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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개를 베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평점 :
가끔 사는 게 온통 구질구질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좀 구질구질하면 어떤가. 남에게 떳떳하면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인격자는 못 되어도 남에게 피해 주지 않는 그런 삶 말이다. 정작 이렇게 말하는 난 그렇게 살지 못 했다. 힘들면 뺨 맞고 한강에 눈 흘기듯 애꿎은 사람들에게 분풀이했다. 보호자나 병동 간호사들에게 한바탕 짜증을 낸 하루의 마지막엔 침대에 누워 나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난 최하구나.'
김애란은 소설집 『비행운』에서 자신의 어려움을 남에게 전가하는, 진정 비루한 인간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 내 삶 한 쪽도 그 소설집에 끼워 넣으면 아주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무척이나 현실적이어서 찝찝한 책이었다. 반면 윤성희 소설집 『베개를 베다』는 『비행운』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의 윤리를 그려낸다. 비루한 삶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좋을 것이다. 단, 소설로 행복한 삶의 원형을 보여줄 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뻔한 서정시가 하품 나오듯이 따분해질 수 있고, 실재와 어긋나는 감각에 독자가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다. 착한 이야기를 재밌게 쓰기란(읽기란) 그래서 어렵다. 독자에겐 다행으로 이 책의 착한 이야기들은 뻔하지 않아서 곱씹어 봐야 그 선함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소설 속 선한 사람들의 윤리 감각은 독특하다. 「가볍게 하는 말」의 고모는 둘째 오빠의 칠순 잔치에서 오빠 셋이 이만하면 잘 살았노라고 서로 껴안고 우는 모습을 보고 말한다.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몰라, 오빠들은." 칠순 잔치에서 빠져나온 고모는 손자에게 몇 년 전 죽은 친구 이야기를 해준다. 친구의 하나 남은 아들이 넋을 놓고 우는데 자신이 이렇게 말해버렸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냐. 그래도 기운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리고 손자에게 말한다.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걸 그때는 이 할미가 몰랐단다. 그건 부끄러운 말이란다.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다." 고모는 우리 모두 그렇게 늙어버렸다며 화를 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의 누구도 고모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날씨 이야기」의 언니는 어머니 대신 동생들의 학비를 벌고, 동생들 대신 어머니 병간호를 하고, 적금을 부어 동생들의 결혼자금을 모은다. 한 번의 연애 이후 다신 연애를 하지 않고 홀로 늙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희생적인 삶이다. 분명 희생은 고귀하다. 그러나 만약, 소설가가 이를 아름다운 세밀화로 그리고, 독자는 그 이야기에 숭고한 감동을 느끼고 만다면 어떨까. 잘 생각하면 이건 아름답다기보단 몹시 수상한 풍경일 것이다. 한 인간의 희생을 타인의 시선으로 긍정해버리는 것은 그 희생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소설에서 구현되는 언니 삶의 윤리는 그런 낡은 것이 아니다. 언니의 윤리 감각은 이렇다. 잠깐 장 보러 간 사이 자기 집을 뒤지는 앞집 아이에게 "안 이르마. 그러니 가출은 하지마."라고 말하는 것. 왕따로 자살한 아들의 아버지가 방화를 한 현장에 가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대신 복수해주고 싶은 마음"을 느끼는 것. 새벽마다 "미워하지 않을 것도 미워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 몸서리치지만, 실제론 미워해야 할 것도 미워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 더욱이 이 모든 건 각박한 삶에서 이뤄졌기에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다. 소설 속 언니처럼 각박하게 살지도 못했으면서 나는 왜 미워하지 않을 것도 미워만 하며 살았느냐고 말이다.
이런 선한 사람들의 윤리는 물질적이고 희생적인 나눔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잊지 않고 함께 가는 것으로 이뤄진다. 「못생겼다고 말해줘」에서 '나'의 쌍둥이 언니는 죽었다. 그러나 나와 형부, 어머니와 형부는 서로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다. 형부는 내게 미국에서의 근황을 사진에 담아 이메일로 보내고, 어머니에게 언니의 편지를 다시 손으로 써서 보낸다. 이 담담한 관계의 유지는 죽은 언니를 잊으면서도 잊지 않는 그들 삶의 방식이다. 「팔 길이만큼의 세계」의 나는 이혼으로 삶의 실패를 맛봤고 아버지는 없다. 삼촌은 젊어서부터 칠순이 될 때까지 어머니와 자신을 챙긴다. 나는 삼촌에게 "이제 그만 어머니에게 같이 살자고 말해보세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단지 "우리 내년에도 봅시다."라고 말하고 만다.
삶의 한 부분을 잃어버린 이들의 공생을 공유 결합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전자가 아닌 자신의 팔 하나씩을 엮어서 서로의 삶을 더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관계 말이다. 이런 관계에 대해 생각하고 나면 첫 작품 「가볍게 하는 말」의 고모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가족들은 할아버지의 이름만 기억하고 할머니의 이름은 기억 못 한다. 그런 가부장적 세계에서 아들을 잃고 홀로 손자를 키우는 고모에게 손 한 번 내밀지 않은 저들끼리 치하하는 말은 얼마나 가볍게 흩날리는가. 자신을 내주기는커녕 타인의 삶에 대한 인식조차 없기에 남자 형제들의 결합은 아름답지 않고 그저 이기적으로만 보일 뿐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볍게 하는 말'을 남기며 살아갈까. 타인의 삶을 상상하지도 않고 말이다. 「낮잠」의 아버지는 친구를 괴롭힌 딸에게 시 낭송을 시킨다.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인간이 되려면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다. 딸의 생각대로 낯간지럽고 쪽팔리는 일이지만, 낯간지러움을 대놓고 언급했기 때문에 독자는 어색함 없이 배시시 웃을 수 있다. 맞다. 위로와 공감은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된다. 뭉근히 마음을 적시는 이야기들이었다. 여름에 차가운 이야기가 재밌듯 겨울의 이불 속에선 이런 이야기들이 좋다. 그러나 마냥 좋아할 수는 없다. 한편으론 나야말로 삶을 핑계로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모르는 인간으로 산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아니, 이제부터라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요즘의 나는 소설 읽은 후의 뭉근한 마음이 두렵다고 느낀다.
언니와 나는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먹었다. "지각하는 아이들을 보지 않으면 난 미쳤을 거야." 우유를 마시면서 언니가 말했다. 새벽마다 우두커니 홀로 앉아 미움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미워하지 않을 것도 미워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러니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해 아슬아슬하게 교문을 통과하는 아이들이라도 봐야해." 나는 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7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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