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의 사랑 - 개정판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27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 한강이 등단 후 20대 중반에 발표한 단편들을 모은 첫 소설집이다. 1994-1995년에 쓴 소설들이 수록되어 있다. 벌써 20년이 지난 소설들인지라 개정판에서는 지금의 감성에 맞게 소소한 어미들을 다듬었으며,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 한 작품은 뺐다고 한다. 지금은 중견 작가가 된 한강의 대표 정서는 누가 뭐래도 슬픔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한결같은 기조는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등의 최근작까지 고스란히 이어진다. 그러므로 한강의 초기작들을 읽는 건 그의 슬픔이 자리 잡은 원류(原流)를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한강의 소설을 몇 편 읽어 본 사람이면 그의 초기작도 당연히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의 이야기가 쓰였겠거니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짐작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이야기들은 심연의 상처를 가진 이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일로 시작된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절대적인 상실감-혈육의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중심인물 두 명의 대립을 통해 이야기가 서술된다. 『여수의 사랑』의 정선과 자흔, 『어둠의 사육제』의 영진과 명환, 『야간열차』의 영환과 동걸, 『진달래 능선』의 정환과 황 씨, 『붉은 닻』의 동식과 동영의 관계가 모두 그러하다. 『질주』에서는 직접적인 인물의 병치가 없고 회고로부터 고통이 환기되는 구조를 가지지만, 혈육의 죽음이라는 상실감의 근원은 앞선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야기들은 대부분 한 명의 초점 화자가 다른 인물을 바라보고 있는 구조이며 중심인물들은 제각각의 상처와 상실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난하며 체념적인 이들은 동거를 통해 (여수의 사랑, 진달래 능선, 어둠의 사육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을 사랑하기도 어려운 불완전한 인간들이기에 남을 이해하기란 더욱 어려워 보인다. 희망 없는 바닥의 날들은 그저 견뎌내야 하는 걸로 보인다.


혈육을 잃은 절대적인 상실감, 지키지 못한 가족, 가난. 이런 상처들은 치유할 수 있는 것인가? 한강은 쉽사리 치유를 말하지 않는다. 어느 작품들도 쉽사리 희망을 비추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들의 상실감은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기에 함께 공명(共鳴) 한다. 작중 인물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그렇게 절망의 병존 속에서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는 것이다. 그건 타자를 통해 비로소 자신의 과거를 만나고 화해하는 일이기도 하다. 

밤하늘은 숨이 막히도록 어두웠다. 베란다 방에서 여러 번 밤을 지새워본 나는 아파트촌 위의 하늘이 가장 어두울 때를 지나서 새벽이 동튼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장 지독한 어둠이 가장 확실한 새벽의 징후임을 나는 수차례 보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새벽을 의심했다. 고질병을 가진 사람이 한차례의 통증이 지나갈 때마다 죽음을 확신하듯, 나는 얼마 안 있어 지나가고 말 어둠이 영원할 것만 같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135p

친구 녀석들의 모임이 재개되었다. 나는 왠지 그곳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혼자였다. 혼자라는 것은 피가 끓고 눈이 부신 젊음이 있을 때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지 이제는 내 몸에 잘 맞는 껍질이었다. 그 껍질 속에서 나는 편안했다. 186p

정환은 그동안 자신의 앙상한 희망을 혹사했다. 곰이나 원숭이 같은 짐승들을 먹이지 않고 채찍으로 다스리는 곡예사처럼 정환은 자신의 희망을 함부로 다루고 소모했다. 한데 이상한 것은 그것이 죽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환의 지친 육체를 괴롭히는 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무작정의 희망이었다. 의지나 가능성과는 무관한 성질의 감정이었다. 21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십사
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의 제목 사십사는 숫자 44이다. 이 숫자는 등장인물의 나이를 의미하기도 하고 단편 『四十四』에서 여주인공 제민이 입는 옷 사이즈를 의미하기도 한다. 중년(中年)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마흔 살 안팎의 나이. 또는 그 나이의 사람. 청년과 노년의 중간을 이르며, 때로 50대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다."


작가는 사전에 나오지 않는 중년의 의미를 여러 이야기를 통해 말한다. 우선 소설집 내 모든 작품의 주인공들은 중년이다. 소설집의 제목처럼 44세의 주인공이 나오는 경우도 있고 정확한 나이가 명시돼 있지 않지만 40대 중반이거나 50쯤 되는 중년이 나오기도 한다. 작가는 중년은 대개 무기력하고, 졸렬하며, 비겁하다고 말한다. 


『흉몽』은 어느 순간 갑자기 입술이 잘려나간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문예사의 편집자로, 유능했으나 남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이였다. 입술이 잘려나간 후 그의 삶은 온통 엉망이 된다. 자살도 실패한 그에게 필요한 것은 대상을 찾지 못한 분노를 투사할 대상이다. 이렇게 삶은 예고 없이 일그러질 수 있고, 그때 우리가 행한 무례들은 그대로 우리에게 돌아온다.


『사라진 이웃』에서는 실직 후 술만 마시다 이혼 한 무기력한 가장이 나온다. 용역 일을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고 창피만 당한 뒤 용역 일을 잃는다. 이 가장은 무력하게 껍질 안으로만 들어가는 달팽이 같다. 무력하게 침잠한 중년은 딸의 삶도 알지 못한다. 


『더 송 The song』에서는 분노를 참지 못하는 중년의 교수가 나온다. 그는 요즘 흔히 말하는 '개저씨'에 가까운 인물이다. 졸렬하고, 무례한 그의 인생은 망가지기 시작한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지 못하고 끝내 남 탓만 한다.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에서도 중년의 교수가 나온다. 지금 살고 있는 젊은 애인과 동거를 시작할 때 이전의 애인을 졸렬하게 내친다. 시간이 지나 지금의 애인에게 짜증과 분노가 치밀지만, 그는 "사랑이 어딨나.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중얼거리며 차 밖으로 그녀의 애완견을 던져 버릴 뿐이다. 


만약 곱게 늙는 법을 곱게 전달했으면 참 재미없는 이야기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인간이 망가지고, 피와 살점이 튀는 이야기로 뻔한 교훈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한편 무기력한 인생은 뜻하지 않게 변곡점을 찍고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아내의 시는 차차차』에선 은행을 다니다 조기 퇴직하고 치킨집을 말아먹은 후 백수로 지내는 중년 남성이 나온다. 그는 교사 아내에게 용돈을 받고 지내던 중 우연히 백화점 문화센터의 교양 시 강좌에 참여하게 된다. 그곳에서 기발한 방법으로 '술집 시 선생'으로 거듭나고 6년 전 만났던 여성을 다시 품게 된다. 그의 아내에겐 새로운 남자가 생긴 듯하지만, 상관없다. 그의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인생의 희비를 함수 그래프로 그릴 수 있다면 어떻게 그려질까. 이 소설집에 의하면 그래프 전체 모양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중년은 변곡점에 해당할 것이다. 오르기만 했던 삶이 갑자기 내려가고, 반대로 내려가기만 했던 삶은 사소한 일을 발판 삼아 다시 올라가기도 한다. 


또 하나 주목하고 싶은 것은 되살아난 기억이 행하는 폭력에 대한 서술이다. 


『한 박자 쉬고』에선 주인공이 과거 자신을 심하게 괴롭히고 끔찍한 기억을 안기던 친구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본능적으로 분노가 치밀고, 거부감을 느끼지만 끝까지 그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다. 이전의 관계를 다시 강요받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명확해 보이지만 공포를 기억하는 몸은 생각과 다르게 반응한다. 그는 잊고 싶었던 기억이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중년은 그렇게 무기력하다.


『四十四』에선 마흔네 살의 미혼여교수가 나온다. 그녀는 우연히 오래전의 연인이었던 윤 교수를 만난다. 윤 교수는 젊었을 적 그녀가 갖지 못한 걸 가지고 있고, 세련된 외모를 가졌었다. 하지만 지금 중년의 그녀보다 더 늙어버린 윤 교수는 머리도 벗어지고 이전의 용모를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녀는 교수에게 품었던 연정이 모두 사라지는 걸 느끼지만, 윤 교수는 그녀에게 추근 댄다. 지금은 원하지 않는 이전의 관계를 강요당할 때 기억은 폭력으로 작용한다.


『네 친구』는 『四十四』의 여주인공 제민의 친구 혜진이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그녀는 대학교 친구 세 명과 이태원의 한 식당에서 만난다. 그곳에는 이전에 처음으로 원 나이트 한 남자가 셰프로 일하고 있다. 이 짓궂은 우연과 친구들의 몽니는 혜진에게 수치심을 준다. 한편 병치되는 혜진의 회상에서 교회에서 만난 한 여자는 도저히 기억나지 않지만 혜진에게 오래전 자신이 고통받았다는 듯한 뉘앙스의 말만 남기고 사라진다. 네 친구에서 나머지 한 명은 원 나이트 한 셰프일까, 교회에서 만난 여자일까. 어쨌든 셰프와의 기억은 수치를 주는 폭력으로 작용한다. 교회 여자는 정말 자신이 기억 못 하는 것일지도, 아니면 교회 여자가 미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인지하지 못하던 망각을 인지할 때 그것이 폭력으로 작용함을 말한다.


참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선을 읽는 듯한 느낌도 드는데, 이걸 다 읽고 나면 중년의 삶이란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탄식을 내뱉게 된다. 이 적나라한 중년의 이야기들을 통해 작가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소아가 작은 성인이 아니듯, 중년도 나이만 먹은 청년이 아니다. 작가는 아마도 염치없는 중년들의 이야기로 하여금 독자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피할 수 없는 나이 듦이지만, 우리가 피해야 할 것들은 모조리 이 이야기 속에 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중년이 채 십 년도 남지 않았구나. 어쨌든 나는 다시 탄식한다.

누가 내게 이런 짓을 한 것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왜?`가 중요했으나 `왜`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툭하면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선생님 말이 되질 않잖아요.` 왜라는 물음은 필연성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소설에서 그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요.` 필자들은 머쓱해하며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여 원고를 다시 보내왔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소설도 완벽한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작품은 없었다. 169p

시간은 지나가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 사람 마음속 깊숙한 곳에 탑을 쌓는다. 기억 속에 가라앉은 시간의 끝은 뾰족한 바늘처럼 생겨서 복원해내면 따끔하게 마음의 가장자리를 찌르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카로운 시간의 기억을 다시 찾지 않을 만큼 깊숙한 곳에 숨겨놓는다. 그러곤 어디에 그 시간을 두었는지 잊어버리고선 우왕좌왕한다. 서로 사랑할수록, 함께한 시간이 많이 쌓일수록 그 끝은 벼려진 바늘과 같아진다. 그 끝을 기억하지 못 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왜 상처받고 상처 주는지 모른 채 시간은 계속하여 흘러만 간다. 깊은 시간을 나눈 우정도 비슷하다. 우정은 시기와 질투 같은 다른 감정으로 얽히기 쉽다. 가족끼리 대화가 안 되는 이유는 대개 서로에 대한 감정이 먼저 튀어나와서인데, 친구 사이에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245p

"봤어? 나이는 곱절이나 처먹어서, 애만큼도 삶의 철학이라는 게 없어. 바로 그거야, 차이. 저들이 버티는 이유, 인간으로써 권리 어쩌고 하는 거 말이야. 그런데 아니거든, 세상은. 시바, 이런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거잖아. 시바, 이 세상은 원래 졸라, 불평등하거든. 그걸, 아니까 민주주의 하자고 난리인 거 아니야. 민주주의 그건 언제나, 미래의 일이란 얘기야. 자본주의에서 무슨 평등이야, 시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만 평등한 거야. 알겠어?" 278p

"여자애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리고 솔직히 아저씨가 그 애에게 그런 동정을 보내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라고요. 사람은 날 때부터 계급이 정해져 있잖아요. 조금 심하게 얘기하면 동일한 계급에서 동정과 연민은 웃긴 일이라구요. 상위계급에서만 그런 것들을 보낼 수가 있는 거죠." 284p

김 목사가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군데군데 켜진 홍등이 밤을 은은히 비추고 있었다. 이른 저녁부터 사창가를 서성이는 청년들이 보였다. 아테네에 온 지 10년이 넘었지만, 종종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많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사창가도 3천 년의 세월을 견딘 것이라 했다. 이 거리를 지나쳐간 남자와 여자와 시간들이 너무 막막하게 느껴졌다. 고대의 시간으로부터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신의 형상도 막막한 건 마찬가지였다. 31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의 아들 - 양장본
이문열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들은 왜 신을 믿는가. 왜 종교에 기대는가. 이 소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민요섭의 살해로부터 시작된다. 민요섭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나 나환자촌을 방문하고, 불행과 고통이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고 찾아 옴을 깨닫는다. 이 부조리함에서 기독교에 회의를 느낀다. 민요섭은 일종의 무신론자가 되어 전설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의 여정을 상상하여 글로 남기기 시작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독실한 유대교의 신자였으나 유대교의 교리와 야훼의 신성에 의문을 품고 종교와 유일신의 기원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돈다. 그 여정에서 여러 종교가 공유하는 보편성 - 이를테면 신과 인간들의 관계에서 보이는 도식들, 신들의 태어남과 죽음에서 보이는 법칙성 - 을 찾는다. 각 종교의 교리에 실망하다 예수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와 설전을 벌이던 아하스 페르츠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인 예수에게 기쁨을 느낀다. 영혼의 삶이 중요하다 말했던 예수가 실제로 빵과 물고기로 실존의 구원을 베푸는 모습에 감격한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기적을 베푼것을 이내 후회한다. 권능을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기적으로 군중의 의지를 강제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다만 그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말씀을 전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야훼의 권능을 빌린 것뿐이라고. 여기서 다시 아하스 페르츠는 반발한다. 이제 더 큰 기적 없이는 그들을 감격시킬 수 없다면서. 결과로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말씀의 은총에서 밀어내 버렸다면서. 


아하스 페르츠를 통해 민요섭은 영혼보다 육신의 삶, 인간의 실존 자체를 중요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신의 아들 예수와 같은 날 태어난 아하스 페르츠는 종교가 속박하는 인간성과 자유의지의 회복을 갈구하는 사람의 아들이다. 이렇게 사람의 아들이고자 했던 민요섭은 다시 기독교의 품으로로 돌아간다. 이런 치밀한 무신론의 논리를 쌓아올린 그가 왜 종국엔 기독교로 회귀할 수밖에 없었을까. 


민요섭의 사상에 경도된 조동팔의 실천적 삶이 과격한 일탈의 양상을 보임에 따라 다시 회의감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궁극적 이유는 빵과 기적 없는 구원의 한계이다. 어떤 방법으로도 고통이 덜어지지 않는 불행한 삶들에 절망했다. 실천으로만의 구원에 큰 한계와 절망을 느끼고 기독교로 회귀한다. 반기독교 사상을 종교와 같이 여기고 말았던 조동팔의 맹목적 추종과 마지막 광기는 큰 오류를 범한다. 본말 전도된 맹목적 사상 추종은 인간보다 신을 우선하는 광신도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세상이 이토록 불완전하다. 우리는 왜 신을 믿는가. 왜 종교에 기대는가.

생각해 보아라. 세상이 무자비하고 종잡을 수 없는 자연의 폭력에 맡겨져 있다고 믿는 것보다는 제사로 그 노여움을 달랠 수 있고 찬미와 기구로 축복을 빌 수도 있는 신의 질서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믿는 쪽이 저들에게 얼마나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줄 것인가를. 120p

천지창조 뒤 <심히 보기에 좋았더라>는 구절이 반복됨과 아울러 조상들은 곳곳에서 야훼의 인간창조를 자비와 사랑의 발로로 말하고 있으나, 지난 일과 당장에 땅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서 아하스 페르츠 자신이 더 자주 본 것은 자기를 섬기고 떠받드는 일에만 관심을 가진 야훼였을 뿐이었다. 162p

선(善)은 존중돼야 하고 악(惡)은 투쟁돼야 하며, 삶은 유지돼야 한다ㅡ
187p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아하스 페르츠의 관심을 끈 것은 배화교의 이원론이 아니었던가 한다. 왜 선악을 불문하고 재난이 우리를 찾아오는가, 신의 사랑과 자비가 어찌하여 인간의 고통과 비탄으로 나타날 수 있는가ㅡ 지난날 아하스 페르츠를 조상들의 신으로부터 뛰쳐나오게 한 그 괴로운 물음의 답이 그 속에서 가능할 것같이 느껴진 까닭이었다. 190p

원래 야훼는 엘 사타이산에 은거하던 목양자의 신에 불과했다. 거기에 모세의 광기가 접한 호렙사느이 영이 더해져 야훼는 곧 가나안 쟁취를 위한 무자비한 군신으로 변질되었다. 그 뒤 엘리야와 호세아는 그에게 농경신의 권능을 부여했고, 아모스와 이사야를 통해 민족의 신에서 우주의 절대유일자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바벨론에서 바빌로니아인들의 창조론과 우주론을 표절하는 한편 페르샤인들의 사탄과 종말론을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야훼는 완성되었다. 결국 야훼가 우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야훼를 만들었을 뿐이다 196p

그 다음에 당신은 우리를 향해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이 되라 하셨소. 보복하지 말라 하셨으며,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소.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내놓고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까지 주며, 오 리를 가지거든 십 리를 가주라 하셨소.
진실로 묻거니와, 도대체 당신은 그 모든 가르침의 실천이 우리 인간에게 가능하다고 믿으시오? 인간의 창조가 오직 당신 아버지의 선(善)으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믿으시오? 그러나 자신 있게 단언하지만 여인의 몸을 빌려 태어난 자 중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뿐일 것이오. 극소수의 사람들이 당신을 따라 출발할 것이지만 결코 아무도 도달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리고 그 나머지ㅡ대부분의 인간들에게 그 교훈은 오직 감당할 수 없는 영혼의 짐, 영원히 헤어날 길 없는 죄책감과 절망의 원인이 될 따름이오. 비록 당신으로 하여 율법은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과는 별 상관이 없는 독선의 완성일 따름이오. 236p

지혜 없는 선과 마찬가지로 선 없는 지혜가 어찌 온전할 수 있겠느냐. 죄는 지혜 없는 선의 딴 이름이며 악은 선 없는 지혜의 딴 이름에 다름 아니다. 너희도 겪었으리라, 자유 없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정의 없는 자유가 얼마나 괴롭고 쓰디쓴 것이었던가를. 280p

선이 홀로만을 주장할 때 독선이 되듯 지혜가 홀로만을 주장하면 악이 될 뿐이다. 독선을 악으로 바꾸어본들 물에 빠진 이를 건져 불구덩이에 내던짐과 무엇이 다르랴. 295p

세계의 개선이 지연되는 것은 앞서가는 철학과 논리를 행동이 허겁지겁 뒤따랐기 때문이오. 나는 오히려 그들더러 뒤따르라 하고 행동으로 앞서가는 쪽을 택했소. 행동의 아름다움은 작더라도 확실한 걸 얻어내는 데 있소......
30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여러 작가들의 단편소설들, 가령 이상 문학상이라든지 현대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을 볼 때면 작가들이 지나치게 관념적 주제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작가와 독자가 생각하는 소설의 가치는 제각각 다를 테지만, 소설도 본디 유희의 한 목적이자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마도 최근 한국 문학에서 보이는 그런 기조가 기존 독자들에게선 피로감을 유발하고 새로운 독자들에겐 유입을 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짐짓 우려를 표하고 있으니 내가 한국 문단의 권위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독서량으로 따지면 파워 독자 축에도 끼지 못하는 주제에(ㅎ). 뭐 아무튼 요즘 단편 소설들은 왠지 현실과의 접점이 부족하고, 그래서 내게는 별로 와 닿는 이야기들이 아니다.


왜 저런 이야기를 열심히 썼느냐면, 뻔하지. 8년 전에 나온 이 소설집은 요즘 소설들과 달리 고상한 척하지 않고 아주 재밌기 때문이다. 문장 이곳저곳에서 숨길 수 없는 여류 작가 특유의 감수성이 묻어난다. 여류 작가들을 아주 거칠고 단순하게 문체로 분류해보면 신경숙, 한강, 편혜영, 김숨이 진중한 문체의 작가로 분류될 것이고 정이현은 양귀자, 은희경, 김애란과 함께 가볍고 활기찬 문체의 작가로 분류될 것이다. 이렇게 가볍게 읽히는 문체는 역시 가벼운 일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 장점이 극대화된다. (주제가 가볍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작가의 장기는 가독성 좋은 문체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작가는 짐짓 가벼워 보이는 이야기 속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내면을 담담하고 치밀하게 그려낸다. 『삼풍 백화점』은 별로 친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다. 취직도 연애도 신통치 않던 화자는 동창 R을 다시 만난다. R은 결코 화자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학교는 졸업했는지 묻는 법이 없다. 둘은 담담하게 적당히 가까워진다. 화자도 R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이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너진 삼풍 백화점과 함께 사라진 R을 담담하지만 참으로 힘겹게 소회하곤 한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 적절한 마음과 마음 사이의 알맞은 거리가 무엇인지 작가는 독자에게 반문한다. 『어금니』에서는 아들 현우가 조건 만남으로 만난 열 여섯 살 여자 아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음주운전을 한다. 여자 아이는 현장에서 죽고, 현우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상에 그친다. 현우의 아버지는 합의를 통해 사건을 정리하는 데만 집중하고, 현우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병실에서 만화책을 읽는다. 망자에 대한 애도와 죄책감이 결여되어 있는 이 풍경 속에서 오직 현우 어머니의 죄책감만이 뽑지 않은 어금니처럼 묵묵히 썩어 들어간다. 『위험한 독신녀』에선 철없던 시절의 악의에 대한 묵묵한 참회를 이야기하고 『익명의 당신에게』에선 사랑에 대한 확증 편향적 사고가 얼마나 비겁한 행동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교묘히 이야기한다. 


요즘 재밌는 책이 통 없다면 이 책을 권한다. 때론 과민한, 때론 담담한 우리들 이야기 속에서 무너지는 양심과 그것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려 하는 안간힘이 이루는 긴장을 느껴보자. 읽어보면 알겠지만 돌싱, 노처녀가 얼마나 예민한지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건 덤이다. (ㅎㅎ 농담!)

어쩌다 가끔, 예컨대 휴일 오후 긴 낮잠에서 깨어 보니 이미 캄캄한 밤이 되어 버렸다든가 할 때에는 문득 어리벙벙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 정도 고독이야 현대인들 누구나 느낄 만한 수준이므로 나도 견딜만하다고 생각한다. 삶에 절정이 없다는 것쯤은 진즉에 눈치챘다. 9p

엄마 미쳤어?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어떻게 살라는 거야? 너 계속 영어학원 다녔잖아. 기껏 비싼 돈 처들여 학원 보내줬더니 말이 왜 안 통해? 아무튼 안 돼. 난 절대 다른 나라에서는 못 살아. 왜? 왜냐면 나는 고급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니까. 그제야 내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기 위해서 영어 공부를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3월이 코앞이었다. 51p

물어봤으면 대답해주었겠지만, R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내 기준에서는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R은 그걸 섭섭하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마음과 마음 사이 알맞은 거리를 측정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겐 몹시 어렵기만 하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시집들에 대해서도 궁금했지만 입을 닫았다. 캐러멜 색 표지의 `文學과 知性 詩人選 80 기형도 詩集` 『입 속의 검은 잎』은 나도 가지고 있는 시집이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그렇게 시작하는 뒤 표지의 시작 메모를 R의 집에서 다시 읽었을 때,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이 땅의 날씨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59p

아주 어렸을 적, 쇠줄에 종일 묶여 있던 옆집 개의 이름을 붙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노랑이, 라는 이름은 털 색깔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검둥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명명은 책임질 수 있을 때나 하는 것임을, 나는 이제 어렴풋 알고 있었다. 72p

남편이 다정하게 잔을 부딪쳐왔다. 아마도 나는, 나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94p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빳빳하게 투명 코팅된 컬러 사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중에 이선희를 선택하든 허재를 선택하든, 어쨌든, 너는 백 원의 동전을 지불해야만 했다.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선택의 폭은 넓었다. 허재인가, 이선희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너는 늘 쭈뼜댔다. 그때 너는 몰랐다. 제 안의 욕망을 냉랭하게 응시하는 일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171p

엄마는 오해했다. 그가 상처(喪妻)한 남자라 싫은 게 아니라, 상처(傷處)를 가지고 있어서 싫었다. 247p

부정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응징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녀가 62명 중에 62등이라는 것은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언제든 알려질 비밀이었다. 그 소문이 산불처럼 번지는 데 대해 나는 별다른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대걸레라는 별명을 붙인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채린의 뒤에 대걸레와 주전자밖에 없잖아, 라고 커다랗게 말했을 뿐이다. 그 말 속에 들어 있던 악의를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단정하고 규범적인 소녀라면 누구나 그녀에 대해 그만큼의 악의는 품고 있었을 것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타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다. 채린에게 어디서부터 사과해야 할지 막막했다. 253p

연희는 자신이 이름 모를 커다란 괴물의 뱃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제 안의 부적절한 욕망과 대면해야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숭고하고 비루한 때라는 것을 연희는 깨달았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억지로라도 식욕을 내야 했다. 연희는 샌드위치 조각을 맹렬히 씹어 삼켰다. 31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엔 지루하고 읽기 어렵지만 읽을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작품이 있다. 긴 이야기를 끝내 다 헤쳐나가고 그 끝에 당도했을 때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큰 감동이 온다. 그것은 단편 소설에는 없는 장편 소설만의 미덕이다.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5년, 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그리고 에필로그의 1999년에까지 이르는 길고 지난한 이야기다. 책은 무려 521페이지에 달한다. 


제1부에선 브리오니와 그녀의 가족들, 주변인들의 시선으로 번갈아가며 이야기가 서술된다. 답답하리만치 자세한 풍경 묘사와 꼼꼼한 심리 서술은 작가가 의도한 소설의 문법이다. 브리오니가 쓰려 했던 20세기 초반 소설 문체와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장치인 셈이다. 1부에서 브리오니는 거짓 증언으로 로비와 세실리아의 삶과 사랑을 파멸로 몬다.


제2부는 로비의 이야기다. 브리오니의 위증과 진범의 침묵으로 로비는 강간죄를 뒤집어쓰게 되고, 출소 후엔 2차 세계대전의 전장으로 징집된다. 감옥에서 로비와 세실리아를 이어주는 것은 편지뿐이다. 그나마도 검열 때문에 사랑 표현은 할 수가 없었다. 출소 후 전장으로 나가기 전 세실리아와의 짧은 재회에선 수도 없이 되뇌던 말(사랑해. 너로 인해 살았어)을 하지 못하고 하숙집에 대해서나 묻는다. 짧은 키스 후 작별은 기약이 없다. 로비가 발 디딘 프랑스는 피 냄새나고 갈증나는 지옥이다. 전장의 묘사는 참혹하고 문장 호흡은 빠르다. 스투카 폭격기의 폭격 장면에선 독자도 공포를 느낀다.


제3부는 브리오니의 이야기다. 브리오니는 시간이 지나며 자신의 위증이 죄였음을, 그것이 두 사람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렸음을, 그래서 그것이 용서받지 못할 큰 죄였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보장된 삶을 버리고 언니의 삶을 뒤쫓듯 간호사의 길로 자처해 들어선다. 브리오니는 세실리아 언니에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속죄의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자신이 간호사가 되기 전 로비와 세실리아에 대해 썼던 소설 '분수대 옆의 두 사람'이 죄책감이 결여된 비겁한 글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녀는 세실리아 언니와 재회한 후 진정한 속죄의 마음으로 새로운 소설 '속죄'를 쓰리라 다짐한다.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적기를 놓친, 그래서 결코 하지 못하는 속죄가 있기 마련이다. 고해성사를 해야겠다. 그때 피아노 학원에서 원생 신발을 차도로 던진 건 저였어요. 9살이었고 그게 재밌었어요. 죄송합니다 원장님. 신발값 물어주셨죠. 죄를 알고 나니 피아노 학원은 없어졌어요. 선생님 이름도 기억이 안 나네요. 속죄할 길이 없네요. 롯데 슈퍼 사장님 죄송합니다. 19살 때 술에 취해 사람 없는 틈을 타 소시지 한 개를 몰래 주머니에 넣었어요. 돈이 없는 것도, 소시지가 먹고 싶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바로 지금 남의 것을 훔칠 수 있다는 강렬한 충동에 휩싸여 저지른 짓이었어요. 쾌감은 잠깐이고 찝찝함은 영원할 거란 걸 그 순간은 몰랐어요. 아직도 집 앞엔 슈퍼가 있는데 언젠가는 문틈에 지폐라도 끼워 넣어야 할까 봐요.


중죄를 고백한다. 그땐 나름 철이 들었다고 생각한 20대였다. 브리오니처럼 말로 지은 죄였다. 알량한 정의감이었다. 익명의 힘을 빌려 정의의 투사라도 된 양 누군가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건 부정한 일이었다고. 저격당한 사람은 큰 상처를 받았다. 다른 누군가는 그 글을 쓴 게 당신 아니냐며 여러 사람의 오해를 받았다. 나는 문제 제기만 하고 결코 수면 위로 나오지 않았다. 일이 커진 후엔 뒷감당이 두려워 내가 그 글을 썼노라고 고백할 수도 없었다. 결정적으로 나를 용서할 수 없는 건 내가 비판한 사람과 수면 위에선 아주 무난히 웃으며 잘 지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일에 대해 아무런 속죄도 하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이 그때 그 일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 있을 수 있었던 해프닝으로 기억하길, 아니면 그냥 잊어버렸길 바랐을 뿐이었다.


마음으로 하는 속죄라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일종의 자기 기만이 아닐까? 브리오니는 자학하듯 자신의 삶을 고행으로 던졌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으로 충분했을까? 용서할 주체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삶의 태도만 변화시키는 건 죄책감을 덜어낼 요량의 취소(undoing)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삶은 변해도 죄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용서를 구할 상대가 없다는 건 속죄할 길이 없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브리오니는 그걸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용서해 줄 사람 없는 속죄의 길에서 고통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브리오니는 평생 속죄하며 글을 썼다. 사람들은 많은 죄를 짓고 때론 침묵한다. 죄많은 세상에 뉘우침은 적다. 용서와 속죄가 따로 성립할 수 있는가. 소설은 무거운 질문을 남긴다.

그녀가 이렇게 흥분하는 것은 선과 악, 영웅과 악당이라는 피곤한 투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세 사람 중에는 악한 사람도 특별히 선한 사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었다. 굳이 교훈이 있어야 할 까닭도 없었다. 단지 타인의 마음도 똑같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하면서 자신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살아 숨쉬는 각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기만 하면 된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그리고 오직 소설 속에서만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모든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이것이 소설이 지녀야 할 유일한 교훈이었다. 67p

그녀는 또한 자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관심과 남에 대한 친절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 있을 때가 제일 좋은 법이었다. 107p

그렇게도 뻣뻣하고 오만하던 여자애가 아홉 살짜리 남동생들 때문에 이렇게까지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브리오니는 신기하게 느껴졌고, 더불어 자신의 강인함에 우쭐해지기도 했다. 바로 이거야. 기쁨에 가까운 느낌을 갖게 된 건 자기 내면의 힘 덕분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결국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때때로 더른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우리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170p

심지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 역시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치밀하게 거짓말을 했다면, 그는 그녀에게 상당히 신경을 쓰고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거짓말은 그들의 결혼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증거였다. 214p

로비와 세실리아는 지난 수년 동안 사랑을 나눠왔다ㅡ편지로. 암호를 교환하며 서로 더욱더 가까워졌는데, 이제 실제로 만나 예의바른 질문과 대답을 나누다보니 그 가까움이란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그들은 편지에서 너무 앞서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순간을 너무나 오랬동안 열망하고 상상해온 게 문제인 것 같았다. 현실이 상상과 희망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 동안 세상에서 단절된 삶을 살아온 그에게는 한 걸음 물러나서 전체를 볼 수 있는 자신감이 사라지고 없었다. 사랑해. 너로 인해 살았어. 수도 없이 되뇌었던 그 말이 지금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녀가 사는 하숙집에 대해 물었다. 290p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편지는 그녀의 아픈 곳을 찌르고 있었다. 소녀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에게 끔찍한 불행을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하찮은 소설 하나 써냄으로써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소설을 잡지사에 보냄으로써 허영심을 만족시키려 했던 건 아닐까? 빛과 돌과 물에 대한 장황한 묘사, 세명의 관점으로 나뉜 서술방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끝없이 계속되는 고요, 그 어떤 것도 그녀의 비겁함을 숨길 수는 없다.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ㅡ그것도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의식의 흐름ㅡ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치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 449p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52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