸바보만 있고 아들바보는 없는가? 왜 식당 아주머니를 부르는 호칭은 고모가 아니라 이모인가? 저자는 말한다. 똑같은 잘못을 해도 남자라면 사람 문제가 되고 여자라면 여성 문제가 된다고.  


간혹 저자가 말하는 군대의 보상 문제나 노키즈 존 같은 부분은 조금 나이브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좋은 이야기들이다. 성차별의 실제가 남자 입에서 이렇게 생생하게 나오기란 쉽지 않다. 비판의 목소리보단 자성의 목소리가 더 깊게 울리는 법이다. 정말이지 개저씨나 꼰대 안 되는 게 내 삶의 목표다. 그런데 정작 개저씨들은 이 책 거들떠도 안 볼 것 같네.

어떤 이는 굳이 그렇게까지 나쁘게 표현해야 하냐면서 한탄한다. 김치녀, 된장녀, 맘충 등을 언급하면서 내게 "너는 그런 단어들에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호명된 이를 보호해주더니 왜 개저씨는 그렇게 호명하는 이들의 편에 서냐?"면서 타박을 준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아저씨를 개저씨라 한다면 문제지만 개 같은 아저씨를 개저씨라고 표현하는 건 일종의 혁명이다. 없었던 존재를 악의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 악랄한 것을 이제야 발견했기 때문이다. 꽃을 이제야 꽃이라, 아니 똥을 이제야 똥이라 부른 셈이다. 개저씨는 `신조어`일 뿐이지 새로운 인간의 등장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저씨는 김치녀, 된장녀, 맘충과는 성격이 완전 다르다. 이 용어들은 주로 약자를 향한 강자들의 낙인이다. 하지만 개저씨는 정반대다. 오랫동안 짓눌린 자들의 미세한 저항이 모이고 모인 이유 있는 반항이다. 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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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한나 아렌트 지음,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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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을 주창했던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집입니다. 이 책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4년부터 타계 2년 전 1973년까지 이뤄졌던 네 번의 인터뷰를 다룹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을 진두지휘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예루살렘에서 참관합니다. 그는 재판장에서 보고 들었던 아이히만의 모습과 증언을 토대로 아이히만에 대한 기사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이의 악행은 그 사람에게 그만큼의 악이 내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인간에 거대한 악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악이 자행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행을 저지른 인간에게 악마적인 것은 없고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아이히만은 개인이길 거부하고 거대한 관료제의 일부로서만 존재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연히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결과에 대한 사유는 소멸됐다는 말입니다. 대구 지하철 기관사와 세월호 선장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이런 사유와 상상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거대한 공포가 사유를 잠식하여 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이끌지는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사건 이전엔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요. 


다시 한나 아렌트로 돌아오죠. 그의 이런 주장은 banality(평범성 또는 진부성)라는 용어의 애매함과 맞물려 유대인 사회의 공분을 일으킵니다. 유대인 사회는 그가 아이히만을 옹호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단지 그는 어떤 사람의 평범함과 그의 악행을 조화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책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나 아렌트>라는 한나 아렌트 전기 영화의 대사를 빌려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난 이해하는 걸 의무라고 알고 있어요. 그건 이에 대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유대인 사회는 그를 반민족적이라며 비난합니다. 그의 여러 절친들도 절교 선언을 하기에 이르죠. 다행히 그의 이런 생각은 시간이 지나며 인간의 악에 대한 중요한 고찰로 서서히 인정 받습니다. 이런 악의 원인에 대한 끈질긴 고찰도 대단하지만 한나 아렌트의 대단함은 또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하나의 정답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민족조차 성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유대인의 주권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결국 다수 인종을 정치적 소수자로 전락시켜 자기 민족이 당했던 일을 똑같이 당하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민족 주의에서 벗어나 철저히 사안의 옳고 그름에 대해 사유하는 것. 한국에서는 이뤄지고 있을까요.


저는 '상식이 승리하는 사회'같은 말을 싫어합니다. 그 이면에는 다른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할 틈도 없이 그것을 비상식으로 낙인찍어 담론에서의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나쁜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고, 자유라는 용어는 항상 '반대할 자유'라는 그의 주장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정답 내리는 사회 보다 정답이 없어 항상 토론하는 사회가 건강할 사회일 것입니다. 


말은 길게 써놨지만 사실 책은 읽기 힘듭니다. 60,70년대의 문제 상황이 지금의 현실과 동치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말들도 많아서 독서 중에 시신경과 뇌신경이 따로 노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영화 <한나 아렌트>를 보고 나무 위키에서 한나 아렌트 검색해보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독서모임에서 저는 이 책을 (읽지도 않고) 추천했는데, 참으로 송구스럽군요 헤헤.

하지만 당신이 알듯, 목숨을 부지할 줄 아는 것과 그 실행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어요. 알고서도 떠난 사람과 실행에 옮긴 사람 사이에는요. 따라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이, 구경만 하고 자리를 뜬 사람이 "우리는 모두 유죄"하고 말한다면 그건 실제로 철저히 실행한 사람들을 감싸는 게 돼요. 바로 이게 독일에서 일어났던 일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죄책감을 일반화해서는 안 돼요. 그건 진짜 죄인들을 감싸는 짓일 뿐이니까요. 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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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라이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3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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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단편은 인생의 한 시점에서, 한 개 또는 두 개 정도의 사건이 엮이며 생기는 감정적 파동을 그린다. 그러나 앨리스 먼로의 단편은 종종 인생 전체까지 조망하기도 한다. 어떻게 짧은 분량에 인생을 다 담을 수 있느냐, 그건 장편의 영역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분명 그 말은 사실이다. 장편으로도 인생을 다 담을 수 없으니까. 


작가가 인생을 조망한다고 해서 그것을 모두 농밀하게 담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말한 조망의 의미는 대략 이렇다. 한 시점에서 시작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결말을 짓는 보통 단편들과 다르게, 그의 단편은 짧은 이야기 안에서 여러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것. 중요한 부분조차 과감히 생략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중요한 부분은 생략되는 게 아니라 원래 알 수 없던 부분이다. 알 수 없는 부분을 그대로 알 수 없게 서술할 뿐이다. 그는 이런 형식으로 인생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단편 「자갈」은 작가의 이야기 형식과 형식 자체가 주는 메시지가 잘 드러나는 단편이다. 


한 여성이 과거를 회상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새로운 남자와 채석장 옆의 트레일러에서 새살림을 차린다. 화자와 언니는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고 어머니를 따라와 새 남자와 같이 산다. 그의 언니는 키우던 개를 친부의 집에 가져다 놓기도 하며 친부와 친모 모두의 관심을 바라지만, 양쪽 모두 큰 관심을 갖지 않는다. 많은 비가 내린 후에 채석장에 물이 깊게 고여 호수가 생긴다. 언니는 개와 함께 호수에 빠질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물에 빠지면 화자에게 집에 돌아가 엄마와 엄마의 애인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어린 화자에게 부탁한다. 화자는 트레일러까지 헐레벌떡 뛰어가지만, 정작 문 앞에서 1-2분을 망설인다. 도대체 왜?. 어머니가 호수로 뛰어간다. 언니는 죽는다. 


화자는 평생 이 기억에 붙들려 산다. 심리 상담가는 엄마와 애인이 섹스하느라 문이 잠겨있었을 거라고, 화자가 문을 쾅쾅 두드렸으면 둘이 화냈을 거라고 상담을 유도하고 만족스러워한다. 그러나 그건 살아있는 사람의 죄책감을 덜어줄 뿐이지 결코 사실이 아니다. 언니는 무슨 생각으로 호수에 빠졌을까. 어머니의 관심을 돌리려던 극단적인 행동이었을까?. 많은 시간이 지나 만난 엄마의 애인은 말한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수영을 잘 해서 엄마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 젖은 겨울옷이 얼마나 무거워질 수 있는지 몰랐을 수도 있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몰랐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아직도 이걸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지금 네가 행복해지는 거라고. 화자는 그가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안다. 그러나 여전히 화자는 기억에 붙들려 있고 엄마는 가끔 채석장 근처를 배회한다. 죽은 언니의 마음은 영원히 모를 것이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원히 무거운 기억에 붙들려 살 것이다. 


논리적으로 정합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지금의 나'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그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모든 기억은 파편화됐고 우리는 그 파편을 논리적으로 짜 맞추려 애쓸 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과거란 합리화된 과거라고도 할 수 있다. 불완전한 기억에 대한 대처란 '잘못 알았을까 두려워 모르는 척(122)'하거나 '무거운 사건을 애써 지워버리는(137)'것 정도다. 


다른 단편 「기차」의 남자는 중요한 순간마다 여자를 떠나는 데 이유는 끝까지 모호하다. 「아문센」의 의사는 왜 결혼을 앞둔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버렸을까? 「디어 라이프」에선 네터필드 부인의 사정을 먼 훗날 알게 되지만 누구보다도 그걸 알아야 할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다. 진실은 끝까지 알 수 없거나 너무 늦게 밝혀진다. 진실을 알 수 없는 우리는 진실과 화해할 수 없고 스스로 용서한 자신과 화해할 뿐이다. 「자갈」의 화자처럼 기억에 붙들려 받는 고통은 도리어 윤리적이다. 끝까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잊지 않았으므로. 


이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시간과 사건을 휙휙 건너뛰는 서술 방식이 불친절하다. 그러나 빈칸은 빈칸으로 남을 때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인생이 정답을 채워 넣는 괄호빵 시험지는 아니다. 결국 빈칸 채우기란 내 마음이 편한 답을 채우는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남은 삶의 양식은 채울 수 없는 공백지에 평생 붙들려 사는 것이나, 쉽게 잊고 남은 부분을 추스르는 것뿐이라 조금 슬프지만. 어쨌거나 알 수 없는 건 끝까지 알 수 없다는 것만이 작가가 말하는 진실이다. 작가는 마지막 소설 마지막 문장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어떤 일들은 용서받을 수 없다고, 혹은 우리 자신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는 용서한다. 언제나 그런다." 하, 이것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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