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 발칙한 글쟁이의 의외로 훈훈한 여행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글을 아주 재밌게 쓰는 빌 브라이슨이다. 중년이 되어 다시 찾은 유럽에서 대학생 때 친구와 여행했던 유럽의 기억을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그 중년의 시점이 꽤 오래전인 1992년이다. 그래서인지 숙박과 교통 편을 구할 때 느꼈던 난감함의 에피소드가 많다. 지금이라면 자유 여행이라도 숙소나 교통 편을 익스피디아로 간편히 예약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쉬운 여행이면 회고할 거리도 딱히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렇게 재밌는 불평을 읽을 수도 없었겠지.

 

보통의 여행기는 좋은 것에 대한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반면 그의 여행기는 마음에 안 드는 것의 이유를 설명하는 데 집중한다. 그 부분에서 대부분의 유머가 발생한다. 불합리한 상황을 맞이한 그는 상상 속에서 상대방을 깎아내리곤 하는데 이게 너무 솔직한 나머지 웃기기도 하지만 불편하게 읽힐 여지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상상은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 글로 옮긴 그의 상상(망상에 가까운)은 독자를 웃기려 쓴 위악적 요소가 분명하므로 그에게 PC의 굴레를 뒤집어 씌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더군다나 결정적인 인종 차별과 안타까운 빈부 격차의 현장을 맞이했을 땐 진중한 태도를 취하므로 그의 유머는 선을 넘지 않는다.

 

빌 브라이슨을 읽고 있으면 그가 다방면에 해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번 여행기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희한하게 읽고 나서 남는 것은 별로 없었다. 유머가 그의 박식함을 가려버렸기 때문인지 기행문이란 장르의 한계가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독서로 꼭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강박은 별로 좋지 않다고 늘 생각한다. 그랬다간 독서 자체가 즐겁지 않은 행위가 된다. 뭐 하러 읽는가. 무슨 책이든 무조건 일단 재밌고 잘 읽혀야 한다. 남는 것 없어도 이렇게 재밌는 책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유머도 글의 미덕이며 미학이다.

그는 진 피트니의 판을 걸고 부엌으로 사라졌는데, 아내가 작은 목소리로 바가지를 엄청나게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컵 두 개와 커다란 병맥주 두 병을 들고 왔다.
"아주 좋아하실 거예요."
그는 이렇게 맹세를 하고는 컵에 맥주를 따랐는데, 마셔보니 상당히 뜨끈한 라거였다.
"음."
나는 맛을 음미하는 듯한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지만 입에서 맥주 거품을 닦을 때는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우리는 앉아서 맥주를 마시면서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대체 이 맥주가 무슨 맛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필시 서커스단 어떤 동물의 소변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맥주 맛이 정말 죽이죠?"
벨기에 남자가 물었다.
"음."
나는 음미하는 소리를 한 번 더 내면서도 다시는 그 맥주를 입에 대지 않았다. 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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