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아무 버스에나 올라 노선 종점까지 간다. 그런 날에 볼일은 없고 볼 일만 있고, 옮아갈 때마다 처음으로 대하는 그 어떤 장소, 그러나 왠지 이미 지나온 것만 같은 그 어떤 시간. 바로 그때 그곳에 내가 마주하는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향하는 길은 평평하다, 오르락 내리락하다, 너르다가, 좁다가. 그런 길을 어쩌다 같이 쓰게 된 사람들과 사람 아닌 것들 옆에서 나는, 내 눈에 입장하는 이 모두에게 소리 없이 이런 말을 들려준다.

내가 보는 모든 것이 나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트바가 한말. 그러니까 너희를 지금 죽게 하지 않겠다는 말.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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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이 계속되는 척할 반시간, 어둠 속에서 고요히, 하지만 둘이서 함께 물에 뜬 채로 누워 있을 반시간, 해가 뜨고 어둠이 걷히면서 이젠 떠나야 한다는 것을, 거의 두려움에 가까운 무언가를 느끼며 깨닫기 전까지의 반시간.

[사라진 것들] 중 단편 ‘사라진 것들‘, 326쪽 -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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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나는 안마당에 앉아서 책을 읽으며 저녁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예전부터 늘 읽으려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던 고전들을 하나하나 독파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마담 보바리>, <에피 브리스트> 같은 책들. 안마당은 사방이 사막식물들-샐비어와 유카와 선인장-로 둘러싸여 있었고 마당 한쪽 끝에 있는 높은 철제 울타리에는 부겐빌레아를 비롯해 꽃 피는 넝쿨식물들이 뒷골목까지 흘러내렸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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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어널 본인은 이른아침에 그림 작업을 했는데, 때로 새벽 네시에 일어나 일을 시작하기도 했다. 아직 밖이 어두울 때, 반쯤만 깨어난 상태로, 아직 꿈속에 발 하나를 담근 채로 일하는 게 좋다고 그는 말했다. 스튜디오 한쪽 끝에 있는 커다란 타원형 창문으로 해가 천천히 떠오르면 그는 잠에서 깨어, 그의 표현을 옮기자면, 산 자들의 세계로 들어오는 기분을 느꼈고, 해가 완전히 떠오를 무렵이면 작업을 서서히 정리하면서 마칠 준비를 했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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