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거짓말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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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여러 작가들의 단편소설들, 가령 이상 문학상이라든지 현대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을 볼 때면 작가들이 지나치게 관념적 주제에 집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작가와 독자가 생각하는 소설의 가치는 제각각 다를 테지만, 소설도 본디 유희의 한 목적이자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마도 최근 한국 문학에서 보이는 그런 기조가 기존 독자들에게선 피로감을 유발하고 새로운 독자들에겐 유입을 막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짐짓 우려를 표하고 있으니 내가 한국 문단의 권위자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독서량으로 따지면 파워 독자 축에도 끼지 못하는 주제에(ㅎ). 뭐 아무튼 요즘 단편 소설들은 왠지 현실과의 접점이 부족하고, 그래서 내게는 별로 와 닿는 이야기들이 아니다.


왜 저런 이야기를 열심히 썼느냐면, 뻔하지. 8년 전에 나온 이 소설집은 요즘 소설들과 달리 고상한 척하지 않고 아주 재밌기 때문이다. 문장 이곳저곳에서 숨길 수 없는 여류 작가 특유의 감수성이 묻어난다. 여류 작가들을 아주 거칠고 단순하게 문체로 분류해보면 신경숙, 한강, 편혜영, 김숨이 진중한 문체의 작가로 분류될 것이고 정이현은 양귀자, 은희경, 김애란과 함께 가볍고 활기찬 문체의 작가로 분류될 것이다. 이렇게 가볍게 읽히는 문체는 역시 가벼운 일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때 그 장점이 극대화된다. (주제가 가볍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작가의 장기는 가독성 좋은 문체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듯하다. 작가는 짐짓 가벼워 보이는 이야기 속에서 흔들리는 개인의 내면을 담담하고 치밀하게 그려낸다. 『삼풍 백화점』은 별로 친하지 않았던 고등학교 동창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이야기다. 취직도 연애도 신통치 않던 화자는 동창 R을 다시 만난다. R은 결코 화자에게 무슨 일을 하는지, 학교는 졸업했는지 묻는 법이 없다. 둘은 담담하게 적당히 가까워진다. 화자도 R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것이 예의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너진 삼풍 백화점과 함께 사라진 R을 담담하지만 참으로 힘겹게 소회하곤 한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 적절한 마음과 마음 사이의 알맞은 거리가 무엇인지 작가는 독자에게 반문한다. 『어금니』에서는 아들 현우가 조건 만남으로 만난 열 여섯 살 여자 아이를 조수석에 태우고 음주운전을 한다. 여자 아이는 현장에서 죽고, 현우는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상에 그친다. 현우의 아버지는 합의를 통해 사건을 정리하는 데만 집중하고, 현우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병실에서 만화책을 읽는다. 망자에 대한 애도와 죄책감이 결여되어 있는 이 풍경 속에서 오직 현우 어머니의 죄책감만이 뽑지 않은 어금니처럼 묵묵히 썩어 들어간다. 『위험한 독신녀』에선 철없던 시절의 악의에 대한 묵묵한 참회를 이야기하고 『익명의 당신에게』에선 사랑에 대한 확증 편향적 사고가 얼마나 비겁한 행동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를 교묘히 이야기한다. 


요즘 재밌는 책이 통 없다면 이 책을 권한다. 때론 과민한, 때론 담담한 우리들 이야기 속에서 무너지는 양심과 그것을 가까스로 부여잡으려 하는 안간힘이 이루는 긴장을 느껴보자. 읽어보면 알겠지만 돌싱, 노처녀가 얼마나 예민한지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건 덤이다. (ㅎㅎ 농담!)

어쩌다 가끔, 예컨대 휴일 오후 긴 낮잠에서 깨어 보니 이미 캄캄한 밤이 되어 버렸다든가 할 때에는 문득 어리벙벙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 정도 고독이야 현대인들 누구나 느낄 만한 수준이므로 나도 견딜만하다고 생각한다. 삶에 절정이 없다는 것쯤은 진즉에 눈치챘다. 9p

엄마 미쳤어?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가서 어떻게 살라는 거야? 너 계속 영어학원 다녔잖아. 기껏 비싼 돈 처들여 학원 보내줬더니 말이 왜 안 통해? 아무튼 안 돼. 난 절대 다른 나라에서는 못 살아. 왜? 왜냐면 나는 고급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니까. 그제야 내가 떠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아 있기 위해서 영어 공부를 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3월이 코앞이었다. 51p

물어봤으면 대답해주었겠지만, R에게 왜 혼자 사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내 기준에서는 그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R은 그걸 섭섭하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마음과 마음 사이 알맞은 거리를 측정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겐 몹시 어렵기만 하다. 책꽂이에 꽂혀 있던 시집들에 대해서도 궁금했지만 입을 닫았다. 캐러멜 색 표지의 `文學과 知性 詩人選 80 기형도 詩集` 『입 속의 검은 잎』은 나도 가지고 있는 시집이었다.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이 땅의 날씨가 나빴고 나는 그 날씨를 견디지 못했다. 그때도 거리는 있었고 자동차는 지나갔다.` 그렇게 시작하는 뒤 표지의 시작 메모를 R의 집에서 다시 읽었을 때, 내가 견디지 못하는 것은 이 땅의 날씨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59p

아주 어렸을 적, 쇠줄에 종일 묶여 있던 옆집 개의 이름을 붙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노랑이, 라는 이름은 털 색깔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검둥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명명은 책임질 수 있을 때나 하는 것임을, 나는 이제 어렴풋 알고 있었다. 72p

남편이 다정하게 잔을 부딪쳐왔다. 아마도 나는, 나와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것이다. 94p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학교 앞 문방구에는 빳빳하게 투명 코팅된 컬러 사진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중에 이선희를 선택하든 허재를 선택하든, 어쨌든, 너는 백 원의 동전을 지불해야만 했다. 재화는 한정되어 있고 선택의 폭은 넓었다. 허재인가, 이선희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너는 늘 쭈뼜댔다. 그때 너는 몰랐다. 제 안의 욕망을 냉랭하게 응시하는 일이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어렵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171p

엄마는 오해했다. 그가 상처(喪妻)한 남자라 싫은 게 아니라, 상처(傷處)를 가지고 있어서 싫었다. 247p

부정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응징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녀가 62명 중에 62등이라는 것은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언제든 알려질 비밀이었다. 그 소문이 산불처럼 번지는 데 대해 나는 별다른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대걸레라는 별명을 붙인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채린의 뒤에 대걸레와 주전자밖에 없잖아, 라고 커다랗게 말했을 뿐이다. 그 말 속에 들어 있던 악의를 부인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단정하고 규범적인 소녀라면 누구나 그녀에 대해 그만큼의 악의는 품고 있었을 것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타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인간은 어디에나 있다. 채린에게 어디서부터 사과해야 할지 막막했다. 253p

연희는 자신이 이름 모를 커다란 괴물의 뱃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사랑을 지키기 위해, 제 안의 부적절한 욕망과 대면해야 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지금이 바로 그 숭고하고 비루한 때라는 것을 연희는 깨달았다.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억지로라도 식욕을 내야 했다. 연희는 샌드위치 조각을 맹렬히 씹어 삼켰다. 31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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