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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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을 가끔 이용한다. 이곳저곳에서 대리기사를 불러봤지만 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모두 같았다. 사장님. 잠시 차를 맡길 뿐이지만 그들이 몇 살이건 30대 초반의 나는 사장님이 된다. 올 가을 제주도에 갔을 땐 서귀포 시내에서 법환포구까지 대리운전을 이용했다. 숙소는 버스는 물론 택시 하나 안 보이는 곳에 있었다. 난 대리기사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여 복귀 방법을 물었다. 그는 걸어가면 된다고 대답했다. 걷는다. 차가 없으니 걷는다.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가 얼마나, 어디까지 걸어야 하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대학교 시간강사였던 저자는 대학교 시스템이 학부생, 대학원생,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공고한 착취 체계라고 말한다. 생활비조차 제대로 조달할 수 없을 때 저자는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대학교가 보장해주지 않던 4대 보험을 맥도날드는 당연하다는 듯 보장해준다. 저자는 대학교를 그만두고 육체노동을 시작한다. 대리운전이다.

책은 생생한 노동의 경험으로 차 있다. 그들이 어떤 기준으로 콜을 받는지, 대중교통이 끊겼을 때 어떻게 도심으로 복귀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지, 이런 대리기사들의 생태계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책은 흥미롭다. 그러나 마냥 흥미롭지만은 않았다. 사회의 민낯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3km 거리를 택시로 가고 있는데 단 2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왜 이렇게 늦"느냐며 다른 대리기사를 불러 가는 이야기, 두 명 이상의 대리기사를 호출하고 먼저 온 기사에게 운전을 맡기는 이야기, 수 킬로미터를 뛰어왔는데 50m 앞에서 호출을 취소하는 이야기를 읽을 땐 실로 참담했다. 이것들은 거대한 악의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행위다. 그래서 우리를 더욱 절망케한다.

저자는 '이 사회 어디도 타인의 운전석이 아닌 곳이 없'다고 말한다. 대리운전할 때 창문, 에어컨, 시트 포지션, 오디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행위뿐만 아니라 주체로서의 사유까지 빼앗긴다. 대리기사는 손님의 말에 적당한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비단 대리기사의 운전석 뿐만 아니라 다른 곳곳에서도 개인의 의지가 통제/검열된다. 저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 자신이 주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고 고백한다. 물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스템의 균열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실로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이런 저자의 진단은 자칫 허무하게 읽힐 수도 있다. 대부분 남의 공간에서, 남이 시키는 일을 하고, 남이 원하는 사유를 하고, 남이 주는 돈을 받으며 살아가니 말이다. 대리인간이 아닐 수 없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저자는 시간강사로 일하며 논문에 매달릴 때 자신이 하지 않던 가사/육아 노동을 아내가 온전히 대리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아내가 자신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음을 깨닫고 존중할 수 있게 됐다고. 그러니까, 지금 누리는 삶도 온전한 자신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 삶은 내 몫을 누군가 대리하기에 영위된다. 부모, 가족, 배우자, 그도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 어쩔 수 없는 대리사회에서 살지라도 내 삶에 타인의 지분이 있음을 자각할 때 서로의 삶을 조금 나아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대리사회의 욕망을 직시할 때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고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고 말한다. 멋진 말이지만 왠지 거창하다. 타인을 각자의 주체로서 존중하자고 이해하면 충분할 것이다.

법환포구 숙소 앞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들리고 캄캄했다. 나는 대리기사를 그대로 보내기 미안해 만 원을 추가로 지불했다. 만 원이면 큰 길로 나가서 택시라도 탈 수 있을 것이었다. 대리운전 회사에서 운영하는 셔틀이 있다면 그거 괜한 호구짓 아니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상관없다. 그가 언젠가 먼 곳에 뚝 떨어졌을 때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니까. 얼마 전에 서울에서 만난 대리기사에겐 음료수라도 사 드시라고 오천 원을 내밀었다. 첫차가 돌아다닐 시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또한 언젠가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아니라도 상관없다. 대리기사가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회복하기 위해 일하는 중이라면 작은 응원같은 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것조차 아니라도 좋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쌓여야 좋은 세상이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좋은 세상은 타인을 위한 작은 손해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믿고 싶다.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그 공간에서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의 욕망을 대리하며 ‘가짜 주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대학뿐 아니라 내가 속했던 여러 공간에서 대개 주체로 서지 못했다. 누구도 호칭 뒤에 숨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그와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의도치 않게 밀려나고서야 나는 누구였는지 나는 거기에서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았고, 그때는 너무 늦었다. 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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