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아 주인공이 소년원 들어갔다가 권투 스승 만나서 복서로 성장하는 이야기. 와 촌스러워라. 이거 완전 어디서 본 이야기 아니야. 아닌 게 아니라 고아 출신 복서하면 <내일의 죠> 가 퍼뜩 떠오른다. 만화는 안 봤어도 하얗게 불태웠다는 마지막 장면만큼은 다들 한 번쯤 본 적 있을 테다. <내일의 죠>엔 멋진 라이벌과, 자신을 걱정해주는 죽은 라이벌의 애인과,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끝까지 불태우는 멋진 주인공이 나온다. 정말 멋진 청춘 드라마 아닌가. 김종서가 부른 오프닝 OST처럼 "두 주먹 불끈쥐면 내일이 샘솟"는 세계다.

 

반면 <스파링>의 주인공은 자신을 마음대로 내던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프로 복싱 매니지먼트와의 계약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정해진 경기 수를 채워야 한다. 서로 자극을 주는 멋진 라이벌도 없다. 그는 천재 복서이기에 앞서 '불가항력의 세계(25)'를 살아가는 작은 인간일 뿐이다.

 

소설 속 세계의 정의란 제멋대로 작동하는데 그를 소년원으로 보낸 가진 자들의 법이 그러하고, 복싱 연맹의 편파 판정이 그렇다. 이 구닥다리 소재가 재밌게 읽히는 건 우리 또한 세계의 정의가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느낌 아래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린 이 고아 복서를 미칠 듯이 응원할 수밖에 없다.

 

이 완강한 부조리를 개인이 극복할 수 있을까. 소설이 말하는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개인의 몫이다. 다만 확실한 건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폭력(30)'에 망가진 인간이 "내가 당신들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습니까?"라고 되물을 때, 어떤 답이든 우리가 쉽게 대답하진 못하리라는 것이다. 부조리를 방관한 사람은 대답할 자격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가진 자들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고, 네 잘못 또한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긴 소설에 나온 것처럼 지역 모든 학생들에게 천 원씩 걷는 거대 학생 조직이 있을 리가 있나 ㅎㅎ. 감성적인 척하는 내 생각의 일부도 그렇게 작동한다. 언더 도그마로는 세상의 추악함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고 믿는다. 다만 나는 소설의 언더 도그마에 약간 설득당해버렸는데 그건 순전히 소설의 몰입력과 재미 때문이다. 아무리 나와 사상이 비슷해도 노잼으로 우기면 참을 수 없다. 예스잼이면 뭐가 됐든 환영이다. 이 소설은 예스잼이다. 10년간 서평 2000편을 쓰고, 8년간 소설 공모전을 두드린 문학 독학자의 등단작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문학동네 소설 공모전은 작가에 대한 정보 없이 심사한다고 했다. 늘 평균 이상의 재미였다.

남들이 나보다 먼저 나를 발견하거나 만들어내도록 방치하는 것은 종종 그 자체로 위험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내가 모르던 내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만들어지고 또하나의 나로 자리잡히게 되면 결국, 길을 잃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은 내가 타자에 의해 규정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반복되다보면 급기야 나조차 내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이 서서히 나를 잠식하고, 그러다보면 기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가, 정작 진정한 내 모습이기를 바랐던 나를 온전히 삼켜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마치 우주에 버려진 미아처럼 텅 빈 공간을 떠다니게 될 수도 있었다. 1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민음사 모던 클래식 4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사회의 거대한 트라우마를 예술로 치유(혹은 위로)하는 게 가능할까? 가능하다면 그에 합당한 자세는 무엇일까. 문학 평론가 신형철은 "어떤 이들의 슬픈 삶을 한없이 슬픈 눈으로만 들여다보아서 기어이 영영 슬픈 삶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위로하는 자의 안도로 끝날 수 때문이라는 것이다. 영화 <귀향>은 보지 않았지만 <귀향>이 평론가들에게 혹평을 받은 이유도 아마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이 소설은 미국의 거대한 트라우마인 9.11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소년 이야기다.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9살 소년은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게 될까. 소설은 열쇠의 주인 Black을 찾아다니는 소년의 여정과 드레스덴 폭격 당시 가족과 애인을 잃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소년은 그 여정을 통해 상실의 아픔이 저마다의 개별적 이야기이면서도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알아간다.

 

문학에서의 피해자 중심주의란 가해자가 얼마나 악랄했고 피해자가 얼마나 불쌍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닐 것이다. 그건 별로 좋지 않은 방식의 동정일 것이다. 명백한 가해자가 있는 테러 사건임에도 소설에선 증오의 문장이 보이지 않는다. 소설은 소년의 여정을 증오가 아닌 그리움의 연속으로 그린다. 그 과정을 통해 모든 슬픔 속에서 슬픔을 이겨내고 애도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소년과 독자 모두 확인한다. 이처럼 희생자를 진정으로 기리는 방법은 그들이 놓고 온 삶이 아름다웠음을, 그들 삶이 잊혀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어찌됐든 "모두가 모두를 잃는"다는 인류 보편의 아픔을 확인하며 위로받는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클리셰인데, 소설은 이것을 독특한 형식으로 극복한다. 소설은 소년이 스크랩한 사진, 할아버지 서간문의 빽빽한 활자, 아버지가 읽으며 표시했던 첨삭 기호, 할머니의 타자기 서간문 등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그것들을 읽으며 독자는 소년의 경험을 추체험하게 된다. 할머니의 왠지 슬픈 자간과 할아버지의 고통스러운 활자 겹침을 지나가면 잊지 못할 마지막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 장면으로 소설가는 우릴 대신해 말하는 것만 같다.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이라고.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그 감동이 가시기도 전에 세월호를 떠올릴 수밖에 없으니, 우리는 참 안타까운 사회의 안타까운 독자들일 것이다. 가해자는 누구인가. 피해자는 왜 그들인가. 요즘 나는 그들이 왠지 세상의 많은 죄를 대속한 것만 같다고 느낀다. 그들은 예술로 위로받기에 앞서 현실에서 제대로 위로받았어야 한다. 알량한 예술로 그들을 위로하는 척하는 건 어쩌면 염치없는 일일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거의 끝났음을 알았단다, 그녀에게 스포츠를 좋아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내게 체스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어, 나는 그녀에게 쓰러진 나무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지,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돌아갔고, 내 마음도 그녀를 따라갔어, 하지만 나는 내 껍질과 함께 남겨졌어, 그녀를 다시 만나야 했어, 왜 그래야만 하는지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그 욕망이 아름다웠던 거야,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잘못이 있을 수는 없는 거란다. 160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훈의 전공이라고 할만한 역사 소설이다. 그의 역사 소설은 일반적인 역사 소설과는 다르게 읽힌다. 신형철은 김훈의 역사를 두고 "우리의 현재가 이미 역사라는 형식으로 과거에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수단"이라 말했고, 박진은 "역사적 과거를 과감하게 현재화하고, 역사 속 인물에게 작가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이입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평론가와 독자 모두가 저마다의 방법으로 김훈을 읽겠지만 그의 역사가 현재와 분리되지 않는 실존적 고민이라는 지점에서 대체로 합의가 이뤄질 것이다. 


이 소설이 다루는 역사는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다. 멀지 않은 과거라서 더 아프고 생생한 과거인데 우리는 이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몇 년 전 영화 <변호인>와 <국제시장>을 생각해본다. <변호인>의 역사를 긍정하는 사람은 <국제시장>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았고,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둘 다 재밌게 봤으니 줏대 없다고 해야 할까 ㅎㅎ.


나는 두 영화가 말하는 역사를 모두 긍정하면서도, 거기에 중요한 무언가가 빠졌다는 생각을 한다. 두 영화는 어쨌거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시절을 견뎌온 한국을 긍정하고 결국 인간은 선하다는 결론으로 안착한다. <변호인>의 곽도원과 그 일당이 악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은 사실 독재 체제의 현현에 가깝다. 한편 <국제시장>의 악은 가난과 전쟁이다. 열혈 변호사가 독재와 싸워서 승소를 이끌어내고, 소시민이 질곡의 역사를 통과하며 살만한 현재를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감동은 할 수 있어도 현재의 고민을 투영해 바라볼 수 있을까? 과연 그렇다면 한 걸음씩 진보한 세상은 왜 아직도 더럽고 치사한가. 왜 차가운 바다에서 학생들이 죽어야 했을까. 설명할 수 없다. 시대가 인간을 억압하는 이야기에서 한 층 더 깊이 들어가야 현재의 고민과 접하는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난 이 소설을 시대에 짓눌린 무력한 인간이 왜 또 다른 인간에게 고통 줄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읽었다.


이 소설엔 많은 인물의 개인사가 펼쳐지는데 그중 마장세와 오장춘의 이야기가 가장 유의미해 보인다. 마장세는 베트남에서 동료들과 고립됐을 때 총상 입은 동료를 죽이고 생환한다. 집이 너무 가난해서 학생 때부터 도시락을 훔쳐먹었던 오장춘은 군대에서 휘발유를 빼돌리는 일에 동참했다. 이 둘은 처벌받지 않는다. 마장세가 죽인 동료는 전사한 것으로 처리되고 마장세는 훈장을 받는다. 오장춘은 휘발유 횡령 사건 당시 병사였다는 이유로 수사가 유야무야 종결되어 처벌받지 않는다.


그러나 저 둘을 도덕적으로 쉽게 단죄할 수 있을까. 생환하기 위해 어차피 죽을 동료를 죽인 것을, 어차피 산길에서 매연으로 휘발될 기름으로 가난을 버텨보려 한 것을, 안전한 우리가, 가난하지 않은 우리가 단죄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기실 지금 우리는 거기에 '잘잘못을 들이댈 수는 없(220)'을 것이다.


그들은 원주민이 죽어서 불법 사업이 발각되고 나서야 단죄된다. 그들의 죄를 미리 엄하게 물어 사회에서 격리했다면 이 사달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장담하기 어렵다. 그들이 사라진 빈자리는 다른 누군가가 채울 가능성이 많다. 더욱이 잘잘못을 들이대기 어려운 일에 일일이 엄벌을 가하기엔 세상의 죄는 너무나 많다.


원래 비루하고 던적스러운 인간들의 세상이기에 불행은 반복되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 맞는 말일 것이다. 다만, 허무를 허무로만 남기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작가의 질문에 독자는 고민으로 대답해야 윤리적 독서가 될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세상을 어떻게 좋은 세상으로 만들지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는 개인을 단죄할 수는 있어도 시대는 단죄하지 못한다. 시대엔 우리 모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을 괴물로 만들어 쉬운 단죄로 윤리적 우월감을 공유하는 것보다는 시대의 죄에 대한 죄책감을 공유하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렇게 살았다, 고 나는 느낀다. 과거가 현재에서도 반복되는 세상에서 윤리는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전투가 끝난 고원에서 종군 사제가 나뭇가지를 얽어서 시체들 앞에 십자가를 세우고 미사를 드렸다. 인간의 죄가 마침내 사해지기를 울면서 기도했다. 시체들만이 미사에 참례했다. 이 모든 살육과 파괴가 어떤 의미에 도달하는 것인지를 사제는 울면서 하느님께 물었다. 고원의 저녁 햇살에 십자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눈 덮인 시체 위에 도 눈이 내렸다. 사제는 시체 위에 성수를 뿌렸다. 날이 저물고 사제는 부대로 돌아갔다. 나무 십자가가 고원에 남아서 눈을 맞았다. 계곡과 능선이 눈에 덮이고 달빛이 스며서 죄는 보이지 않았다. 9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이 순도 백 퍼센트 행복이라면 좋겠지만 그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여 쾌락과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이다. 가지고 싶고, 하고 싶고, 자고 싶고, 먹고 싶지만 인간의 사회적/생물학적 조건은 이 모두를 동시 충족하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선택하는 것이 있으면 포기하는 것도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욕망은 충족 이전에는 고통과 같은 말이다. 소설은 인간의 고통을 절절히 보여주고 그것이 말끔하게 소거된 세계까지 보여준다. 그곳은 진정 유토피아일까?

 

이야기를 이끄는 이부異父 형제의 두 연인은 돌이킬 수 없는 신체의 손상을 겪고 자살한다. '남아있는 삶에서 기대할 수 있는 육체적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을 밑도는 때가' 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는 생의 유한성과 그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단호하게 전제한다. 인간은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첫째, 정신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쾌락을 향한 집착과 욕망을 애초에 버리는 것이다. 불교 교리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인간이 욕망을 모두 버리고 살 수는 없다. 그런 수준은 일반인이 가히 도달하기 힘든 경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적 욕망 자체가 종의 번식을 추동하는 요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둘째, 육체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은 유한성의 제거, 즉 영원히 사는 것이다. 역시 현재 과학 수준으론 불가능하다. 유성 생식하는 동물의 노화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작가는 미셸의 두뇌를 빌려 음험한 해답을 내놓는다. 유전자 변형을 통한 신인류(새로운 종)의 탄생이다. 이들은 슬픔, 욕망, 기쁨, 괴로움을 알지 못하는 정신세계에서 산다. 노화는 없고 유성 생식하지 않는다. 귀두와 음핵에만 분포하는 크라우제 소체가 피부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어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성적 쾌감을 느낀다. 정신적 고통은 없고 육체적 쾌락은 극대화된 신인류다. 구인류가 되어버린 인간은 여전히 희로애락을 느끼며 서서히 소멸해간다.

 

소설의 신인류 화자는 인간이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기 때문에 원숭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온갖 부족함 속에서도 선의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인간에게 경의를 표한다. 소설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이 책을 인류에게 바친다.'

 

제목 <소립자>는 미셸이 생물학적 연구에 접목시키려던 물리학적 최소 단위 개념이기도 하지만 철저히 개별자로 고독하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을 뜻하기도 한다. 소립자 같은 인간들은 거시적으로 보면 '저마다 자기 길을 가던 중에 우연히 마주쳐' 지나갈 뿐이다. 살며 개인적인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지 않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고독과 고통은 다른 무엇보다 인간다운 감정이다. 그런 감정은 극복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외면해야 하는가? 누구라도 외면하고 싶을 것이지만 항상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깊이 숙고하고 타인의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애쓴다. 당면한 고통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에 인간의 숭고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신인류 탄생의 단초를 제공했던 과학자 미셸은 연인의 죽음에 시를 짓는다. 고통에 머물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것, 그것을 통해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는 발걸음이야말로 인간을 증명한다.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나는 이 소설을 비관적으로 읽고 싶지 않다. 너무 완벽해서 섬뜩하기도 한 신인류의 세상은 작가가 제시하는 구인류(우리)의 디스토피아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고통 속에서 천하게 살았'던 개별자 인간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질문이다.

1974년 7월의 어느날 밤, 아나벨은 바로 그런 정황에서 자신이 하나의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깨달았다. 인간이 하나의 동물로서 자신의 개별적 삶을 자각하는 것은 먼저 고통을 통해서다.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개별적인 삶을 완전하게 자각하는 것은 <거짓말>을 매개로 할 때이다. 개별적인 삶은 사실상 이 거짓말과 혼동될 수 있다. 10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개를 베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끔 사는 게 온통 구질구질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좀 구질구질하면 어떤가. 남에게 떳떳하면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인격자는 못 되어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그런 삶 말이다. 정작 이렇게 말하는 난 그렇게 살지 못 했다. 힘들면 뺨 맞고 한강에 눈 흘기듯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풀이했다. 보호자나 병동 간호사들에게 한바탕 짜증을 낸 하루의 마지막엔 침대에 누워 나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난 최하구나.'

 

김애란은 소설집 『비행운』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남에게 전가하는, 진정 비루한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내 삶 한 쪽도 그 소설집에 끼워 넣으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무척이나 현실적이어서 찝찝한 책이었다. 반면 윤성희 소설집 『베개를 베다』는 『비행운』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윤리를 그려낸다. 비루한 삶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단, 소설로 행복한 삶의 원형을 보여줄 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뻔한 서정시가 하품 나오듯이 따분해질 수 있고, 실재와 어긋나는 감각에 독자가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착한 이야기를 재밌게 쓰기란(읽기란) 그래서 어렵다. 독자에겐 다행으로 이 책의 착한 이야기들은 뻔하지 않아서 곱씹어 봐야 그 선함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소설 속 선한 사람들의 윤리 감각은 독특하다. 「가볍게 하는 말」의 고모는 둘째 오빠의 칠순 잔치에서 오빠 셋이 이만하면 잘 살았노라고 서로 껴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 말한다.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몰라, 오빠들은." 칠순 잔치에서 빠져나온 고모는 손자에게 몇 년 전 죽은 친구 이야기를 해준다. 친구의 하나 남은 아들이 넋을 놓고 우는데 자신이 이렇게 말해버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냐. 그래도 기운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리고 손자에게 말한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걸 그때는 이 할미가 몰랐단다. 그건 부끄러운 말이란다.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다." 고모는 우리 모두 그렇게 늙어버렸다며 화를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의 누구도 고모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날씨 이야기」의 언니는 어머니 대신 동생들의 학비를 벌고, 동생들 대신 어머니 병간호를 하고, 적금을 부어 동생들의 결혼자금을 모은다. 한 번의 연애 이후 다신 연애를 하지 않고 홀로 늙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희생적인 삶이다. 분명 희생은 고귀하다. 그러나 만약, 소설가가 이를 아름다운 세밀화로 그리고, 독자는 그 이야기에 숭고한 감동을 느끼고 만다면 어떨까. 잘 생각하면 이건 아름답다기보단 몹시 수상한 풍경일 것이다. 한 인간의 희생을 타인의 시선으로 긍정해버리는 것은 그 희생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소설에서 구현되는 언니 삶의 윤리는 그런 낡은 것이 아니다. 언니의 윤리 감각은 이렇다. 잠깐 장 보러 간 사이 자기 집을 뒤지는 앞집 아이에게 "안 이르마. 그러니 가출은 하지마."라고 말하는 것. 왕따로 자살한 아들의 아버지가 방화를 한 현장에 가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대신 복수해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는 것. 새벽마다 "미워하지 않을 것도 미워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몸서리치지만, 실제론 미워해야 할 것도 미워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더욱이 이 모든 건 각박한 삶에서 이뤄졌기에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다. 소설 속 언니처럼 각박하게 살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왜 미워하지 않을 것도 미워만 하며 살았느냐고 말이다.

 

이런 선한 사람들의 윤리는 물질적이고 희생적인 나눔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고 함께 가는 것으로 이뤄진다. 「못생겼다고 말해줘」에서 '나'의 쌍둥이 언니는 죽었다. 그러나 나와 형부, 어머니와 형부는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다. 형부는 내게 미국에서의 근황을 사진에 담아 이메일로 보내고, 어머니에게 언니의 편지를 다시 손으로 써서 보낸다. 이 담담한 관계의 유지는 죽은 언니를 잊으면서도 잊지 않는 그들 삶의 방식이다. 「팔 길이만큼의 세계」의 나는 이혼으로 삶의 실패를 맛봤고 아버지는 없다. 삼촌은 젊어서부터 칠순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자신을 챙긴다. 나는 삼촌에게 "이제 그만 어머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해보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단지 "우리 내년에도 봅시다."라고 말하고 만다.

 

삶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이들의 공생을 공유 결합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전자가 아닌 자신의 팔 하나씩을 엮어서 서로의 삶을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관계 말이다. 이런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나면 첫 작품 「가볍게 하는 말」의 고모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이름만 기억하고 할머니의 이름은 기억 못 한다. 그런 가부장적 세계에서 아들을 잃고 홀로 손자를 키우는 고모에게 손 한 번 내밀지 않은 저들끼리 치하하는 말은 얼마나 가볍게 흩날리는가. 자신을 내주기는커녕 타인의 삶에 대한 인식조차 없기에 남자 형제들의 결합은 아름답지 않고 그저 이기적으로만 보일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볍게 하는 말'을 남기며 살아갈까. 타인의 삶을 상상하지도 않고 말이다. 「낮잠」의 아버지는 친구를 괴롭힌 딸에게 시 낭송을 시킨다.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인간이 되려면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다. 딸의 생각대로 낯간지럽고 쪽팔리는 일이지만, 낯간지러움을 대놓고 언급했기 때문에 독자는 어색함 없이 배시시 웃을 수 있다. 맞다. 위로와 공감은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뭉근히 마음을 적시는 이야기들이었다. 여름에 차가운 이야기가 재밌듯 겨울의 이불 속에선 이런 이야기들이 좋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는 없다. 한편으론 나야말로 삶을 핑계로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모르는 인간으로 산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아니,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즘의 나는 소설 읽은 후의 뭉근한 마음이 두렵다고 느낀다.

언니와 나는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먹었다. "지각하는 아이들을 보지 않으면 난 미쳤을 거야." 우유를 마시면서 언니가 말했다. 새벽마다 우두커니 홀로 앉아 미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미워하지 않을 것도 미워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러니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해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이라도 봐야해." 나는 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7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