믜리도 괴리도 업시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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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맑고 차가워지는 1월은 훈련하기 좋은 날이다. 또 이틀을 야외에서 잤다. 밝은 달이 별빛을 가리고 벌레 소리 대신 은은한 대남방송이 공기를 채운다. 구호소 텐트에 등유 난로를 피웠으니 다른 병과가 보면 글램핑이었겠다. 텐트 안이 나름 안락했으므로 그동안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었다. "믜리도 괴리도 없시"는 청산별곡 가사의 한 구절인데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6차 교육과정 끝물이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 교과서에서 청산별곡을 읽었다. 그러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저런 구절이 있었던가...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라는 중독성 강한 훅만 기억난다. 한민족은 오래전부터 후크송을 좋아했던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한다.


<블랙박스>의 블랙박스 판매원 박세권은 소설가 박세권에게 "어떻게 그렇게 남의 인생을 잘 아세요?"라고 묻는가 하면 단편 소설을 두곤 "조그만 게 엄청 복잡하고 좀 가지고 놀려고 하면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 같"다고 말한다. 좀 더 지나선 "문학이 별거예요?"라고 묻다가 "야, 씨발아"까지 나아간다. 그가 정색하는 장면에서 이야기는 폭발한다. 맞다. 별것도 아닌 소설은 얼마나 연약한가.


작고한 문학 평론가 김현 선생은 책읽기의 괴로움에 대해 말했다. 책 속엔 삶의 원형이 있고, 그것은 "이 세계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으며, 우리는 왜 불행한가 하는 것을 반성케 하는 표지들"이라는 말이다. 또한 이런 책읽기는 "자기가 책을 통해 불행이나 결핍이 되어, 충족이나 행복을 싸워 얻게 하는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에 맞춰보기엔 성석제의 소설은 어딘가 기이한 면이 있다. 소설 속 삶의 원형들은 어딘가 부당하고 슬픈 것에 가까우며, 더욱이 작가의 글솜씨가 그것들을 별로 괴롭지 않게 읽어내려갈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책 속 그들보단 지금 여기 우리가 행복하다.


다만 책을 덮고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발 디딘 곳 밖으로 나가면 말도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라고. 단지 그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 아닐까. '말도 안 된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구현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논리적/윤리적으로 부당하다는 뜻이다. 소설은 현실적인 비현실인데 요즘 세상은 점점 비현실적인 현실로만 보인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소설적인 세계를 살고 있다. 청산별곡 "믜리도 괴리도 업시" 구절의 앞뒤를 붙여서 해석해보면 이렇다. "어디다 던지는 돌인가, 누구를 맞히려던 돌인가.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 어디서 날아왔는지도 모르는 돌 맞아서 울고 있는 사람이 많이 보인다. 그들을 달랠 수 있다면 아니, 그들의 존재라도 인식시켜준다면 별거 아닌 이야기라도 괜찮지 않겠는가. 김현 선생은 <책읽기의 괴로움> 마지막 문장에서 "나는 내 자신이 불행이고 결핍이다."라고 말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조금 더 나아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시대의 책 읽는 사람에겐 문장의 주어는 '나'에서 '우리'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의 부당함은 지속되고 그것에 대한 탐구는 끝나지 않았으므로(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여전히 "별거" 아닌 소설을 읽는다. 새해엔 믜리도 괴리도 업시 우리 모두 함께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너 톨스토이가 무조건 싫다고 했지? 왜? 그 사람은 지난 세기 사람이야. 지금 톨스토이가 무덤에서 걸어나와서 <안나 카레리나>를 아무리 기가 막히게 잘 써낸다 해도 복잡한 현대인들의 여러 가지 심리를 다양한 각도에서 정교하게 묘사하는 건 불가능해. 말발이 안 먹힐 것 같으니까 도덕이나 인간의 도리 같은 걸로 독자를 찍어누르는 거지.그런 소설보다는 차라리 요새 나오는 신자본주의나 신경과학, 소비심리학 책을 참고하는 게 나아. 그쪽 저자들의 시각이 톨스토이보다 훨씬 다각적으로 예리하게 세상을, 사람들의 속셈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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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 도요타인가 - 위기의 한국기업에 해법 내미는 도요타 제2창업 스토리
최원석 지음 / 더퀘스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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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렉서스 차량 탑승 일가족 사망 사건을 접해봤을 것이다. 고속도로에서 차량 속도가 줄어들지 않았고 당시 운전자와 911과의 긴박한 통화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어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도요타는 차량 결함 가능성을 부정하고 사고를 운전자 책임으로 돌렸다. "매트가 액셀과 바닥 사이에 끼어서"라는 식의 설명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비슷한 사고는 계속 발생하여 2,000건에 이르고 사망자만 20여 명이었다. 추후 사고의 원인이 전자제어 소프트웨어 결함으로 밝혀졌고 도요타는 소비자를 기만했다는 이유로 12억 달러의 벌금을 선고받았다. 리콜 규모는 사상 최대인 1,000만 대였다. 품질과 신뢰보단 원가절감에 집중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과였다. 차량 기능의 진화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개발·생산 프로세스의 복잡성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창업가 3세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2010년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사과 발언을 하며 울먹거렸다.


이랬던 도요타가 절치부심하고 2015년 기준 세계 자동차 판매 순위 1위를 기록했다. 판매 대수로는 1,015만 대, 연간 매출은 한화로 약 310조 원, 연간 영업이익은 31조 원이었다. '세계 자동차 역사에서도 한 회사가 연간 영업이익 30조 원대를 넘어선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7)' 도요타는 리콜 사태 이후 불과 1년 만에 흑자 전화에 성공했다. 2000년대 후반의 리먼 쇼크, 초엔고 상황에서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을까? 그것의 이유로는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생산설비를 줄인 것이 지목된다. 부품 조달과 공장 가동에서 비용 절감을 했고 (9,900억 엔), 중국과 아시아 시장에서 선전한 것이 흑자 전환에 큰 역할을 했다. 저자는 리콜 사태로 기업 이미지에 타격을 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기업의 근본 체질이나 경영 시스템 그리고 제품의 품질과 성능이 큰 손상을 입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도요다 아키오 사장은 개발 과정의 의사소통 부족, 결함 발생 이후 초기 대응 실패, 본사·현장의 통합 위기 대책 부재 등이 종합적으로 맞물려 문제가 커졌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도요타가 수리한 것은 결함이라는 '하드웨어' 문제만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 즉 '소프트웨어' 문제였다. 도요타는 본사와 부품 제조사, 일본과 해외 조직 사이의 책임과 권한을 분명히 하는 한편 문제 상황에서의 빠른 대응을 위해 각 해외 본부에 자율성을 준 것이다. '중요 사안에 대해서는 해외 본부가 일본 본사에 실시간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본사 역시 최대한 빨리 그에 대한 판단을 내려주는 쪽으로 시스템을 뜯어고쳤다(25)'


2011년엔 동일본 대지진으로 2011년 2월에 가동한 미야기 현 신新공장이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아키오 사장은 고위 간부들에게 '현장 직원들한테 보고서 올리라고 하지 말고, 직접 가서 듣고 바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27)' 2009년 1,000만 대 리콜 때 겪었던 현장과 본사의 커뮤니케이션 실패, 관료주의적 보고서 문화에 대한 처절한 반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지시였다. 도요타는 석 달 만에 지진 피해를 모두 복구하고 전 생산시설을 정상화했다. 이후 도요타는 부품 조달 시스템의 문제를 깨닫고 부품 공장 전체를 대상으로 대재난 발생 시의 비상 복구체제를 재정비했다. 2016년 4월, 규슈 구마모토의 지진은 도요타 후쿠오카 공장을 정지시키고, 구마모토의 부품회사 공장을 부쉈다. 이 때문에 일본 내 16개 공장 가운데 15곳의 가동이 중단됐는데 도요타는 2011년 이후 지진 피해 공장의 복구에 대한 준비와 훈련이 돼 있었다. 2016년의 지진 때 도요타는 2주 만에 전 공장을 재가동했다.


지금까지는 도요타의 위기 극복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도요타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조직 대개편에 착수한다. 기능 중심에서 제품 중심의 조직으로 회사를 7개로 분리한 것이다. 일명 '컴퍼니'제인데 차종별로는 소형차/ 중·대형차/상용차/고급차(렉서스) 4개 차량 컴퍼니를 만들었고 개발 분야별로는 선진기술개발/파워트레인/커넥티드 부분의 3개 개발 컴퍼니를 만들었다. 이런 컴퍼니제가 무조건 효율적이진 않다. 소니도 컴퍼니제를 택했지만 컴퍼니 간의 중복 투자나 출혈 경쟁으로 실패를 겪었다. 그러나 도요타는 이를 철저히 연구하고 이미 컴퍼니제를 시행 중인 한국의 전자 업계를 벤치마킹한다. 컴퍼니제의 우려되는 단점에도 그것을 단행한 것은 '도요타의 대기업병을 치유하는 효과가 컴퍼니제 도입에 따른 위험 부담보다 훨씬 더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독립채산제의 장점은 명확한 책임소재와 그에  따른 빠른 실행이다. 이는 어떤 일을 내 일이라고 여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즉, 이 일은 내가 해야만 한다, 내가 책임을 지고 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직접적으로 받는다는 의식이 있을 때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게 된다. (301)' 조직이 너무 비대해지면 내부 조율에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참신한 아이디어나 성장 동력을 찾기는 어려워진다. 컴퍼니제는 이런 규모의 불경제와 복잡성의 폭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도요타의 처방이다.


도요타의 개혁은 컴퍼니제 말고도 TGNA(Toyota New Global Architecture)라고 불리는 일종의 레고블록식 차량 생산 설계로도 나타난다. 도요타는 폭스바겐의 MQB(Modularer Querbaukasten) 기본 개념을 일부 가져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런 레고블록형 설계 전략은 그만큼 혁신적이기 때문이다. 레고블록이 있으면 온갖 형태를 쉽게 만들어낼 수 있듯이 수십 가지의 부품군을 레고블록 쌓듯 조립하여 새로운 차를 만드는 것이다. 이런 레고블록형 설계 전략은 대폭적인 개발비·부품비를 낮추고, 특히 자동차 무게를 크게 줄이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책의 마지막 챕터 제목은 <개인을 탓하기 전에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라>이다. 뻔한 말로 동기부여만 외치지 말고 실제로 직원 개인이 동기를 가질 수 있는 조직 구조를 만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주도권을 스스로 갖고, 그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지는 직원을 늘리는 것이다. 신체제 개편을 통해 도요타는 7개의 컴퍼니로 헤쳐 모이게 됐고 각각의 컴퍼니 사장이 각 회사의 모든 업무를 스스로 추진할 수 있게 됐다. 이에 따라 업무를 스스로 주도할 수 있는 직원들이 훨씬 늘어났다.


"왜 다시 도요타인가"란 질문의 답은 결국 끊임없는 자기혁신으로 요약된다. 조직이 거대해질수록 업무 프로세스 속도의 지연과 비효율이 증가하고, 책임 회피를 우선으로 하는 일처리가 만연하게 된다. 조직원은 조직의 정체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내가 60만 명이 일하는 조직에 있다 보니 뼈저리게 느낀다 (ㅎㅎ). 어쨌든 책의 주장이 "기-승-전-컴퍼니제 짱짱"으로 읽힐 만큼 저자는 컴퍼니제의 예상되는 장점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더불어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되는 현대 자동차의 기업 구조 문제에 대해서 틈틈이 말한다. 컴퍼니제가 정말로 최고의 전략이라 10년 후 도요타 자동차가 더 좋은 실적을 누릴지는 두고 봐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책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예상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품질 향상에 힘쓴다고 외치고 실제론 건물 부지 매매에 10조 원을 쓰는 것으로 정체성을 보여주는 회사의 앞날이 그리 밝지 않다고 예상하는 건 너무 쉬운 일이다. 현대차의 내수 점유율은 계속 내려가는 중이다. 현대차도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을 텐데 어떻게 자기혁신을 할까. 궁금하다.


재밌게 읽었다. 도요타뿐만 아니라 여러 기업의 성공과 실패 사례가 흥미로웠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 심사가 진행되는 중이다. 노조가 없어도, 갤럭시 노트가 터져나가도 삼성전자는 여전히 아주 잘 나간다. 신기한 기업이다. 기술과 경제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나로선 오너의 비도덕 때문에 기업이 최대 이윤을 누리는 것인지, 오너의 비도덕이 없었을 때 기업이 더 큰 발전을 이루게 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다. 도요타만큼이나 신기한 삼성도 누가 객관적으로 분석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도요타는 지금의 젊은 직원들이 초창기 직원들의 마음가짐을 갖도록 만들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기는 할까?
초창기 도요타 직원들이 느꼈을 그 절박함을 지금의 직원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신체제에서는 7개의 컴퍼니마다 각각 실무를 책임지는 직원들이 필요하다. 이들은 사내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자동차업체에서 같은 일을 하는 이들과 경쟁해야 한다. 초창기 멤버들처럼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며 과정을 이끌어가야 하는 직원이 늘어나는 것이다.
도요타가 회사를 7개의 컴퍼니로 쪼갠 것은 도요타가 아주 작았을 때, 뭔가 결핍이 있었을 때 이를 채워나가기 위해 조직원들이 최선을 다해 일하던 그때의 분위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도 있다. 도요타가 시행하게 된 컴퍼니제, 즉 독립채산제의 장점은 명확한 책임소재와 그에 따른 빠른 실행이다. 이는 어떤 일을 내 일이라고 여겼을 때 인간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즉, 이 일은 내가 해야만 한다, 내가 책임을 지고 그 결과에 대한 보상을 직접적으로 받는다는 의식이 있을 때 인간은 스스로 움직이게 된다. 3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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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황정은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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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지나가는 짧은 순간 방관자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차 타고 영등포 시장 사거리를 지나갈 때 중년 여성이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휘청거리는 걸 봤다. 청바지엔 피가 굳은 것으로 보이는 얼룩이 있었다. 으레 그렇듯 그 동네에 많은 취한 여성일 거라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녹색 신호가 켜져서 차를 움직였다. 그 뒤로 그가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래도 일어나 걸었으니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만약 내가 차 안이 아니라 그의 곁이었다면 도와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가 다시 쓰러졌다면 그땐 지나가는 사람 누군가가 도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끔은 생각한다. 그때 119에 전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었느냐고. 찝찝한 기억이다. 다행인 건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가 잘못되었어도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이 내 윤리적 책임과 죄책감을 분산시켜줄 것이니까. 고백하자면 이 기억도 소설을 읽고서 오랜만에 떠올렸다. 무엇이든 합리화하며 살기는 참 쉽다고 생각한다.

 

어쩌라고요,라고 <양의 미래>의 화자는 생각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라진 소녀의 마지막 모습을 목격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납치가 의심되는 상황에서 그걸 방관한 비정한 목격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은 발화로 옮겨지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이 뚜렷하지 않은 억울함보다 딸을 잃은 아주머니의 슬픔이 크기 때문이다.

 

한편 <누가>의 화자는 '그게 내 탓인가'라고 생각한다. 정당하게 세를 내고 들어간 집이지만 자신 때문에 노인이 더 좋지 않은 곳으로 쫓겨났다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맞다. 화자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노인이 조금 더 가난했을 뿐이다.

 

조금 더 직접적인 죄책감에 시달리는 <웃는 남자>의 화자는 '내 잘못이 무엇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는 폭염에 쓰러지는 노인을 한 발 차이로 피하고 마침 오는 버스를 탄다. 어느 날 버스 사고 순간엔 무의식적으로 애인의 몸이 아닌 가방을 잡는다.

 

우리는 많은 순간 윤리와 비윤리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인다. 우리가 놓이지 않는다면 남들이 그 자리에 놓인 것을 본다. 그 순간 우리는 경계선에 선 나/너를 탓해야 하는가? "몸에 와 닿는 최악은 대부분 우리끼리, 에서 비롯(196)"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잘못인 것이다. 한편으론 "상류엔 맹금류"가 있으며 그거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86)"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 무엇이 옳을까? 이 소설의 입장은 후자에 가깝다. 자식의 죽음 같은 불행엔 이유가 없고, 상류의 똥물과 위층의 쿵쿵 찧는 소리는 피할 수 없다. "모두를 당혹스럽고 서글프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88)"다. 단지 그날의 태양이 너무 뜨거웠고 모두 각자의 이유로 지쳐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라진 소녀를 끝까지 잊지 못하고, 할 말이 많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한 채 살고, 어두운 방에서 홀로 생쌀을 씹는다. 스스로를 처벌하는 것에 가깝다. 이 자학으로 일련의 윤리가 완성된다. 적어도 소설 내적으로는 그들의 애매한 죄와 죄의식은 해결된다. 독자는 그들을 탓할 수 없다.

 

그러니까, 결국 소설가는 하류의 고통과 자학을 보여주며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식의 생각이 약간은 비겁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소설에서 문제없이 작동하는 윤리관을 소설 밖으로 꺼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맹금류는 상류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특히, 소설 읽으며 자신의 애매한 비윤리를 쉽게 넘겨버리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단, 이렇게는 생각한다. 세상엔 사는 사람이 있고 살아내는 사람이 있다고. 살아내는 일은 경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들 것이다. 이 이야기들은 살아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는 사는 사람이다. 사는 사람의 논리로만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그냥 하던 대로 했겠지. 말하자면 패턴 같은 것이겠지. 결정적일 때 한 발 비켜서는 인간은 그다음 순간에도 비켜서고...... 가방을 움켜쥐는 인간은 가방을 움켜쥔다. 그것 같은 게 아니었을까. 결정적으로 그, 라는 인간이 되는 것. 땋던 방식대로 땋기. 늘 하던 가락대로 땋는 것.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피륙이 있고 그것의 무늬는 대개 이런 꼴로 짜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직조해내는 패턴의 연속, 연속, 연속. 18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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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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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펠 메탈 밴드 예레미를 좋아하는데 그들 노래 중에서 <남겨진 나날들>을 가장 좋아한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인간 예수의 심정에 대한 노래다. 가사 일부분은 이렇다. "내가 움켜쥐고 갈구할 나의 단 한 번의 새벽아" "난 내가 삶에 배고프리라 미처 생각지 못했지"

어떤 종교라도 거대화되며 발생하는 비종교적 문제(비윤리적 행태, 자본화)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이것들에 더하여 한국화된 기독교의 문제는 조금 독특한 지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불신자인 나에겐 한국 기독교가 예수와 하늘 나라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비기독교인에게 그것을 강요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천국 불신지옥. 삶의 궤적과 상관없이 신성을 좇으면 천국에 간다는 이 단순한 배타성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일으킨다. 저자는 단순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예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예수는 어떤 종교도 창시하지 않았다." 기실 기독교의 탄생은 예수 사후의 일인데 그것이 그저 신의 아들 예수에 대한 인민의 존경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닐 것이다. 인간 예수가 보여준 헌신적인 삶에 대한 인민의 존경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옳을 것이다. 예수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란 메시지를 봤다면 뭐라고 생각했을까.

저자는 예수의 행적이 담긴 네 개의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쓰이고 종교적 첨가도 적은 마르코복음으로 예수의 삶을 되짚어본다. 이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전제하고 복음서를 읽"는 게 아니라 "한 평범한 시골 청년이 어떻게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우리는 예수를 어떻게 오해하고 있는가. 흔히 성서에선 예수가 반말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심지어 대제사장과 로마 총독에게까지 반말을 한다. 그러나 당시 예수가 사용했을 아람어엔 존댓말이나 반말이 없다. 이런 왜곡이야말로 "교회가 인간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 버렸"다는 증거다. 저자는 "인간 예수의 삶이 없다면 그리스도 예수도 기독교도 없다는 당연한 이치를 우리는 잊어선 안 된다(14)"고 말한다.

한편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갖다 대라'는 말은 흔히 생각하는 무조건적인 용서의 메시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른뺨을 맞았다는 건 오른 손등으로 뺨을 때렸다는 말이다.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는 하찮은 사람에게 하는 모욕이었다. 왼뺨도 갖다 대라는 말은 "나는 너와 다름 없는 존엄한 인간이다. 자, 다시 때려라"라는 조용한 외침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인간의 존엄이 짓밟힐 땐 단호한 저항과 불복종을 하라고 말했다.

저자는 "인류 역사를 통틀어 남성 현인이 여성 제자와 함께 활동한 경우는 예수가 거의 유일하다"고 말한다. 마리아 막달라는 남성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를 배신하지도 않았으며 예수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 심지어 성서 어디에도 그가 창녀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예수의 제자로서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막달라 마리아는 왜 창녀로 왜곡됐을까. 저자는 초기 기독교의 주인 노릇을 하려는 남성 제자들에게 막달라 마리아가 부담스러운 존재였으며, 기독교가 가부장적 종교로 커 가는 과정에서 여성 제자들은 자연스럽게 배제된 것이다. 저자는 신문 칼럼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수는 우리와 동세대의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상당수는 여전히 예수 당시 사람들의 시간에 머문다."

예수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아빠"를 부르며 벌벌 떨었다. 번민하고 제자들에게 역정을 냈다. 그러나 예수는 작은 인간으로서 공포와 번민을 그대로 느끼며 결국 그것을 이겨냈다. 신의 아들 예수가 아닌 인간 예수의 삶이 더 큰 감동을 준다.

꼭 예수가 신의 아들이어야 그를 믿고 섬길 당위성이 생길까? 예수 믿지 않으면 정말 지옥 갈까? 고등학교 때 읽은 밥퍼 목사 최일도의 에세이가 떠오른다. 최일도 목사는 집회 중 사람들이 방언을 열심히 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고 자신은 방언을 할 줄 모르므로 평범한 기도를 계속했더란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님이 그에게 왜 목사님은 방언을 안 하느냐고 물어오길래 다음날 헬라어 주기도문(ㅎㅎ)을 외워서 열심히 읊었더니 그 아주머님이 이건 성령이 임한 거라고 감동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최일도 목사는 여전히 방언을 할 줄 모른다. 다만 여전히 밥을 퍼주는 것으로 인간 예수의 삶을 현세에서 실천한다. 예수를 믿는 것보다 예수 삶을 좇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불신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연말은 춥다. 스스로 구세군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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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스운 사랑들 밀란 쿤데라 전집 2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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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했다.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적어도 밀란 쿤데라 소설 세계에서는 조금 다르다.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소설집은 쿤데라가 60년대에 쓴 7개 단편을 묶은 것이다. 밀란 쿤데라는 왠지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진지함으로 대표되는 듯한데 실은 그렇지 않다. 잘 뜯어서 읽어보면 진지한 표정을 한 채로 웃기는 게 그의 소설이다. 나는 초기작 <농담>부터 최근작 <무의미의 축제>까지 모두 해학이 그의 작품 기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초기 단편집을 보니 그의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아마도 연인이 "배신 없는 사랑과 순수성의 울타리(130)"속에만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인 것일지 모른다. 쿤데라는 이렇게 말한다. 돌아보면 "이거 전부 그저 농담(39)"인데 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느냐고.

 

읽다 보면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폭소를 여러 번 터뜨리게 되는데 그 웃음 뒤엔 뜨끔함이 남았던 것도 사실이다. 홍상수 영화의 찌질한 남자 주인공 보고 낄낄대지만 사실 그게 공감에서 비롯된 것처럼. 사랑이 모두 우스운 건 아니지만 분명 어떤 사랑은 우스웠던 것이 맞다. 말 못할 찌질한 이유로 헤어져놓고 이건 비극인 양 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그 여자애 보라고 미니홈피에 읽지도 못하는 일본어 가사를 붙여 넣은 적이 있었다. 으악... 이불을 차야겠다. 채연은 이제 그만 놀리자 흑흑. 그 시절엔 다들 우스운 사랑을 하는 우스운 사람이었다. 나만 그랬다고? 자살하러 간다...

 

원초적 웃음 사이로 날아드는 일침에 자유롭지 않았다. 이제 내게 필립 로스는 인생의 경전이고 밀란 쿤데라는 사랑의 경전과도 같다. 특히 "우리가 사랑의 쾌락에 달려드는 것은 추억 때문(293)"이라는 말을 보니 여전히 앞으로도 우습게 사랑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ㅎㅎ. 그러나 쿤데라가 말하는 사랑의 논리에 이대로 굴복하기는 왠지 억울하다. "사랑은 바로 비논리적인 거(155)"라는 쿤데라 할배의 말엔 애초에 '사람'이 비논리적이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느냐고 항변하고 싶기도 하다.

바로 그래서 에드바르트는 신에 대한 열망을 느끼는 것이니, 왜냐하면 오로지 신만이 어떻게 보여야 한다는 의무에서 벗어나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족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오로지 신만이 (유일하며, 존재하지 않는 그만이) 비본질적인 만큼 더욱이 더 존재하는 이 세계의 본질적인 안티테제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3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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