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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말 - 정치적인 것에 대한 마지막 인터뷰 ㅣ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한나 아렌트 지음, 윤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1월
평점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을 주창했던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집입니다. 이 책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4년부터 타계 2년 전 1973년까지 이뤄졌던 네 번의 인터뷰를 다룹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을 진두지휘했던 아이히만의 재판을 예루살렘에서 참관합니다. 그는 재판장에서 보고 들었던 아이히만의 모습과 증언을 토대로 아이히만에 대한 기사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이의 악행은 그 사람에게 그만큼의 악이 내재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인간에 거대한 악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악이 자행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행을 저지른 인간에게 악마적인 것은 없고 '남들이 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아이히만은 개인이길 거부하고 거대한 관료제의 일부로서만 존재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연히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결과에 대한 사유는 소멸됐다는 말입니다. 대구 지하철 기관사와 세월호 선장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도 이런 사유와 상상력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거대한 공포가 사유를 잠식하여 순간의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이끌지는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들은 사건 이전엔 너무나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요.
다시 한나 아렌트로 돌아오죠. 그의 이런 주장은 banality(평범성 또는 진부성)라는 용어의 애매함과 맞물려 유대인 사회의 공분을 일으킵니다. 유대인 사회는 그가 아이히만을 옹호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단지 그는 어떤 사람의 평범함과 그의 악행을 조화시키려 했을 뿐입니다. 책에 나온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나 아렌트>라는 한나 아렌트 전기 영화의 대사를 빌려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릅니다. 난 이해하는 걸 의무라고 알고 있어요. 그건 이에 대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의 의무입니다."
유대인 사회는 그를 반민족적이라며 비난합니다. 그의 여러 절친들도 절교 선언을 하기에 이르죠. 다행히 그의 이런 생각은 시간이 지나며 인간의 악에 대한 중요한 고찰로 서서히 인정 받습니다. 이런 악의 원인에 대한 끈질긴 고찰도 대단하지만 한나 아렌트의 대단함은 또 다른 데에 있습니다. 그는 시종일관 하나의 정답에 부정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민족조차 성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유대인의 주권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은 결국 다수 인종을 정치적 소수자로 전락시켜 자기 민족이 당했던 일을 똑같이 당하게 하는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민족 주의에서 벗어나 철저히 사안의 옳고 그름에 대해 사유하는 것. 한국에서는 이뤄지고 있을까요.
저는 '상식이 승리하는 사회'같은 말을 싫어합니다. 그 이면에는 다른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할 틈도 없이 그것을 비상식으로 낙인찍어 담론에서의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나쁜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고, 자유라는 용어는 항상 '반대할 자유'라는 그의 주장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쉽게 정답 내리는 사회 보다 정답이 없어 항상 토론하는 사회가 건강할 사회일 것입니다.
말은 길게 써놨지만 사실 책은 읽기 힘듭니다. 60,70년대의 문제 상황이 지금의 현실과 동치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말들도 많아서 독서 중에 시신경과 뇌신경이 따로 노는 경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에 대해 알고 싶다면 영화 <한나 아렌트>를 보고 나무 위키에서 한나 아렌트 검색해보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독서모임에서 저는 이 책을 (읽지도 않고) 추천했는데, 참으로 송구스럽군요 헤헤.
하지만 당신이 알듯, 목숨을 부지할 줄 아는 것과 그 실행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어요. 알고서도 떠난 사람과 실행에 옮긴 사람 사이에는요. 따라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이, 구경만 하고 자리를 뜬 사람이 "우리는 모두 유죄"하고 말한다면 그건 실제로 철저히 실행한 사람들을 감싸는 게 돼요. 바로 이게 독일에서 일어났던 일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죄책감을 일반화해서는 안 돼요. 그건 진짜 죄인들을 감싸는 짓일 뿐이니까요. 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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