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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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을 가끔 이용한다. 이곳저곳에서 대리기사를 불러봤지만 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모두 같았다. 사장님. 잠시 차를 맡길 뿐이지만 그들이 몇 살이건 30대 초반의 나는 사장님이 된다. 올 가을 제주도에 갔을 땐 서귀포 시내에서 법환포구까지 대리운전을 이용했다. 숙소는 버스는 물론 택시 하나 안 보이는 곳에 있었다. 난 대리기사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여 복귀 방법을 물었다. 그는 걸어가면 된다고 대답했다. 걷는다. 차가 없으니 걷는다.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가 얼마나, 어디까지 걸어야 하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대학교 시간강사였던 저자는 대학교 시스템이 학부생, 대학원생,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공고한 착취 체계라고 말한다. 생활비조차 제대로 조달할 수 없을 때 저자는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대학교가 보장해주지 않던 4대 보험을 맥도날드는 당연하다는 듯 보장해준다. 저자는 대학교를 그만두고 육체노동을 시작한다. 대리운전이다.

책은 생생한 노동의 경험으로 차 있다. 그들이 어떤 기준으로 콜을 받는지, 대중교통이 끊겼을 때 어떻게 도심으로 복귀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지, 이런 대리기사들의 생태계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책은 흥미롭다. 그러나 마냥 흥미롭지만은 않았다. 사회의 민낯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3km 거리를 택시로 가고 있는데 단 2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왜 이렇게 늦"느냐며 다른 대리기사를 불러 가는 이야기, 두 명 이상의 대리기사를 호출하고 먼저 온 기사에게 운전을 맡기는 이야기, 수 킬로미터를 뛰어왔는데 50m 앞에서 호출을 취소하는 이야기를 읽을 땐 실로 참담했다. 이것들은 거대한 악의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행위다. 그래서 우리를 더욱 절망케한다.

저자는 '이 사회 어디도 타인의 운전석이 아닌 곳이 없'다고 말한다. 대리운전할 때 창문, 에어컨, 시트 포지션, 오디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행위뿐만 아니라 주체로서의 사유까지 빼앗긴다. 대리기사는 손님의 말에 적당한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비단 대리기사의 운전석 뿐만 아니라 다른 곳곳에서도 개인의 의지가 통제/검열된다. 저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 자신이 주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고 고백한다. 물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스템의 균열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실로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이런 저자의 진단은 자칫 허무하게 읽힐 수도 있다. 대부분 남의 공간에서, 남이 시키는 일을 하고, 남이 원하는 사유를 하고, 남이 주는 돈을 받으며 살아가니 말이다. 대리인간이 아닐 수 없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저자는 시간강사로 일하며 논문에 매달릴 때 자신이 하지 않던 가사/육아 노동을 아내가 온전히 대리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아내가 자신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음을 깨닫고 존중할 수 있게 됐다고. 그러니까, 지금 누리는 삶도 온전한 자신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 삶은 내 몫을 누군가 대리하기에 영위된다. 부모, 가족, 배우자, 그도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 어쩔 수 없는 대리사회에서 살지라도 내 삶에 타인의 지분이 있음을 자각할 때 서로의 삶을 조금 나아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대리사회의 욕망을 직시할 때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고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고 말한다. 멋진 말이지만 왠지 거창하다. 타인을 각자의 주체로서 존중하자고 이해하면 충분할 것이다.

법환포구 숙소 앞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들리고 캄캄했다. 나는 대리기사를 그대로 보내기 미안해 만 원을 추가로 지불했다. 만 원이면 큰 길로 나가서 택시라도 탈 수 있을 것이었다. 대리운전 회사에서 운영하는 셔틀이 있다면 그거 괜한 호구짓 아니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상관없다. 그가 언젠가 먼 곳에 뚝 떨어졌을 때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니까. 얼마 전에 서울에서 만난 대리기사에겐 음료수라도 사 드시라고 오천 원을 내밀었다. 첫차가 돌아다닐 시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또한 언젠가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아니라도 상관없다. 대리기사가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회복하기 위해 일하는 중이라면 작은 응원같은 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것조차 아니라도 좋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쌓여야 좋은 세상이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좋은 세상은 타인을 위한 작은 손해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믿고 싶다.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그 공간에서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의 욕망을 대리하며 ‘가짜 주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대학뿐 아니라 내가 속했던 여러 공간에서 대개 주체로 서지 못했다. 누구도 호칭 뒤에 숨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그와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의도치 않게 밀려나고서야 나는 누구였는지 나는 거기에서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았고, 그때는 너무 늦었다. 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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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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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문학상 후보로 매년 이름을 올리지만 아직 수상을 하지 못한, 노벨상을 기다리는 사이 너무 늙어버려 자칫하단 노벨상 받기 전에 돌아가실 것 같은(흑흑) 밀란 쿤데라 할배의 처녀작입니다. 1967년 작품이니 무려 49년 전이네요. 밀란 쿤데라는 체코에서 태어났으나 1970년엔 공산주의 체제하 체코에서 추방당합니다. 추방의 발단이 된 작품이 바로 『농담』입니다. 소설이 전통과, 종교와, 자유를 통제하는 공산주의를 풍자했기 때문이죠. 500페이지가 넘으니 책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제목이 왜 '농담'인지만 말해야겠군요.

소설에서 가장 많은 목소리를 내는 중심인물은 루드비크입니다. 루드비크는 공산당원이었지만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고 유머를 즐길 줄 아는 대학생이었습니다. 그에겐 마르게타라는 여친이 있었는데 그의 마음을 잘 몰라줍니다. 왜 그런 것 있잖습니까?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의 치마를 아이스케키 한다든지, 고무줄놀이 가서 훼방을 놓는 헤헤헿... 아앗 정신 차려야지 아무튼 철없는 루드비크는 여친한테 삐쳤습니다. 그래서 자기 딴엔 농담이라고 짓궂은 말을 적은 엽서를 보내는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라구요. 루드비크의 인생은 이 농담 엽서 한방에 훅 갑니다. 마르게타가 진지충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마르게타는 엽서를 고자질했습니다. 다행히 인민재판의 주재자는 절친 제마네크네요. 어라, 그런데 갑자기 제마네크 요놈아가 씹정색을 하며 루드비크의 당원 자격을 박탈합니다. 아아 불쌍한 루드비크. 그는 정치범들이 모인 특수 (노가다) 부대에 징집되어 곡괭이질만 죽어라 합니다. 다행히 그곳에서도 외출과 월급이 있군요. 루드비크는 외출에서 아름다운 여자 루치에를 만나게 됩니다. 정신과 신체의 자유 모두 속박당한 젊은이의 몸이 얼마나 끓겠습니까. 그런데, 루치에는 몸을 허락하지 않는군요. 이런... 루드비크는 자기가 어떻게 위험을 무릅쓰고 한밤중에 빠져나왔는데 허락을 하지 않는 거냐고 묻습니다. 결국 루치에가 처녀라서 자신에게도 몸을 허락하지 않는 걸로 혼자 결론 내리고 폭발합니다. 뺨을 때리고 헤어지네요. (체남충 out!)

사회로 나와 정신 차려보니 벌써 30 중반입니다. 인생 넘나 비정한 것. 루드비크는 자신을 나락으로 몰았던 제마네크에게 복수하려 합니다. 제마네크의 부인을 꼬셔서 자빠트리면 멋진 복수가 될 것이라 생각하죠. 루드비크는 도도한 도시남자의 매력을 물씬 풍기며 완벽하게 헬레나를 제압합니다. SM 플레이까지 하네요. 쿤데라 할아버지 오래 살아서 야한 거 계속 써주세... 아앗 저도 모르게 음란마귀가!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거리에서 만난 제마네크는 이미 수년 전부터 부인 헬레나에게 관심이 1도 없는 상태였네요. 게다가, 축 처진(...) 헬레나와는 다르게 그의 옆엔 팽팽한 20대 초반 여친이 있네요. 이미 옆구리에 낀 여자의 차이로 완패인데, 제마네크의 반응은 거의 이런 식이네요. 루드비크 풉... 너 헬레나랑 풉ㅂ... 잤다며? 풉! ㅋㅋㅋ. 더 나쁜 건 제마네크는 자신이 루드비크에게 저질렀던 짓을 기억도 잘 못 하고, 루드비크가 젊어서 그랬던 것처럼 자유로운 사상으로 대학생들에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거지요. 얄궂은 운명의 차이에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그 와중에 헬레나는 영문도 모른 채 루드비크에게 하트 뿅뿅을 날리고 있고요. 루드비크는 복수는커녕 거의 울고 싶은 기분입니다. 제마네크는 루드비크 너 ㅋㅋ 잘 해봐라 ㅋㅋ 하며 떠나는군요... 이제 이 사건은 평생 이불킥 감입니다.

루드비크는 패배감에 휩싸이고, 헬레나에게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헬레나는 절망에 휩싸입니다. 헬레나는 기자였는데, 그녀를 따라다니는 20대 초반 카메라 기사가 있습니다. 요 카메라 기사는 세 보이려고 가죽잠바나 입는 얼치기 허세남인데 헬레나를 좋아합니다. 가죽잠바 청년은 그녀를 위로해주기 위해 숙소로 데려가죠. 헬레나는 이 마당에 정신 못 차리고 그래도 널 사랑했다며 루드비크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나선 가죽잠바 청년에게 나가서 편지를 루드비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가죽잠바 청년은 헬레나에게 멋지게 키스하고 내 다녀오리다! 하는군요. 순정만화 캐릭터 같습니다. 여기까진. 헬레나는 가죽잠바 청년이 나간 사이 그의 옷 주머니에서 진통제 약통을 찾아내고 약통에 든 약을 모두 먹습니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습니다. 지금까진.

식당에서 패배감에 젖어 낮술 마시던 루드비크는 가죽잠바 청년에게 편지를 전해 받습니다. 내용이... 이런 그녀가 자살할 것 같습니다! 루드비크는 가죽잠바 청년과 황급히 숙소로 뛰어들어와 헬레나를 찾습니다. 이런, 어디에도 그녀가 없군요. 점점 더 그녀가 시체로 발견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이제 숙소의 마지막 장소에 도달하는데, 화장실이네요. 문이 잠겨있고 대답이 없습니다. 절망적인 예감에 화장실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갔는데 헬레나는. 이런...

똥을 싸고 있네요. 어떤 은유도 아닌 실재하는 똥 말입니다 똥. 헬레나는 다 꺼져버리라며 속옷도 올리지 못한 채 풀밭으로 뛰어갔다가 위장이 요동치는 바람에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서 폭풍 설사를 합니다. 가죽잠바 청년이 변비약 들고 다니기 쪽팔리다며 진통제 약통에 그것을 담아 다녔던 것이죠. 이 소란이 다 뭐랍니까. 이 셋 모두에게 인생이란 짓궂은 농담 같군요.

여기까지 주요 스토리였습니다. 주말 내내 지겹게 읽고 또 이렇게 쓰려니 정말 지겹네요. 왠지 다 읽고 나니까 설사 얘기만 한 것 같은데, 그렇진 않습니다. 이 소설은 챕터마다 인물이 바뀌며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주요인물 중 루드비크가 사랑했던 루치에만이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로지 남들에게 관찰된 모습으로 서술되죠. 루드비크는 루치에가 자신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은 게 처녀성의 상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루드비크의 친구 코스트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16살 때 6명에게 강간당했고 그로 인한 성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트라우마를 끈기 있게 들어주고 보듬어 안아준 코스트카에겐 몸을 허락하죠. 타자를 이해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루드비크는 이런 사실을 전통 축제인 '왕들의 기마행렬'을 보고 깨닫습니다. 젊었을 적 '왕들의 기마행렬' 구성원으로 참여해 말위에 올라타 있을 땐, 내부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정작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 관람객의 입장에서 행렬을 바라보니 비로소 그 행렬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고 느낍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동에서 모두 빠져나와 인생을 바라봤을 때 비로소 어떤 삶의 비의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인생 전체가 철회 불가능한 농담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밀란 쿤데라는 농담 쳤다가 당에서 추방당한 루드비크처럼, 이 농담 같은 『농담』을 썼다가 체코에서 추방당합니다. 그러나 어찌 됐건 자유의 나라 프랑스에 정착했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으니 그다지 비극적인 결말은 아니네요. 밀란 쿤데라가 500페이지 넘게 공들여 문장을 쓰다 화려한 설사 마무리로 공산주의를 까는 걸 보고 있자면, 인간에게 자유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상 설사, 아니 농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이해는 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에 대한 그런 식의 증오는 끔찍한 것이고 죄악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 증오는 당신의 저주가 되어 버렸어요.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까요. 3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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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란 무엇인가 -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김희진.정일권 옮김 / 난장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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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저자 이름과 책 제목이 간지 난다. 쥬드 씨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계시나요. 슬라보예 지젝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있습니다 (근엄, 진지). 상상만 해도 멋지군. 농담처럼 썼지만 책 제목을 보고 고르긴 했다. 좌파들이 자주 인용하는 슬라보예 지젝을 한 권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고, 저자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는 터라 그중 제목에서 흥미가 동하는 책을 주문했다. 세상이 왠지 짜증 나고 화나는 이유에 대한 답을 조금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1.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우리는 폭력이란 단어를 들으면 물리적 폭력을 떠올린다. 범죄나 테러, 폭동, 폭력 시위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는 폭력은 주관적 폭력(subjective)이고 그것은 하나의 현상이지, 근원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머지 둘은 객관적 폭력(objective)인데, 하나는 하이데거가 '존재의 집'이라고 칭한 언어를 통해 구현되는 상징적(symbolic) 폭력이다. 다른 하나는 구조적(systemic) 폭력이다. 지젝은 상징적, 구조적 폭력을 포함한 객관적 폭력의 이해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주관적 폭력은 정상적인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객관적 폭력은 정상적인 상태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면 위로 드러난 폭력을 비판하고 관용을 장려하는 것은 언뜻 정의로워 보이나 객관적 폭력이 그것들을 지탱한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 (ㅎㅎ). 책에선 빌 게이츠, 무함마드 만평 때문에 발생한 덴마크에 대한 무슬림들의 폭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들을 예시로 든다. 그것들을 심층 분석해 가시적인 폭력에 구조적, 상징적 폭력이 어떻게 관여했는지, 기저에 깔린 병리적 심리가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빌 게이츠는 설명이 필요 없는 부자다. 그는 수억 달러를 기아와 말라리아와의 싸움과 교육에 기부했다. 그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기부하려면 일단 돈을 벌어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기부의 이면엔 지독한 사업가의 면모가 있다. 실질적 독점을 노리며 경쟁자들을 파산시키거나 사들이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치사한 거래 수법을 동원한다. 그의 자선은 무자비한 이윤 추구를 상쇄하는 수단이다.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선진국은 원조와 차관 등을 통해 미개발 국가들을 '도움'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후진국의 빈곤에 연루돼 있으며, 공동책임이 있다는 핵심적 쟁점을 회피한다. 이는 초자아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기만이다.

빌 게이츠를 위시한 자선을 베푸는 자본가들은 결국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이며,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선한 자에 대한 심문>이라는 시를 인용해 대답한다. 그 시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다.

이제 우리의 말을 들으라, 우리는
그대가 우리의 적임을 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이제 그대를 벽 앞에 세우리라. 그러나 그대의 미덕과 장점들을 고려하여
우리는 그대를 좋은 벽 앞에 세우고 그대를
좋은 총의 좋은 탄환으로 쏠 것이며 그대를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묻어 주리라.

...... ㅎㅎㅎ

2.
지젝은 주관적 폭력과 싸운다고 하면서 구조적 폭력에 가담하는 자들이 위선적이라 말한다. 그에 따르면 혐오하는 그 폭력을 유발하는 것이 구조적 폭력이다.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자, 사회적 폭력이 가진 근본 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신비화다. 정작 가장 잔혹한 형식의 폭력에 대해선 다양한 메커니즘을 동원해 무감각하게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일은 종종 희생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동정의 형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구조적 폭력이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근원은 결국 자본 주의 체제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유주의자들이 가진 폭력에 대한 명제―필요하면 폭력을 쓰되, 폭력이 결코 합법적이지 않다는―는 부적절하고 이 생각은 뒤집어져야 한다.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폭력은 언제나 합법적인데, 이들이 가진 지위가 이들이 폭력에 노출된 결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반드시 폭력을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고 전략적 고려를 통해 이뤄져야 한다는 단서를 붙인다.

3.
간헐적으로 지젝이 인간 본성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택의 자유와 관련해서도 자유주의는 역시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자유주의 문화는 타문화에 속한 개인들이 선택의 자유를 가지지 못한 점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여성 할례, 여성의 조혼, 영아 살해, 일부다처제, 근친상간 등과 같은 쟁점들은 그 명백한 사례들이다. 그러면서도 자유주의는 우리의 자유로운 사회에서 가해지는 엄청난 압박, 예를 들어 여성들로 하여금 성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지 않기 위해 성형수술, 미용을 위한 치아 임플란트, 보톡스 주입 등을 시술받도록 강제하는 그런 압박은 애써 무시한다. 205p

 

지젝은 성차별적 구조가 여성들을 과열된 성형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러나 남성에서 선택받으려는 목적 말고도 성형 수술을 하는 이유는 많다. 성시장에서의 경쟁력보다 중요한 건 여성들도 여성이기 전에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그저 본능적으로 미美 추구한다. 자신이 나아지기 위해 수술한다는 말이다. 지젝의 논리로 남성의 성형 수술이 늘어나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늘날 악을 대표하는 좋은 예는 환경을 오염시키고 사회적 유대가 무너져 가는 폭력적인 세상에 살아가는 평범한 소비자들이 아니다. 그런 전반적 파괴와 오염을 조성하는 데 전적으로 관여했으면서, 돈을 써서 자기 자신이 저지른 결과로부터 쏙 빠져나오는 자들, 빗장 공동체에 살면서, 유기농 식품을 사다 먹으며,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자들이 바로 악이다. 59p

 

평범한 소비자들은 과연 선해서 위해를 끼치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단지 위해를 끼칠 능력이 없을 뿐이다. 부촌과 빈민가를 떠올려보라. 평범한 사람들은 평범한 방식으로 환경에 위해를 끼친다. 평범한 사람이 가진 자의 위치로 격상되면 자연 보호 구역에서 휴가를 즐길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결코 이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비판하는 건 좀 공허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의 문제의식대로라면 해결책은 모두 같은 수준의 생활을 향유하는 것밖에 없다. 만약, 이 단락으로 비판하고 자 했던 게 가진 자들이 도덕의 훈장까지 차려는 것이었으면 절반쯤은 동의한다.

4.
일주일 동안 이 책과 씨름했다. 읽기만 하면 어찌나 잠이 잘 오던지... 헤겔이니 라캉이니 마구 인용하는데 나는 그 사람들을 모르니 잘 읽힐 리가 있나. 지젝은 스스로 인정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약한 자들의 폭력(가시적인)은 정당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300페이지 동안 그 결론을 향해 대중문화와 역사를 종횡으로 누비며 달려간다. 영화에 숨겨져 있는 심리들을 밝혀내는 부분과, 무슬림의 폭력이 좌절로부터 비롯됐다는 분석 등은 흥미로웠다. 다만 폭력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데, 나는 지젝의 결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젝의 말대로라면 한국 시위의 쇠 파이프, 죽창도 폭력적 구조에서 해방되기 위한 수단으로 긍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쇠 파이프나 죽창이 과연 구조적 폭력의 근원에 닿는가? 그것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구조적 폭력의 핵심에 닿지 않고, 단지 전경의 몸뚱이와 얼굴에 닿을 뿐이다. 그렇기에 난 시위에서의 물리적 폭력이 늘 공허하다고 생각한다.

결론에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세계적 철학가의 지적 사유 방식을 엿본 것에 대해선 나름대로 만족한다. 그러나 다시 지젝을 읽을 것이냐 물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겠다.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니다. 체크한 문단이 아주 많다는 것만 봐도 결론 외의 사유는 내 마음에 들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철학자들을 과하게 인용하는 서술 방식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책을 읽는 건 철학에 무지한 사람들에겐 고역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는 모두, 지각의 착각perceptual illusion과 비슷한 일종의 윤리적 착각에 사로잡혀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이런 착각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추상적으로 추론하는 능력이 엄청나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적-윤리적 대응은 아주 오래된 본능적 반응에 길들여져서 고통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 동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 대부분은 버튼 하나를 눌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총으로 누군가를 직접 겨냥해 쏘는 일에 대해 더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다. 7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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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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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담꾼, 해학의 대가! 이기호의 첫 소설집이다. 난 2009년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에 수록된 「김 박사는 누구인가」로 이기호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독특하고 강렬했다. 서간문 형식의 소설은 가끔 있긴 했다만 이건 충격이었다. 주고받는 이메일의 형식을 빌어 인간 심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데다가 마지막에는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빈칸이라니! 이후 이기호의 소설을 찾아 읽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단편집 하나 장편 하나 밖에 못 읽었다 하하. 어쨌든 이번에 이기호 비긴즈를 주문해 읽었다.

두드러지는 특징은 단연 형식의 파격이다. 표제작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성경의 형식과 의고체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버니」는 랩 가사, 「햄릿 포에버」는 피의자 조서 형식으로 진행된다. 몇몇 소설에선 소설가가 변사의 위치에 서서 직접 이야기를 통제하기도 한다. 무드는 해학적, 무게 잡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보도방 업자, 앵벌이, 광신도와 바바리 맨, 아들을 소처럼 부리는 엄마 등. 일반적 시선에선 도덕적이라 볼 수 없는 이들의 뒷이야기를 풀어헤쳐놓는다. 해학적 사연 끝에 궁극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건 사회와 위정자들이다. 심지어 이념에 천착하는 운동권도 조롱의 대상이 된다. 진짜 나쁜 건 이런 시시한 약자가 아니라는 걸 영리하게 비꼬아서 말한다. 당연히 현실에서 저들을 만나면 화가 나겠으나, 읽고 나서 저들에게 연민이 드는 건 소설가의 재능 탓이다. 유쾌하다. 그러나, 결국은 그늘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회의 그늘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소설 마니아 당신. 사변적이고 무게 잡는 소설에 지쳤다고? 그럼 이기호를 읽으면 된다.

당연, 우리의 이야기는 지하철에서부터 시작해 지하철로 끝나는 것이다. 별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도,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루 목표 금액을 채우기 위해, 그래서 형님의 체인 세례를 당하지 않기 위해, 수시로 돈을 헤아렸을 뿐이다. 그 세월이 십 년이다. 십 년이 어디 짧은 시간인가. 설혹, 불만이나 고민 따위가 있다 하더라도 뭉개지고 바스러져버리고 마는 시간.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가 급했을 뿐이다. 가난하면 머릿속의 생각도 온통 가난에 쏠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당신, 지금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 때문에 풀어놓을 말들이 많다고? 그래, 그럼 우리에게 와. 딱 하루만 우리와 함께 지하철을 돌자고. 그러고 나서 무슨 생각이 드는지 말해보자고. 유부남이 떠오르는지. 유부국수가 생각나는지. 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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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별장, 그 후 민음사 모던 클래식 70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유디트 헤르만의 첫 소설집이다. 먼저 읽은 『단지 유령일 뿐』보다 좋았다. 외국 작가의 소설에선 감성적인 면을 찾기가 힘들었는데, 유디트 헤르만은 감성적이다. 신파가 아니라 건조하며 다 읽은 후엔 다시 곱씹게 만드는 감성이다.

어찌보면 밋밋한 이야기들이다. 작가의 말대로 '인생은 극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마음 한편에서 가끔 삶의 일탈을 바라곤 한다. 수록된 단편 「허리케인」은 휴양지에서 만난 남녀 4명의 이야기다. 그중 크리스티네는 부인이 있는 섬 남자를 사랑한다. 그에게는 부인이 있고, 크리스티네에겐 돌아가야 하는 집이 있다. 모든 건 임시다. 여행도 사랑도. 남들은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데, 크리스티네는 섬에서 허리케인을 기다린다. 그 마음은 어떤 것일까. 크리스티네는 여행지에서 삶을 뒤흔들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소설 「소냐」는 결혼할 애인을 둔 남자가 아름답지도 않고 매력도 없는, 그저 나긋나긋한 소냐에게 끌리는 이야기다. 애인을 사랑하지만 소냐에겐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을 느낀다. 둘은 많은 시간과 심지어 밤을 함께 보내면서도 어떠한 육체적 접촉도 하지 않는다. 소냐는 남자의 결혼 소식을 듣고선 화를 내고 남자의 삶에서 사라진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예를 들면 어떤 사건, 센세이션, 변화 같은 것을 열망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열망은 불쑥 나타날 때처럼,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라고 남자는 회상한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삶에서 우리는 언제나 변화를 상상한다. 사랑도 예외는 아닐지 모른다.

감성적이며 때론 섬찟한 이 불친절한 이야기들은 큰 감동은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에 작은 파동을 남긴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고, 손을 올렸다 다시 내렸고,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사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 다만 나른하고 텅 비고 조용하기만 한 날들, 물속에 있는 물고기 같은 삶과 이유 없는 웃음이 뭐가 어떻단 말인가? 나는 내 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그것이 내 삶을 힘들게 한다고 말하고 싶었고, 애인 곁에 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고, 심리 치료사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나는 산호 팔찌의 비단 끈을 잡아당겼다. 675개의 분노와 같은 붉고 작은 산호 구슬들이 내 가녀린 손목에서 폭죽처럼 튀어나갔다. 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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