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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비행 - 생계독서가 금정연 매문기
금정연 지음 / 마티 / 2012년 8월
평점 :
불과 3년 전 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지금 내 최대 취미는 독서다.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취미는 서평 쓰기. 아 고상하다. 내게 독서는 일종의 삐딱선 타기 같은 것인데 산적한 당면 과제를 외면하는 수단 중 하나라고 말하면 될까? 입시라는 중요 퀘스트 앞에서 '소설책이나 읽고 앉아 있'는 건 참 달콤한 일이었다.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티브이를 보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책을 읽는 것이니 적당히 타협한 삐딱선 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공부하다 졸릴 때 침대에 완전히 눕긴 자신에게 미안하니 엎드리거나 옆으로 비스듬히 눕는 것과 비슷한 행위다. 영원회귀를 말한 게 누구였던가. 10년쯤 지나니 보드 시험을 앞두고 또 소설책이나 붙잡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이 취미는 모처럼 끊기지 않고 관성처럼 지금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당면한 과제가 없는 시절이다. 아니, 넘치는 잉여 시간을 모조리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자기 계발 행위로 채워야 한다는 (폭력적) 정언 명령이 내 당면 과제다. 생산적인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잉여 시간에 영어 공부를 하거나 식스팩을 만들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아니, 그러니 나는 여전히 책을 읽는다. 대개 무용하지만 그래도 십 퍼센트 정도의 유용성은 있지 않겠느냐는 논리의 회피다. 게임 같은 완전한 소모 행위는 아니라는 자기 위안도 동반하니 참 쏠쏠한 타협이다. 독서와 병행하는 음주도 매우 좋아하지만 그건 취미가 아니라 생활의 영역이다. 취미라고 하면 조금 슬퍼지는 무언가다. (그러니까 같이 마십시다!)
서평을 왜 쓰기 시작했는지는 모른다. 처음엔 내가 쓰는 것이 서평이란 자각이 없었다. 그냥 짧은 감상이었으니까. 블로그에 2007년에 남긴 (그야말로) 독후감이 있다. 이런 식이다. 김훈의 문장은 뛰어나다. 양귀자의 문장은 흡인력 있다. 그러니까 이 짧은 독서 후 감상은 맛집 블로거의 포스팅과 비슷한 무엇이었다. 면발이 탱탱하고 국물 간이 잘 되어 있어요.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요.
서평은 조금씩 길어졌다. 이제는 꽤 긴 글을 써야만 다음 책을 펼 수 있는 단계가 됐다. 이미 즐기는 단계를 넘어선 일종의 자학 행위 같은 것이 돼버렸는데 이런 서평 쓰기를 취미라고 말할 수 있나? 당면한 과제를 피하기 위하여 책을 읽었더니 서평이라는 과제를 다시 당면한 희한한 상황. 그렇게 살다 보니 독서는 소설에서 비평을 엮은 책으로, 또 서평을 엮은 책까지 도달하게 돼버렸다. 그러니까 나는 글에 대한 글을 읽고 강박적으로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단계까지 와버린 것이다. 이걸 읽은 이웃들은 글에 대한 글에 대한 글에 대하여 글로 의견을 남길 것이고, 또 나는 글에 대한 글에 대한 글에 대한 글에 대하여 글로 답변을... 그만하자.
언제까지 이렇게 읽고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만약 책으로도 가릴 수 없는 인생의 당면 과제에 맞닥뜨리면 이 자학 행위는 중단될 것이다. 그땐 지금 이 시절을 두고 이렇게 말하려나. 그땐 서서잠행書書潛行하던 시절이었다고. 그러곤 다시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술을 마시면서.
이상 감상문에 대한 감상문이었다. 남의 서서비행書書飛行을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었다. 구매해서 봤으니 생계독서가에게 조금은 도움을 줬다는 기쁨은 덤이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서평은 그가 평하고 있는 책을 닮은, 닮으려고 노력하는 서평이다. 따분한 플롯의 책에 대해서는 따분한 서평을, 복잡한 미로 같은 구조의 책이라면 마찬가지의 서평을, 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자행하고 있는책이라면 폭력적인 서평을,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책이라면 그 한계를 똑같이 공유하는 서평 말이다. 나는 그것이 독서라는 경험을 단순한 ‘목격담‘으로 축소시키지 않기 위해 서평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좋은 서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 대답은 너무 뻔하다. 좋은 ‘서평‘ 이전에 좋은 ‘글‘이어야 한다는 것. 카뮈가 스승의 책에 부친,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같은 문장이 그러하듯이. 다른 대답은 찾지 못했다. 이제 당신이 물을 차례다. 3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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