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3부작 열린책들 세계문학 38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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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은 나의 거울이다, 혹은 타인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라는 문장을 많이 봤다. 누가 먼저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비슷한 책 제목도 있다. 그러나 누가 먼저 말했어도 상관없다. 내가 감각하는 타인이 온전한 타인이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살며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간다. 시간이 지나 주위에 남은 몇 안 되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 스펙트럼이 반영된 결과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반영하는 거울로서의 타인이 된다. 한편, 다른 각도에서 생각할 수도 있다. 내게로 향하는 타인의 감정이 온전한 타인의 감정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것의 본질이 내가 상대방에게 투사한 감정이라면. 그때 타인은 진정으로 거울에 맺힌 나의 상像일 것이다.

『뉴욕 3부작』은 세 편의 이야기다. 세 편 모두 언뜻 비슷한 느낌인데, 타인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주체의 자아가 붕괴되는 과정이다. 「유리의 도시」에선 잘못 걸려온 전화로 탐정을 맡게 된 대니얼 퀸이 피터 스필먼을 관찰하고 감시하고 「유령들」에선 탐정 블루가 정체불명의 화이트의 의뢰로 블랙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기록한다. 「잠겨 있는 방」은 약간 결이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비슷하다. 작가가 행방불명된 (그러나 살아있는) 친구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친구 삶의 궤적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질문이 남는다. 타인의 삶을 집요하게 관찰하던 그들은 왜 붕괴하는가.

세 편 모두에서 주인공은 타인의 삶에 대한 글을 쓴다. 과연 타인의 삶에 대한 글은 관찰과 증언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소설 내에선 불가능해 보인다. 「유령들」의 탐정 블루는 '수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들에서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관찰의 한계를 느낀 탐정들은 관찰 대상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들은 타인을 깊이 들여다볼 때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경험을 한다. 자아 정체성의 역전을 겪은 그들은 혼란스럽다.

이야기의 의도는 마지막 편에 이르러서 드러난다. 앞선 두 탐정 이야기는 마지막 이야기 「잠겨있는 방」의 화자가 자신의 경험을 변주하여 창조한 것이다. 「잠겨있는 방」의 화자는 모든 면에서 뛰어난 친구였던 팬쇼에게 경외심과 열등감을 동시에 느낀다. 행방불명된 (그러나 살아있는 게 분명한) 팬쇼의 전기를 작성하다 그의 아내와 가까워지고 결혼하게 된다. 팬쇼의 어머니와 만나선 정사한다. 몹시 위험한 이 행위는 팬쇼와 자신의 동일시를 전제로 이루어진다. 이 동일시를 통해 그들의 정사는 상징적인 근친상간이 된다. 화자만큼이나 팬쇼를 증오하던 팬쇼의 어머니도 이 자아의 동일시에 무의식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팬쇼에게 끔찍한 복수를 하는 공모자가 된다. 팬쇼의 전유물들을 침범하고 그의 삶을 추적하는 동안 화자의 자의식은 몹시 흔들린다. 그의 삶은 사라진 팬쇼에게 잠식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이걸 깨달은 그에겐 단 하나의 선택만 남는다. 팬쇼를 만나서 죽여야 한다. 이미 침식당한 자아를 지키기 위해선 팬쇼가 정말로 죽어서 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세 편의 이야기는 모두 다르면서도 결국 같은 이야기다. 그들 모두 타인을 깊이 알려고 할수록 자신의 내면만 깊게 확인하게 된다. 타인은 결코 온전한 타인이 아니고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이 투사된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을 망각한 '유령들'이고, 관찰하는 동시에 관찰당하는 공간인 뉴욕은 투명한 '유리의 도시'이고, 힘겹게 타인의 자아에 도달했을 때 그곳은 자신의 내면 속 '닫혀있는 방'이라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이 절절하게 다가온다면 그건 타인에게 내 욕망을 투사하는 일이 결코 드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미숙한 방어기제는 삶에서 숱하게 저질러지고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자아를 지키며 살기란 어렵다. '그들은 왜 붕괴하는가'라는 질문의 주어는 언제든지 '나'로 바뀔 수 있다. 이 이야기는 그래서 쉽지 않다.

마지막 이야기 속 화자의 혼란스러운 경험을 모두 읽으면 앞의 두 이야기는 또 다른 생명력을 갖는다. 자아의 병리적 현상이 이야기로 어떻게 재창조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물과 장치의 변주, 메타포, 메타픽션의 활용 등등. 그러나 가장 압도적이었던 마지막 이야기조차 진실이 아니라 하나의 창조된 이야기일 뿐임을 떠올린다면 폴 오스터라는 작가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누구나 이야기를 듣기 원하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말속에 진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상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이야기 속의 인물로 대체시킨다. 마치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기만이다. 우리는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때로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어렴풋이 알기도 하겠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삶이 계속될수록 우리 자신에 대해 점점 더 불확실해져서 우리 자신의 모순을 점점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된다. 누구도 경계를 넘어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바로 그 간단한 이유로. 3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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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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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책임이 있는 곤란한 사건에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할까. 쉽게 생각하면 인정 또는 부정의 방법으로 나눌 수 있겠다. 전자는 사건의 책임을 인정하며 마무리 짓지만, 사실 그 자신에게 문제 상황의 해결은 아니다. 곤란함을 그대로 껴안게 되므로 일종의 체념이나 포기에 가깝다. 그러나 적어도 비겁함은 남지 않는다. 후자는 곤란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그야말로 문제 상황의 해결이지만 윤리의 문제는 남는다. 자신이 외면한 곤란함은 타인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비겁하다. 더 생각해보면 우리에겐 좋은 방법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지원은 16살 딸의 출산에 절망하지만 한 줄기 희망 같은 말을 듣는다. 24주 미숙아는 동맥관 개존증을 가지고 있어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이다. 지원은 딸의 아이의 수술을 자꾸 미룬다. 지원은 문제에 직면하여 인정도 부정도 아닌 방법을 택했다. 못 이기는 척 상황을 종결하는 방법이다. 문제 상황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겉보기에는 윤리의 문제도 남지 않는다. 어쩔 수 없었어. 그러나 이 방법을 선택할 때 우리는 가장 비겁해진다.

이런 속된 삶의 방식은 소설 곳곳에서 보인다. <우리 안의 천사>의 화자는 동거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것을 마음먹었다가 그의 돈가방을 본다. 처음 본 배다른 형이 준 것이다. 남자친구는 배다른 형에게 간접 살인 제안을 받는다. 자신은 알리바이를 위해 일본 학회에 가 있을 동안 친부의 인슐린을 바꿔치기 해달라고. 그렇게 빠른 상속을 받으면 그것을 나누겠다고. 화자는 망설이는 남자친구의 등에 뺨을 대며 말한다."내가 같이 가줄게"

사랑의 포즈가 몹시도 부정한 각오에 포개어진다. 감정까지 동원하여 죄를 합리화한다. 가장 질 낮은 감정과 가장 고상한 감정이 동일시되려 할 때 윤리적 직관은 말한다. 이건 역겹다고. 그러나 한편으론 두렵기도 한 장면인데 이런 비윤리에 대한 방관, 동조, 합리화는 실제 삶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두렵다.

정이현 소설에선 흔한 자기반성이나 성찰이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속된 고민을 계속 보여줄 뿐인데 그걸 바라 보는 독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윤리를 시험당한다. 과연 나는 쉬운 선택을 하지 않고 살 수 있을지 자문하는 것이다. <우리 안의 천사>의 화자는 독백한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 죄는 피할 수 없고 일상은 여전히 변함없을 거란 사실, 그걸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속물로 만든다.

메이 옆의 침상에서 진정제 링거를 맞다가 나는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메이에게 다가가 먼저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그들은 메이에게 높임말을 사용해 정중하게 말했는데, 그 애의 예후를 진심으로 염려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누구를 사랑하는 건 감출 수가 없는 일이었다. 1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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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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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교육용 소설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교훈적이다. 주인공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강간 용의자로 몰린 흑인 남성을 변호한다. 작가는 그의 목소리를 빌려 정의와 인권에 대해 말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일상에서 충실히 실천하는 애티커스 핀치의 모습과 그를 보며 성장하는 천방지축 아이들의 이야기가 뭉클하다.

책에서 말하는 앵무새 죽이기란 인종 차별(혹은 사회적 약자 차별)이지만 조금 더 넓은 범위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애티커스 핀치는 "사람들의 채소밭에서 뭘 따 먹지도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를 틀지도 않"는 앵무새를 죽이는 건 죄가 된다고 말한다.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자기 본위적 행위는 제한할 수 없다는 자유주의적 가치의 핵심과 상통하는 말이다. 2016년의 한국에도 많은 앵무새와 그만큼 많은 앵무새 사냥꾼이 있다. 김조광수 커플의 혼인신고 기사엔 동성애 반대와 혐오 리플이 달리고, 설리의 옷 안으로 비치는 유두 윤곽을 두고선 너도 나도 입방아를 찧는다. 관습적 도덕성이라는 애매한 가치로 타인을 재단하고, 그에 기초한 법률로 타인을 옭아맬 때 앵무새는 죽는다. 돌아보면 자신도 한 마리 앵무새일지도 모르는데 뭐 그리 팍팍하게 구는지. 생각해보면 아이들이야말로 자유주의적 가치에 충실했던 것 같다. 자신의 자유를 지키는 데만 충실한 게 문제지만 ㅎㅎ. 여하튼 사회의 틀 안에 포섭되며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약해지는 걸까? 어른들은 한 번쯤 아이들의 정제되지 않은 대사를 되새겨볼 만하다. "내가 이러는데 뭐 보태준 거 있냐?" 과연 그렇다.

"우린 아저씨를 놀리지 않았어요. 비웃지도 않았고요." 오빠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던 건 그냥ㅡ"
"바로 너희들이 하고 있던 짓이지, 안 그래?"
"아저씨를 놀려 댄 거 말이에요?"
"아니, 이웃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려고 아저씨가 살아온 삶을 온 천하에 드러내 보여 준 거 말이다." 10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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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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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을 가끔 이용한다. 이곳저곳에서 대리기사를 불러봤지만 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모두 같았다. 사장님. 잠시 차를 맡길 뿐이지만 그들이 몇 살이건 30대 초반의 나는 사장님이 된다. 올 가을 제주도에 갔을 땐 서귀포 시내에서 법환포구까지 대리운전을 이용했다. 숙소는 버스는 물론 택시 하나 안 보이는 곳에 있었다. 난 대리기사가 도대체 어떻게 돌아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여 복귀 방법을 물었다. 그는 걸어가면 된다고 대답했다. 걷는다. 차가 없으니 걷는다. 간단한 대답이었다. 그가 얼마나, 어디까지 걸어야 하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대학교 시간강사였던 저자는 대학교 시스템이 학부생, 대학원생, 시간강사로 이어지는 공고한 착취 체계라고 말한다. 생활비조차 제대로 조달할 수 없을 때 저자는 맥도날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대학교가 보장해주지 않던 4대 보험을 맥도날드는 당연하다는 듯 보장해준다. 저자는 대학교를 그만두고 육체노동을 시작한다. 대리운전이다.

책은 생생한 노동의 경험으로 차 있다. 그들이 어떤 기준으로 콜을 받는지, 대중교통이 끊겼을 때 어떻게 도심으로 복귀하는지, 무엇이 그들을 힘들게 하는지, 이런 대리기사들의 생태계를 엿보는 것만으로도 책은 흥미롭다. 그러나 마냥 흥미롭지만은 않았다. 사회의 민낯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3km 거리를 택시로 가고 있는데 단 2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왜 이렇게 늦"느냐며 다른 대리기사를 불러 가는 이야기, 두 명 이상의 대리기사를 호출하고 먼저 온 기사에게 운전을 맡기는 이야기, 수 킬로미터를 뛰어왔는데 50m 앞에서 호출을 취소하는 이야기를 읽을 땐 실로 참담했다. 이것들은 거대한 악의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행위다. 그래서 우리를 더욱 절망케한다.

저자는 '이 사회 어디도 타인의 운전석이 아닌 곳이 없'다고 말한다. 대리운전할 때 창문, 에어컨, 시트 포지션, 오디오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행위뿐만 아니라 주체로서의 사유까지 빼앗긴다. 대리기사는 손님의 말에 적당한 맞장구를 쳐줘야 한다. 비단 대리기사의 운전석 뿐만 아니라 다른 곳곳에서도 개인의 의지가 통제/검열된다. 저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때 자신이 주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고 고백한다. 물러나고 나서야 비로소 시스템의 균열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회는 실로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이런 저자의 진단은 자칫 허무하게 읽힐 수도 있다. 대부분 남의 공간에서, 남이 시키는 일을 하고, 남이 원하는 사유를 하고, 남이 주는 돈을 받으며 살아가니 말이다. 대리인간이 아닐 수 없는데 뭐 어쩌란 말인가.

저자는 시간강사로 일하며 논문에 매달릴 때 자신이 하지 않던 가사/육아 노동을 아내가 온전히 대리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시간강사를 그만두고 나서야 아내가 자신의 삶을 떠받치고 있었음을 깨닫고 존중할 수 있게 됐다고. 그러니까, 지금 누리는 삶도 온전한 자신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 삶은 내 몫을 누군가 대리하기에 영위된다. 부모, 가족, 배우자, 그도 아니라면 다른 누군가. 어쩔 수 없는 대리사회에서 살지라도 내 삶에 타인의 지분이 있음을 자각할 때 서로의 삶을 조금 나아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대리사회의 욕망을 직시할 때 타인을 주체로서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고 자신에게 강요되는 천박한 욕망을 거부할 용기를 얻는다고 말한다. 멋진 말이지만 왠지 거창하다. 타인을 각자의 주체로서 존중하자고 이해하면 충분할 것이다.

법환포구 숙소 앞은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만 들리고 캄캄했다. 나는 대리기사를 그대로 보내기 미안해 만 원을 추가로 지불했다. 만 원이면 큰 길로 나가서 택시라도 탈 수 있을 것이었다. 대리운전 회사에서 운영하는 셔틀이 있다면 그거 괜한 호구짓 아니느냐고 할 수도 있겠다. 상관없다. 그가 언젠가 먼 곳에 뚝 떨어졌을 때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니까. 얼마 전에 서울에서 만난 대리기사에겐 음료수라도 사 드시라고 오천 원을 내밀었다. 첫차가 돌아다닐 시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그 또한 언젠가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아니라도 상관없다. 대리기사가 무언가를 견디기 위해/회복하기 위해 일하는 중이라면 작은 응원같은 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것조차 아니라도 좋다. 이런 것들이 얼마나 쌓여야 좋은 세상이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좋은 세상은 타인을 위한 작은 손해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믿고 싶다.

호칭은 한 인간의 주체성을 대리하는 수단이 된다. 자신을 그 공간의 주체라고 믿게 만드는 동시에, 그를 둘러싼 여러 구조적 문제들을 덮어버린다. 나 역시 내가 속한 공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나는 그 구성원이라는 환상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그 환각에 익숙해질 때, 우리 모두는 ‘대리‘가 된다. 그 공간에서는 더 이상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의 욕망을 대리하며 ‘가짜 주인‘이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대학뿐 아니라 내가 속했던 여러 공간에서 대개 주체로 서지 못했다. 누구도 호칭 뒤에 숨은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고, 나도 스스로 한 발 물러서서 그와 마주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의도치 않게 밀려나고서야 나는 누구였는지 나는 거기에서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았고, 그때는 너무 늦었다. 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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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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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문학상 후보로 매년 이름을 올리지만 아직 수상을 하지 못한, 노벨상을 기다리는 사이 너무 늙어버려 자칫하단 노벨상 받기 전에 돌아가실 것 같은(흑흑) 밀란 쿤데라 할배의 처녀작입니다. 1967년 작품이니 무려 49년 전이네요. 밀란 쿤데라는 체코에서 태어났으나 1970년엔 공산주의 체제하 체코에서 추방당합니다. 추방의 발단이 된 작품이 바로 『농담』입니다. 소설이 전통과, 종교와, 자유를 통제하는 공산주의를 풍자했기 때문이죠. 500페이지가 넘으니 책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제목이 왜 '농담'인지만 말해야겠군요.

소설에서 가장 많은 목소리를 내는 중심인물은 루드비크입니다. 루드비크는 공산당원이었지만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고 유머를 즐길 줄 아는 대학생이었습니다. 그에겐 마르게타라는 여친이 있었는데 그의 마음을 잘 몰라줍니다. 왜 그런 것 있잖습니까? 마음에 드는 여자아이의 치마를 아이스케키 한다든지, 고무줄놀이 가서 훼방을 놓는 헤헤헿... 아앗 정신 차려야지 아무튼 철없는 루드비크는 여친한테 삐쳤습니다. 그래서 자기 딴엔 농담이라고 짓궂은 말을 적은 엽서를 보내는데 내용이 이렇습니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루드비크'라구요. 루드비크의 인생은 이 농담 엽서 한방에 훅 갑니다. 마르게타가 진지충인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마르게타는 엽서를 고자질했습니다. 다행히 인민재판의 주재자는 절친 제마네크네요. 어라, 그런데 갑자기 제마네크 요놈아가 씹정색을 하며 루드비크의 당원 자격을 박탈합니다. 아아 불쌍한 루드비크. 그는 정치범들이 모인 특수 (노가다) 부대에 징집되어 곡괭이질만 죽어라 합니다. 다행히 그곳에서도 외출과 월급이 있군요. 루드비크는 외출에서 아름다운 여자 루치에를 만나게 됩니다. 정신과 신체의 자유 모두 속박당한 젊은이의 몸이 얼마나 끓겠습니까. 그런데, 루치에는 몸을 허락하지 않는군요. 이런... 루드비크는 자기가 어떻게 위험을 무릅쓰고 한밤중에 빠져나왔는데 허락을 하지 않는 거냐고 묻습니다. 결국 루치에가 처녀라서 자신에게도 몸을 허락하지 않는 걸로 혼자 결론 내리고 폭발합니다. 뺨을 때리고 헤어지네요. (체남충 out!)

사회로 나와 정신 차려보니 벌써 30 중반입니다. 인생 넘나 비정한 것. 루드비크는 자신을 나락으로 몰았던 제마네크에게 복수하려 합니다. 제마네크의 부인을 꼬셔서 자빠트리면 멋진 복수가 될 것이라 생각하죠. 루드비크는 도도한 도시남자의 매력을 물씬 풍기며 완벽하게 헬레나를 제압합니다. SM 플레이까지 하네요. 쿤데라 할아버지 오래 살아서 야한 거 계속 써주세... 아앗 저도 모르게 음란마귀가! 죄송합니다.

그런데 이걸 어쩝니까. 거리에서 만난 제마네크는 이미 수년 전부터 부인 헬레나에게 관심이 1도 없는 상태였네요. 게다가, 축 처진(...) 헬레나와는 다르게 그의 옆엔 팽팽한 20대 초반 여친이 있네요. 이미 옆구리에 낀 여자의 차이로 완패인데, 제마네크의 반응은 거의 이런 식이네요. 루드비크 풉... 너 헬레나랑 풉ㅂ... 잤다며? 풉! ㅋㅋㅋ. 더 나쁜 건 제마네크는 자신이 루드비크에게 저질렀던 짓을 기억도 잘 못 하고, 루드비크가 젊어서 그랬던 것처럼 자유로운 사상으로 대학생들에게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는 거지요. 얄궂은 운명의 차이에 기가 막힐 지경입니다. 그 와중에 헬레나는 영문도 모른 채 루드비크에게 하트 뿅뿅을 날리고 있고요. 루드비크는 복수는커녕 거의 울고 싶은 기분입니다. 제마네크는 루드비크 너 ㅋㅋ 잘 해봐라 ㅋㅋ 하며 떠나는군요... 이제 이 사건은 평생 이불킥 감입니다.

루드비크는 패배감에 휩싸이고, 헬레나에게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헬레나는 절망에 휩싸입니다. 헬레나는 기자였는데, 그녀를 따라다니는 20대 초반 카메라 기사가 있습니다. 요 카메라 기사는 세 보이려고 가죽잠바나 입는 얼치기 허세남인데 헬레나를 좋아합니다. 가죽잠바 청년은 그녀를 위로해주기 위해 숙소로 데려가죠. 헬레나는 이 마당에 정신 못 차리고 그래도 널 사랑했다며 루드비크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나선 가죽잠바 청년에게 나가서 편지를 루드비크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가죽잠바 청년은 헬레나에게 멋지게 키스하고 내 다녀오리다! 하는군요. 순정만화 캐릭터 같습니다. 여기까진. 헬레나는 가죽잠바 청년이 나간 사이 그의 옷 주머니에서 진통제 약통을 찾아내고 약통에 든 약을 모두 먹습니다. 비련의 여주인공 같습니다. 지금까진.

식당에서 패배감에 젖어 낮술 마시던 루드비크는 가죽잠바 청년에게 편지를 전해 받습니다. 내용이... 이런 그녀가 자살할 것 같습니다! 루드비크는 가죽잠바 청년과 황급히 숙소로 뛰어들어와 헬레나를 찾습니다. 이런, 어디에도 그녀가 없군요. 점점 더 그녀가 시체로 발견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이제 숙소의 마지막 장소에 도달하는데, 화장실이네요. 문이 잠겨있고 대답이 없습니다. 절망적인 예감에 화장실 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갔는데 헬레나는. 이런...

똥을 싸고 있네요. 어떤 은유도 아닌 실재하는 똥 말입니다 똥. 헬레나는 다 꺼져버리라며 속옷도 올리지 못한 채 풀밭으로 뛰어갔다가 위장이 요동치는 바람에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서 폭풍 설사를 합니다. 가죽잠바 청년이 변비약 들고 다니기 쪽팔리다며 진통제 약통에 그것을 담아 다녔던 것이죠. 이 소란이 다 뭐랍니까. 이 셋 모두에게 인생이란 짓궂은 농담 같군요.

여기까지 주요 스토리였습니다. 주말 내내 지겹게 읽고 또 이렇게 쓰려니 정말 지겹네요. 왠지 다 읽고 나니까 설사 얘기만 한 것 같은데, 그렇진 않습니다. 이 소설은 챕터마다 인물이 바뀌며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주요인물 중 루드비크가 사랑했던 루치에만이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그녀는 오로지 남들에게 관찰된 모습으로 서술되죠. 루드비크는 루치에가 자신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은 게 처녀성의 상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루드비크의 친구 코스트카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건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16살 때 6명에게 강간당했고 그로 인한 성적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트라우마를 끈기 있게 들어주고 보듬어 안아준 코스트카에겐 몸을 허락하죠. 타자를 이해한다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해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루드비크는 이런 사실을 전통 축제인 '왕들의 기마행렬'을 보고 깨닫습니다. 젊었을 적 '왕들의 기마행렬' 구성원으로 참여해 말위에 올라타 있을 땐, 내부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정작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 관람객의 입장에서 행렬을 바라보니 비로소 그 행렬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고 느낍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동에서 모두 빠져나와 인생을 바라봤을 때 비로소 어떤 삶의 비의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인생 전체가 철회 불가능한 농담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밀란 쿤데라는 농담 쳤다가 당에서 추방당한 루드비크처럼, 이 농담 같은 『농담』을 썼다가 체코에서 추방당합니다. 그러나 어찌 됐건 자유의 나라 프랑스에 정착했고,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으니 그다지 비극적인 결말은 아니네요. 밀란 쿤데라가 500페이지 넘게 공들여 문장을 쓰다 화려한 설사 마무리로 공산주의를 까는 걸 보고 있자면, 인간에게 자유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상 설사, 아니 농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당신을 이해는 할 수 있다 해도, 사람들에 대한 그런 식의 증오는 끔찍한 것이고 죄악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 증오는 당신의 저주가 되어 버렸어요. 아무것도 용서되지 않는 세상, 구원이 거부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은 지옥에서 사는 것과 같으니까요. 38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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