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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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가 이런 거 왜 읽어?

페미니즘을 섭렵해서 SNS 개념남 코스프레하려고 책을 샀다. 농담이다. 몇 번 스치듯 읽은 정희진 칼럼이 좋아서 이 양반이 말하는 페미니즘이 궁금해져 책을 샀다. 난 남성이므로 당연히 내 인식의 틀을 깨는 문장들이 많았고, 즐거운 독서의 순간이었다. 다만 남성의 생리와 젊은 남성이 겪는 실질적 고통에 대한 저자의 오해가 아쉽다. 내가 겪지 않은 여성의 고통을 '정말로' 절감할 수 없듯이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한다.

페미니즘의 큰 틀에는 많은 부분 동의한다. 남들이 지성인 집단이라 오해하는 (ㅎㅎ) 의대와 대학병원에서도 여성이 겪는 차별은 상당한 편이다. 가령 간호사들은 '임신 순번제'를 암묵적으로 지켜야 하며, 여의사들도 자유로운 임신은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아직도 많은 대학 병원 정형외과는 여성을 선발하기 꺼려하는가 하면, 남녀가 짝으로 인턴을 돌 때 남자 인턴만 수술방으로 부르곤 한다. 수술을 많이 시켜주려는 좋은 의도가 아니라 험하게 부려먹기에 남자가 편하다는 뜻이지만. 의도야 어찌 됐든 병원에서도 차별은 공공연하게 묵인된다. 하물며 실생활과 인터넷 담론은 어떻겠는가.

어처구니없는 운전을 하는 여성 운전자를 '김여사'라 비하한다. 그런 여성 운전자가 왜 없겠는가. 있다. 하지만 여성의 어설픈 운전이 사실이라고 해도 '김여사' 담론은 병리적이다. 여성만 어처구니없는 운전을 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이 남성들이 하지 않을 '어설픈' 운전을 한다면, 남성들은 여성들이 하지 않을 '난폭한' 운전을 한다. 얼마 전 레미콘이 정차된 승용차를 덮쳤을 때 네티즌들이 레미콘 운전자를 욕하지 레미콘 '남성' 운전자를 욕하던가? 운전자 커뮤니티는(ex 보배드림) 남성 위주로 구성되어 있다. 남성의 잘못은 묵인되고 주목받지 못한다. '김여사' 담론은 인터넷에 만연한 여성 혐오의 대표 현상이다. 여성에 의한 어설픈 운전이 목격되면 "김여사가 그럼 그렇지" 하면서 남성들은 선택적 기억을 집단 강화한다. 이런 상황이니 여성들은 얼마나 복장 터지겠는가. 메갈리아 탄생, 이해한다.

2.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적 - 가부장제

썰이 너무 길었다. 이 책은 여성이 실제로 겪는 차별을 넘어서, 그 기저에 어떤 심리와 구조적 문제가 작용하는지를 고찰한다. 저자는 영화를 비롯한 예술 작품에서도 남성 중심 사고관이 중심적으로 작용함을 예리하게 밝혀낸다. 거의 모든 사회, 언어, 문화 구조에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작용하고, 여성들은 현재까지 교묘한 억압을 받고 있다. 여성은 공적 영역으로 진출했지만 남성은 사적 영역으로 진출하지 않아 집안 일과 어머니로서의 감정 노동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여성들은 욕망도 억압당한다. 날씬해야 하지만 가슴은 풍만한 게 미덕이고, 음식은 만들어야 하지만 적게 먹어야 한다. 남성은 섹시한 여자를 바라지만 여성이 섹스를 즐기면 '걸레'다. 하나하나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유교가 지배 관념으로 오랜 기간 작용했던 한국에선 이 같은 현상이 심하다. 궁극적으로는 사회 전 분야에서 가부장제가 퇴출되어야 한다.

3. 남성이라 비판적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부분

(1) 북한은 단순한 약자인가?

저자는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부당한 억압의 예시로 북한을 든다. 북한이 국제 사회에서 약자이고 강대 약의 구도에서 억압받는 게 여성 억압 구도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북한은 실재하는 위협이므로 이는 naive한 국제 정세 인식이다. 북한이 최근에도 연평도 포격과 천안함 폭침을 자행한 점과 북한 인민이 당하는 억압을 간과하면 안 된다. 단순한 약자가 아니라 폭력을 행하는 약자다. 차라리 북한의 예는 빼는 게 책 전체 주장을 강화하는 데 좋을 것이다.

(2) 남성 성(性) 생리에 대한 이해 부족

 

여성주의자들이 포르노그래피를 반대하는 것은, 성 보수주의자 혹은 '검열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현재 제작, 유통되고 있는 포르노그래피가 성폭력을 '정상적인 섹스'로 묘사하여 성폭력을 합리화하는 기제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많은 남성들은 "포르노는 이론이고, 강간은 실천"이라고 여기고 있다. 160p

 

포르노가 어떻게 여성 인권 침해로 작용하는지 이해는 하겠는데 이런 식으로 남성을 매도하면 곤란하다 (ㅎㅎ). 실제로 남성들이 포르노를 강간 준비 이론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강간의 왕국'이 됐을 것이다. 구질구질하게 더 설명해본다. 인터넷 우스갯소리로 '현자 타임'이란 게 있다. 사정 후의 불응기에는 아무런 성(性) 적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 포르노가 강간 욕망을 부추긴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포르노 도입 전과 후 강간 범죄 수의 비교, 포르노를 이용하는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강간 범죄율 비교에 대한 통계를 제시해야 한다. 막연한 관념에 기반을 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주장이 저런 식이니 야동만 보는 선량한 딸잡이(!)들이 여성부가 포르노그래피를 선택받지 못한 여성의 '경쟁자'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음모론(?)을 말하는 것이다.

(3) 전통적 성 역할을 은연중에 강제하는 미디어 : 과연 남성들 때문일까?

 

여성은 나이에 따른 외모를 기준으로 남성 질서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 소비된다. 권력을 가진 남성은 젊고 예쁜 여성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젊은 여성들은 그런 남성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성별 사회에서 연애는 결국 성별 자원의 교환이다. 남성이 여성에게 원하는 것은 '몸'이거나 보살핌이며, 여성이 남성에게 원하는 것은 자원이다. 192p 

 

저자가 직접 미디어의 예시를 든 건 아니다. 이런 식이라고 분석을 했는데, 읽는 나는 자연스럽게 미디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가령 현아의 선정성이나, 아이유 앨범 재킷에 불쾌해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이다. 성 상품화에 많은 여성들은 불쾌해한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에 종속되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는 왜 불쾌해하지 않을까? 그것을 자극하는 드라마의 작가는 남성일까 여성일까. <파리의 연인>, <시크릿 가든>, 최근의 <결혼 계약>까지 말이다. 그럼 드라마의 주 소비층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페미니즘 관점에서 비판받아야 할 위의 드라마에 열광하는 사람은 주로 여성이고 그걸 비판하는 사람은 주로 남성이다. 이건 무엇을 뜻할까? 책 제목처럼 미디어의 편견에도 여성들 스스로 '도전'해야 하는 게 아닐까?

(4) 군 가산점 논란

 

군 가산제 논쟁에서 "가산점을 인정하라."는 주장이, 남성의 억압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상화하는 타자(여성)에게 차이를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라면, "여자도 군대 가라."는 주장은 대상화하는 타자가 차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부정하는 논리이다. 244p

 

즉, 여성과 장애인은 '특권층'이어서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2등 시민'이므로 군 가산제라는 권리도, 병역이라는 의무도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의무나 권리는 국민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국민 되기에 적합하지 않은, 국민의 기준에 미달하는 2등 시민에게는 의무도 권리도 없다. 여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다. 

 

군 가산제를 주장하는 남성들에게 군 경력은 '희생'인 동시에 '대한민국 남자'로서 정상성과 자부심의 원천이다. 이들은 이중적, 분열적 위치일 수밖에 없다. 군 가산제 논란의 본질은, 남성들 간의 계급 차이가 남성과 여성의 관계로 치환, 전가된 것이기 때문이다. 248p 


민감한 부분이다. 인용한 단락의 말을 이해하지만 심정적으로는 억울하기도 하다. 저자의 말은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병역 면제가 '특혜'로 간주된다. 장애인이 '2등 시민' 취급받아 병역 면제받는 건 맞는 말이지만, 비장애인 남성이 병역 면제받으면 불공정한 '특혜'로 인식하는 게 대부분이다.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 사회 일반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2등 시민'이라서 면제받았다는 느낌보단 '여자는 군대 안 가서 좋겠다'라는 느낌이 더 사실에 가깝다.

남성이 여성의 고초를 전부 이해할 수 없듯이 여성도 남성의 고초를 전부 이해하지 못 하나보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저자는 군 가산점을 남성의 억압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성에게 차이를 억지로 강요하는 부분이라 말한다. 하지만 군대는 '배제된 무리'를 억압하기만 하지 않는다. 실질적으로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일반 병사일 경우 이에 대한 보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병 월급이 14~20만 원이다.

군 가산점 제도가 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일 수 있다는 점은 동의한다.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는 말에도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공익처럼 대체 복무하라는 것도 동의하지 않고. 왜냐하면 군 복무나 공익 근무가 효율성이 굉장히 떨어지고, 거시적으로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떨어트리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필요악인 제도에 "우리가 억울하니 너희도 함께 해"라는 주장은 유치하다. 군 복무에 대한 보상은 '타자'를 배제시키지 않는 급여 인상, 퇴직금, 복무 중 복지 향상으로 이뤄져야 함이 마땅하다. 그러나 가능할까?

젊은 남성들이 젊은 여성들에게 갖는 적개심의 뿌리 중 하나는 병역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저자는 주장 내내 젊은 남성의 실질적 고통을 쉽게 간과한다. 이는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53)을 돌아와서 찌른다.

여성은 병역 면제가 아니라 배제되었다는 주장과 여자도 군대 가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하고 있다. '배제'라는 단어를 선택해서 생긴 모순이다. 남성이 군 복무하는 게 왜 손해인지 고찰하고 인정해야 한다. 저자는 여성을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묶어서 생각할 수 없다고 했다. 남성도 마찬가지다. 생활고가 있음에도 사병으로 병역을 이행하는 남성,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장교로 군 복무하는 남성, 미국에서 태어나 군 복무를 하지 않는 남성. 여성에 적용하는 예민한 감수성을 남성에도 적용했으면 더 좋은 담론이 됐을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읽어서 나쁠게 없는 책이다. 주류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느끼지 못했던 잠재의식을 깨닫고, 인식의 전환을 할 수 있기에 좋은 독서가 될 수 있다. 나도 읽으며 무의식에 내재된 가부장적 사고를 깨닫고 놀라기도 했다. 아직도 가정폭력이나 묻지마 폭력에 시달리는 건 대부분 여자들이고, 유리천장은 공고하다. 남성은 여성주의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녀들이 '왜' 여성주의를 주창하는지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지금은 남성인 내가 주류 집단에 속해있어도 언제 비주류로 전락할지 모른다. 한 번의 사고로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어떤 시련으로 사회적 위치가 추락할지 모른다. 한국 사회의 주류인 한국인 남성이 유럽이나 미국에 가면 '칭챙총' 취급받는다. 우리는 언제나 주류면서 비주류다.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담론이 아니다. 제대로 이해했을 때 약자와 타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다. 타자를 타자라 생각하지 말고 그들이 겪는 구조적 모순을 깨나가는 데 동참해야 한다. 그건 정의롭기도 하거니와 결국 언제 타자가 될지 모르는 나에게도 이로운 일이다.

 

기존의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목소리가 전부라고 믿을 때 우리는 종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다른(대안) 세계가 가능하며 그것이 또 하나의 현실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유일(단일)한 것으로 군림해 왔던 서구 남성 기존의 목소리는 급속히 상대화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서구 남성 중심의 사유 방식이라면, 여성주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라고 믿는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이 차일를 구성한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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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akeaftermopo3 2021-04-1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 잘읽구갑니다!!

www719 2024-06-29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꼼꼼하게 읽으셨네요 정가 주고 살만한 책인가요
 
나는 왜 저 인간이 싫을까? - 인간관계가 불편한 사람들의 관계 심리학
오카다 다카시 지음, 김해용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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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인간 알레르기> 다.

정신과 의사가 27년간의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이 왜 다른 인간을 미워하게 되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인체의 면역 반응 중에 알레르기가 있는데, 꽃가루나 음식 같은 무해한 이물질을 제거해야 할 이물질로 인식하여 과도한 면역반응이 나타나 신체의 고통도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이와 같은 알레르기 증상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를 날마다 공격하는지, 평소 사이가 좋았던 동료나 친구를 만나기 싫어지게 되는 이유를 인간 알레르기로 설명한다.

는데 솔직히 알레르기에 애착 장애, 인격 장애들을 끼워 맞춘 감이 없진 않았다 (ㅎㅎ). 흥미로운 분석도 있었다. 저자는 알레르기는 항원에 감작된 이후 노출이 반복될수록 더 심해지는 경향을 띠는데 인간관계도 그렇다고 말한다. 나는 이런 분석을 혐오가 만연한 요즘 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도 누군가에 대한 혐오나 증오, 분노 같은 반응이 있었으나 요즘처럼 너, 나, 우리를 직접 향하진 않았다. 대개 신문이나 TV에 나오는 범죄자, 비리 정치인, 비윤리 기업들을 향했다. 생각해보면 이렇다. 산업화 이전엔 대개 구전을 통해 사람들이 항원(미운 짓들)에 감작 되고 TV와 라디오 시대를 거치며 항원에 대한 노출이 증가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고 초기 인터넷 시대에는 인터넷 기사와 인터넷 커뮤니티 안의 경험담으로 항원을 접한다. 인간에 대한 혐오 반응의 전파와 재생산은 이전보다 빨라진다. 최근 수년간은 SNS 시대라고 부를만하다. SNS 사용자가 급격히 증가하며 부정적 에피소드가 폐쇄적 커뮤니티를 통한 전파보다 더 빠르고 넓게 전파된다. 개인 입장에선 매일 부정적 항원에 수도 없이 노출되는 셈이다. 항원에 대한 노출이 반복되며 인간 알레르기는 걷잡을 수 없이 심해진다. 여혐, 남혐, 홍어, 통구이. 서로를 항원으로 인식한 결과다.

저자는 이런 과도한 인간 알레르기가 긍정적이지 않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공감 능력과 자기 성찰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 정말 뻔한 이야기다. 원론적으로 틀리지 않지만 이 사회에 적용하기엔 왠지 아득한 말처럼 들린다. 사람들은 공감도 편 갈라가며 한다. 난 그저 자기 성찰 열심히 해서 내가 누구에게 항원으로 작용하진 않았나 반성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것은 인간 알레르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적인 소화 능력이 미숙한 시기에는 타인의 말과 행동이 그대로 마음속 깊이까지 들어가 알레르기 반응을 피할 수가 없다. 하지만 분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높아지면 말과 행동을 분해하여 해독한 이후 소화하기 때문에 영양분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당신이 거북해하는 사람의 이물성은 본래 그 사람의 말과 행동으로 상처나 고통을 받음으로써 일어난다. 그것이 반복된 결과 상대의 인격에 대해서까지 거부 반응이 일어난다. 이런 거부 반응을 없애려면 발단이 된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체험 하나하나를 곱씹어보고 무해한 수준이 될 때까지 분해해야 한다. 19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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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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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글을 아주 재밌게 쓰는 빌 브라이슨이다. 중년이 되어 다시 찾은 유럽에서 대학생 때 친구와 여행했던 유럽의 기억을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 중년의 시점이 꽤 오래전인 1992년이다. 그래서인지 숙박과 교통 편을 구할 때 느꼈던 난감함의 에피소드가 많다. 지금이라면 자유 여행이라도 숙소나 교통 편을 익스피디아로 간편히 예약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쉬운 여행이면 회고할 거리도 딱히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재밌는 불평을 읽을 수도 없었겠지.

 

보통의 여행기는 좋은 것에 대한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반면 그의 여행기는 마음에 안 드는 것의 이유를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그 부분에서 대부분의 유머가 발생한다. 불합리한 상황을 맞이한 그는 상상 속에서 상대방을 깎아내리곤 하는데 이게 너무 솔직한 나머지 웃기기도 하지만 불편하게 읽힐 여지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상상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 글로 옮긴 그의 상상(망상에 가까운)은 독자를 웃기려 쓴 위악적 요소가 분명하므로 그에게 PC의 굴레를 뒤집어 씌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결정적인 인종 차별과 안타까운 빈부 격차의 현장을 맞이했을 땐 진중한 태도를 취하므로 그의 유머는 선을 넘지 않는다.

 

빌 브라이슨을 읽고 있으면 그가 다방면에 해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번 여행기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희한하게 읽고 나서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유머가 그의 박식함을 가려버렸기 때문인지 기행문이란 장르의 한계가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독서로 꼭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강박은 별로 좋지 않다고 늘 생각한다. 그랬다간 독서 자체가 즐겁지 않은 행위가 된다. 뭐 하러 읽는가. 무슨 책이든 무조건 일단 재밌고 잘 읽혀야 한다. 남는 것 없어도 이렇게 재밌는 책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유머도 글의 미덕이며 미학이다.

그는 진 피트니의 판을 걸고 부엌으로 사라졌는데, 아내가 작은 목소리로 바가지를 엄청나게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컵 두 개와 커다란 병맥주 두 병을 들고 왔다.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그는 이렇게 맹세를 하고는 컵에 맥주를 따랐는데, 마셔보니 상당히 뜨끈한 라거였다.
"음."
나는 맛을 음미하는 듯한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입에서 맥주 거품을 닦을 때는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우리는 앉아서 맥주를 마시면서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대체 이 맥주가 무슨 맛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필시 서커스단 어떤 동물의 소변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맥주 맛이 정말 죽이죠?"
벨기에 남자가 물었다.
"음."
나는 음미하는 소리를 한 번 더 내면서도 다시는 그 맥주를 입에 대지 않았다. 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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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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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년 전 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지금 내 최대 취미는 독서다.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취미는 서평 쓰기. 아 고상하다. 내게 독서는 일종의 삐딱선 타기 같은 것인데 산적한 당면 과제를 외면하는 수단 중 하나라고 말하면 될까? 입시라는 중요 퀘스트 앞에서 '소설책이나 읽고 앉아 있'는 건 참 달콤한 일이었다.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티브이를 보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책을 읽는 것이니 적당히 타협한 삐딱선 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공부하다 졸릴 때 침대에 완전히 눕긴 자신에게 미안하니 엎드리거나 옆으로 비스듬히 눕는 것과 비슷한 행위다. 영원회귀를 말한 게 누구였던가. 10년쯤 지나니 보드 시험을 앞두고 또 소설책이나 붙잡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이 취미는 모처럼 끊기지 않고 관성처럼 지금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당면한 과제가 없는 시절이다. 아니, 넘치는 잉여 시간을 모조리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자기 계발 행위로 채워야 한다는 (폭력적) 정언 명령이 내 당면 과제다. 생산적인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잉여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거나 식스팩을 만들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아니, 그러니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대개 무용하지만 그래도 십 퍼센트 정도의 유용성은 있지 않겠느냐는 논리의 회피다. 게임 같은 완전한 소모 행위는 아니라는 자기 위안도 동반하니 참 쏠쏠한 타협이다. 독서와 병행하는 음주도 매우 좋아하지만 그건 취미가 아니라 생활의 영역이다. 취미라고 하면 조금 슬퍼지는 무언가다. (그러니까 같이 마십시다!)

서평을 왜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처음엔 내가 쓰는 것이 서평이란 자각이 없었다. 그냥 짧은 감상이었으니까. 블로그에 2007년에 남긴 (그야말로) 독후감이 있다. 이런 식이다. 김훈의 문장은 뛰어나다. 양귀자의 문장은 흡인력 있다. 그러니까 이 짧은 독서 후 감상은 맛집 블로거의 포스팅과 비슷한 무엇이었다. 면발이 탱탱하고 국물 간이 잘 되어 있어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요.

서평은 조금씩 길어졌다. 이제는 꽤 긴 글을 써야만 다음 책을 펼 수 있는 단계가 됐다. 이미 즐기는 단계를 넘어선 일종의 자학 행위 같은 것이 돼버렸는데 이런 서평 쓰기를 취미라고 말할 수 있나? 당면한 과제를 피하기 위하여 책을 읽었더니 서평이라는 과제를 다시 당면한 희한한 상황. 그렇게 살다 보니 독서는 소설에서 비평을 엮은 책으로, 또 서평을 엮은 책까지 도달하게 돼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글에 대한 글을 읽고 강박적으로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단계까지 와버린 것이다. 이걸 읽은 이웃들은 글에 대한 글에 대한 글에 대하여 글로 의견을 남길 것이고, 또 나는 글에 대한 글에 대한 글에 대한 글에 대하여 글로 답변을... 그만하자.

언제까지 이렇게 읽고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만약 책으로도 가릴 수 없는 인생의 당면 과제에 맞닥뜨리면 이 자학 행위는 중단될 것이다. 그땐 지금 이 시절을 두고 이렇게 말하려나. 그땐 서서잠행書書潛行하던 시절이었다고. 그러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술을 마시면서.  

이상 감상문에 대한 감상문이었다. 남의 서서비행書書飛行을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다. 구매해서 봤으니 생계독서가에게 조금은 도움을 줬다는 기쁨은 덤이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평은 그가 평하고 있는 책을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다. 따분한 플롯의 책에 대해서는 따분한 서평을,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의 책이라면 마찬가지의 서평을,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는책이라면 폭력적인 서평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면 그 한계를 똑같이 공유하는 서평 말이다. 나는 그것이 독서라는 경험을 단순한 ‘목격담‘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서평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대답은 너무 뻔하다.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것. 카뮈가 스승의 책에 부친,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같은 문장이 그러하듯이. 다른 대답은 찾지 못했다. 이제 당신이 물을 차례다. 3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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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정의 - 문학적 상상력과 공적인 삶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 궁리 / 201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소설의 효용에 대해선 늘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소설은 얄팍한 위안 같은 것인데 그마저도 읽는 사람에게만 작용할 뿐이니 더욱 얄팍한 무언가라고. 소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시큰둥한 개인을 바꿀 수 있을지 조차 장담할 수 없다. 소설, 그거 아무짝에 쓸모없다고 말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소설을 읽는다. 도대체 왜 읽는 것일까.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소설 읽기를 통해 타인의 삶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적 상상력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능력인데, 이것이 법을 비롯한 공적 추론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공정해야 하는 재판관이 문학적 재판관이 되어야 한다니.

 

저자는 문학적 상상력이 공적 합리성의 한 부분이지 그 전체는 아니라고 말한다. 다만 이런 주장을 하는 건 '그것이 우리와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타인의 좋음good에 관심을 갖도록 요청하는 윤리적 태도의 필수적인 요소로 보이기 때문이(17)'라는 것이다. 저자가 추구하는 문학적 상상력의 대척점엔 경제적 공리주의가 있다. 통계와 효용을 우선시하는 경제적 공리주의는 그 자체로 합리적이며, 공정함을 추구해야 하는 법의 기초에 잘 부합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저자는 말한다. "경제적 공리주의는 인간을 단순히 만족의 담지자 혹은 만족이 위치하는 자리 정도로 간주한다. 이와 반대로 소설은 한 인간과 다른 인간 사이의 경계를 세계의 가장 핵심적인 사실 중 하나로 본다. (71)"

 

지표와 통계는 인간의 삶을 쉽게 요약하지만 개인의 삶 하나하나를 대변할 수는 없다. 우리는 청년 실업률과 노인 빈곤율을 기사로 접하지만 생생히 실감하진 못한다. 그러나 잘 쓰인 소설을 통해서라면 그것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가령 김애란을 통해선 자취방이나 편의점에서의 비루한 여성을, 박민규를 통해선 고시원이나 지하철에서의 부박한 삶을 읽을 수 있다. 80년대엔 <원미동 사람들>, 70년대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그런 역할을 했다. 너무 언더 도그마 아니냐고? 살만한 사람들에게도 내적 갈등이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다면 정이현을 읽으면 된다. 이처럼 소설은 '특정한 사회적 상황에서 구현된 인간의 필요와 욕망의 끈질긴 형태를 보여(36)'주고, 독자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평범한 것들을 껴안(41)'게 된다.

 

각각의 개인을 통계화/계량화할 수 없으므로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개인의 서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말은 정말 좋으나 어쩐지 뻔한 힐링 멘트 같다. 나 같은 독자를 위해 저자는 모든 감정이 좋은 길잡이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좋은 길잡이로 기능하기 위한 감정은 분별 있는 관찰자로서 느끼는 감정이다. 쉽게 말하면 감정이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 관계를 왜곡하지 않아야 하며, 사건에 연루된 관계자의 것이 아닌 관찰자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아닌 걸 감성 팔이로, 우리 편이라는 이유로 실드칠 순 없다는 말 되겠다.

 

저자는 문학적 심판관이 내린 시적 심판으로 세 가지 판례를 소개한다. 죄수 인권, 여성 노동자 인권, 동성애자 인권에 관한 사건이다. 당시엔 그것들이 쉽게 경시되곤 했다. 그러나 재판관들은 역사와 사회적 맥락에 대한 신중한 고찰과 약자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공감을 통해 그것들을 지켜냈다.

 

결론은 '헌법이라는 명확한 문서의 틈새(241)'를 메우는 건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라는 것이다. 단, 저자는 통상적 법적 추론이 무분별한 정서에 종속되어서는 안 되고 법관의 상상력은 엄격한 헌법적 제약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공감과 분노의 정서가 정확한 법적 추론과 사실에 대한 확실한 이해와 연결됐을 때 사회적 약자를 지킬 수 있는 감정으로 기능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내게도 남의 죄를 심판하고 형량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문학적 상상력을 풍부하게 발휘해서 인간적인 판사로 매스컴을 타고 페북 스타가 되어 글 쓸 때마다 따봉 수백 개를 받고 베스트 셀러 작가로 데뷔를...... 농담이다. 꼭 공적 추론의 장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저자는 이것을 소설을 통해 가장 잘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기사, 르포 문학 더 나아가 다큐멘터리나 사실적 영화 같은 영상물이 경우에 따라 소설보다 더 좋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라타니 고진도 말했다. 근대 문학은 이미 망했다고. 이런 뜻으로 한 말 맞나? 책을 안 읽어봐서요... 헤헷.

 

주장에서 한치의 윤리적 흠결도 찾을 수 없는 책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공허한 힐링 메시지로 들리기도 한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판사에게 문학적 상상력까지 요구하다니. 과로사 안 하면 다행이다. 판사 개인의 문학적 상상력만 확보되면 능사일까? 아니다. 사회가 갖춰야 한다. 시민 개개인이 타인을 상상하고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게 우선이고, 시민들의 합의하에 사회의 불합리를 하나씩 없애나가 사회적 약자를 줄이는 게 더욱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음, 되는대로 지껄이고 보니 이건 더 힐링 메시지 같네. 하핫.

평등 보호에 대한 논의는 일반적으로 어떤 집단이 겪었던 차별의 역사에 대해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정치적으로 무력한 상황에 대한 고찰까지도 요구한다. 보다 자세하고, 구체적이며, 감정을 이입하는 형태의 고찰은 이 사건을 소외되고 멸시받은 다른 집단에 대한 박해의 역사와 연결짓도록 하는데, 이는 차별의 역사를 드러내는 데 일조한다. 사실상 이런 종류의 조사는 이해를 위해 충분한 것일 뿐만 아니라 필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면밀한 조사 없이는 마이클 하드윅의 상황과 정당한 이유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폭력적 범죄자의 행동 사이의 중요한 구분을 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평등 보호에 대한 논의를 잘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진정으로 위험한 것에 대한 비난과 비합리적인 차별을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24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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