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별장, 그 후 민음사 모던 클래식 70
유디트 헤르만 지음, 박양규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유디트 헤르만의 첫 소설집이다. 먼저 읽은 『단지 유령일 뿐』보다 좋았다. 외국 작가의 소설에선 감성적인 면을 찾기가 힘들었는데, 유디트 헤르만은 감성적이다. 신파가 아니라 건조하며 다 읽은 후엔 다시 곱씹게 만드는 감성이다.

어찌보면 밋밋한 이야기들이다. 작가의 말대로 '인생은 극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마음 한편에서 가끔 삶의 일탈을 바라곤 한다. 수록된 단편 「허리케인」은 휴양지에서 만난 남녀 4명의 이야기다. 그중 크리스티네는 부인이 있는 섬 남자를 사랑한다. 그에게는 부인이 있고, 크리스티네에겐 돌아가야 하는 집이 있다. 모든 건 임시다. 여행도 사랑도. 남들은 서둘러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떠나는데, 크리스티네는 섬에서 허리케인을 기다린다. 그 마음은 어떤 것일까. 크리스티네는 여행지에서 삶을 뒤흔들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소설 「소냐」는 결혼할 애인을 둔 남자가 아름답지도 않고 매력도 없는, 그저 나긋나긋한 소냐에게 끌리는 이야기다. 애인을 사랑하지만 소냐에겐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을 느낀다. 둘은 많은 시간과 심지어 밤을 함께 보내면서도 어떠한 육체적 접촉도 하지 않는다. 소냐는 남자의 결혼 소식을 듣고선 화를 내고 남자의 삶에서 사라진다.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예를 들면 어떤 사건, 센세이션, 변화 같은 것을 열망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열망은 불쑥 나타날 때처럼, 한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라고 남자는 회상한다. 한 방향으로 흐르는 삶에서 우리는 언제나 변화를 상상한다. 사랑도 예외는 아닐지 모른다.

감성적이며 때론 섬찟한 이 불친절한 이야기들은 큰 감동은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에 작은 파동을 남긴다.

나는 숨을 들이쉬었고, 손을 올렸다 다시 내렸고, 나 자신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었다. 사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 다만 나른하고 텅 비고 조용하기만 한 날들, 물속에 있는 물고기 같은 삶과 이유 없는 웃음이 뭐가 어떻단 말인가? 나는 내 속에 너무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그것이 내 삶을 힘들게 한다고 말하고 싶었고, 애인 곁에 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고, 심리 치료사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 나는 산호 팔찌의 비단 끈을 잡아당겼다. 675개의 분노와 같은 붉고 작은 산호 구슬들이 내 가녀린 손목에서 폭죽처럼 튀어나갔다. 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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