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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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담꾼, 해학의 대가! 이기호의 첫 소설집이다. 난 2009년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에 수록된 「김 박사는 누구인가」로 이기호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독특하고 강렬했다. 서간문 형식의 소설은 가끔 있긴 했다만 이건 충격이었다. 주고받는 이메일의 형식을 빌어 인간 심리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는 데다가 마지막에는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빈칸이라니! 이후 이기호의 소설을 찾아 읽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단편집 하나 장편 하나 밖에 못 읽었다 하하. 어쨌든 이번에 이기호 비긴즈를 주문해 읽었다.

두드러지는 특징은 단연 형식의 파격이다. 표제작 「최순덕 성령충만기」는 성경의 형식과 의고체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버니」는 랩 가사, 「햄릿 포에버」는 피의자 조서 형식으로 진행된다. 몇몇 소설에선 소설가가 변사의 위치에 서서 직접 이야기를 통제하기도 한다. 무드는 해학적, 무게 잡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보도방 업자, 앵벌이, 광신도와 바바리 맨, 아들을 소처럼 부리는 엄마 등. 일반적 시선에선 도덕적이라 볼 수 없는 이들의 뒷이야기를 풀어헤쳐놓는다. 해학적 사연 끝에 궁극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건 사회와 위정자들이다. 심지어 이념에 천착하는 운동권도 조롱의 대상이 된다. 진짜 나쁜 건 이런 시시한 약자가 아니라는 걸 영리하게 비꼬아서 말한다. 당연히 현실에서 저들을 만나면 화가 나겠으나, 읽고 나서 저들에게 연민이 드는 건 소설가의 재능 탓이다. 유쾌하다. 그러나, 결국은 그늘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회의 그늘을 한 번 더 생각하는 건 독자의 몫이다.

소설 마니아 당신. 사변적이고 무게 잡는 소설에 지쳤다고? 그럼 이기호를 읽으면 된다.

당연, 우리의 이야기는 지하철에서부터 시작해 지하철로 끝나는 것이다. 별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도, 불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하루 목표 금액을 채우기 위해, 그래서 형님의 체인 세례를 당하지 않기 위해, 수시로 돈을 헤아렸을 뿐이다. 그 세월이 십 년이다. 십 년이 어디 짧은 시간인가. 설혹, 불만이나 고민 따위가 있다 하더라도 뭉개지고 바스러져버리고 마는 시간.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가 급했을 뿐이다. 가난하면 머릿속의 생각도 온통 가난에 쏠리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당신, 지금 유부남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 때문에 풀어놓을 말들이 많다고? 그래, 그럼 우리에게 와. 딱 하루만 우리와 함께 지하철을 돌자고. 그러고 나서 무슨 생각이 드는지 말해보자고. 유부남이 떠오르는지. 유부국수가 생각나는지. 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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