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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소설의 효용에 대해선 늘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소설은 얄팍한 위안 같은 것인데 그마저도 읽는 사람에게만 작용할 뿐이니 더욱 얄팍한 무언가라고. 소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시큰둥한 개인을 바꿀 수 있을지 조차 장담할 수 없다. 소설, 그거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소설을 읽는다. 도대체 왜 읽는 것일까.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소설 읽기를 통해 타인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적 상상력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능력인데, 이것이 법을 비롯한 공적 추론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공정해야 하는 재판관이 문학적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니.
저자는 문학적 상상력이 공적 합리성의 한 부분이지 그 전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이런 주장을 하는 건 '그것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good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이기 때문이(17)'라는 것이다. 저자가 추구하는 문학적 상상력의 대척점엔 경제적 공리주의가 있다. 통계와 효용을 우선시하는 경제적 공리주의는 그 자체로 합리적이며, 공정함을 추구해야 하는 법의 기초에 잘 부합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저자는 말한다. "경제적 공리주의는 인간을 단순히 만족의 담지자 혹은 만족이 위치하는 자리 정도로 간주한다. 이와 반대로 소설은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경계를 세계의 가장 핵심적인 사실 중 하나로 본다. (71)"
지표와 통계는 인간의 삶을 쉽게 요약하지만 개인의 삶 하나하나를 대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청년 실업률과 노인 빈곤율을 기사로 접하지만 생생히 실감하진 못한다. 그러나 잘 쓰인 소설을 통해서라면 그것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가령 김애란을 통해선 자취방이나 편의점에서의 비루한 여성을, 박민규를 통해선 고시원이나 지하철에서의 부박한 삶을 읽을 수 있다. 80년대엔 <원미동 사람들>, 70년대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런 역할을 했다. 너무 언더 도그마 아니냐고? 살만한 사람들에게도 내적 갈등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면 정이현을 읽으면 된다. 이처럼 소설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구현된 인간의 필요와 욕망의 끈질긴 형태를 보여(36)'주고,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평범한 것들을 껴안(41)'게 된다.
각각의 개인을 통계화/계량화할 수 없으므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개인의 서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말은 정말 좋으나 어쩐지 뻔한 힐링 멘트 같다. 나 같은 독자를 위해 저자는 모든 감정이 좋은 길잡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좋은 길잡이로 기능하기 위한 감정은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 느끼는 감정이다. 쉽게 말하면 감정이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왜곡하지 않아야 하며, 사건에 연루된 관계자의 것이 아닌 관찰자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아닌 걸 감성 팔이로,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실드칠 순 없다는 말 되겠다.
저자는 문학적 심판관이 내린 시적 심판으로 세 가지 판례를 소개한다. 죄수 인권, 여성 노동자 인권, 동성애자 인권에 관한 사건이다. 당시엔 그것들이 쉽게 경시되곤 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역사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신중한 고찰과 약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을 통해 그것들을 지켜냈다.
결론은 '헌법이라는 명확한 문서의 틈새(241)'를 메우는 건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단, 저자는 통상적 법적 추론이 무분별한 정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법관의 상상력은 엄격한 헌법적 제약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과 분노의 정서가 정확한 법적 추론과 사실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연결됐을 때 사회적 약자를 지킬 수 있는 감정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게도 남의 죄를 심판하고 형량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휘해서 인간적인 판사로 매스컴을 타고 페북 스타가 되어 글 쓸 때마다 따봉 수백 개를 받고 베스트 셀러 작가로 데뷔를...... 농담이다. 꼭 공적 추론의 장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저자는 이것을 소설을 통해 가장 잘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사, 르포 문학 더 나아가 다큐멘터리나 사실적 영화 같은 영상물이 경우에 따라 소설보다 더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도 말했다. 근대 문학은 이미 망했다고. 이런 뜻으로 한 말 맞나? 책을 안 읽어봐서요... 헤헷.
주장에서 한치의 윤리적 흠결도 찾을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공허한 힐링 메시지로 들리기도 한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판사에게 문학적 상상력까지 요구하다니. 과로사 안 하면 다행이다. 판사 개인의 문학적 상상력만 확보되면 능사일까? 아니다. 사회가 갖춰야 한다. 시민 개개인이 타인을 상상하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게 우선이고, 시민들의 합의하에 사회의 불합리를 하나씩 없애나가 사회적 약자를 줄이는 게 더욱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음, 되는대로 지껄이고 보니 이건 더 힐링 메시지 같네. 하핫.
평등 보호에 대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어떤 집단이 겪었던 차별의 역사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으로 무력한 상황에 대한 고찰까지도 요구한다.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감정을 이입하는 형태의 고찰은 이 사건을 소외되고 멸시받은 다른 집단에 대한 박해의 역사와 연결짓도록 하는데, 이는 차별의 역사를 드러내는 데 일조한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조사는 이해를 위해 충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면밀한 조사 없이는 마이클 하드윅의 상황과 정당한 이유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폭력적 범죄자의 행동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평등 보호에 대한 논의를 잘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진정으로 위험한 것에 대한 비난과 비합리적인 차별을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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