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와 빈곤 - 산업 불황의 원인과, 빈부격차에 대한 탐구와 해결책 현대지성 클래식 26
헨리 조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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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태국 방콕에 간적이 있다. 방콕 시내의 화려한 쇼핑센터를 보며 순간 한국 도심지에서 만나게 되는 여느 대형 쇼핑센터와 견주어도 결코 손색 없는 그 휘황찬란함과 규모를 통해 태국의 발전상을 실감했다. 이후 우리 일행은 그동안 살면서 거의 해본적 없는 매우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방콕 외곽지역에 있는 소위 슬럼가로 불리는 빈민촌 방문이었다. 빈민촌하면 떠올려지는 그 생각하기 싫은 그림들이 있지만 사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기에 내심 호기심 또한 발동한 것이 사실이다. 가이드를 따라서 빈민촌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개인적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이라 말하며 살아가는 그곳의 참상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며 나도 모르게 양미간이 찡그려지고, 자연스럽게 손으로 코를 가리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온 마을 천지가 쓰레기로 뒤덮여 있기에 악취는 말할 것도 없고, 곳곳에 오물과 오수가 넘쳐나는 말 그대로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주거 공간이 게딱지 마냥 따닥따닥 붙어서 군락을 형성한 곳의 모습은 차마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 보다는 미안한 말이지만 개, 돼지와 같은 짐승들이나 있을만한 그런 축사와 같은 느낌 그 자체였다.

1시간 남짓의 시간이 24시간처럼 길게 느껴진 곤혹스러움을 뒤로 한채 그곳을 나오며 내 머릿 속에서 계속적으로 떠나지 않았던 의문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방콕 시내의 그 화려한 쇼핑센터와 고급 아파트들의 모습과 방금 내가 목격한 처참한 가난과 빈곤의 현장이 오버랩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극단적인 부와 빈곤의 차이는 무슨 이유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왜 어느 한편에는 자손대대에 걸쳐 평생토록 흥청망청 먹고 마셔도 결코 마르지 않고 샘솟는 화수분과 같은 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느 한편에는 하루 한끼도 먹지 못해 어린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고, 굶주린 엄마품에 안겨 더 이상 나오지 않는 말라비틀어진 젖을 빠는 굶주린 아기들의 그 힘겨운 숨소리가 일상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만해도 짜증나고, 화가나는 물음에 대한 기가막힌 정답을 제시하는 감동적인 경제고전 한권을 만나니 그 책은 바로 오늘 서평으로 소개하는 19세기 미국 재야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다. 1839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어느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헨리 조지가 그의 평생 심혈을 기울여 탄생시킨 본서는 그가 실제로 업무차 방문한 뉴욕 슬럼가 최악의 가난과 극심한 빈곤의 현장을 목격한 후 충격을 받아 집필을 결심하게 된 정치경제학분야의 고전이다. 본서에서 저자 헨리 조지는 극심한 가난과 부의 불균형의 원인을 찾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지성적 역량을 쏟아붇는다. 그러나 단지 부의 불균형과 가난과 빈곤의 원인만을 찾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경제학적 관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관념과 정의에 대한 바른 태도에 대해서까지 그의 깊은 혜안을 나누기에 독자는 본서 한권을 통해 지금 우리에게 닥친 경제적 난관과 더불어 사회 정의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까지 속 시원한 해답을 발견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정치경제학 교수 '알프레드 마샬'은 경제학을 공부하는 경제학도들에게 cool heads but warm hearts(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를 강조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경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차가운 이성으로 당면한 현안과 경제적 난제들을 풀어가되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형편을 생각하고 살펴야지만 한다는 촌철살인과 같은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본서를 읽어가며 나는 헨리 조지야 말로 마샬이 말한 바로 그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경제학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본서를 통해 이야기하는 핵심은 극심한 빈부의 격차는 바로 소수의 가진 자들에 의해서 독점되는 토지(땅)의 사유화라는 것이다. 그러나 헨리 조지의 시대와 그 이전 시대의 시대정신은 헨리 조지의 이러한 토지 사유화가 빈부 격차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도 그럴것이 어느 시대나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의 기득권을 순순히 내어주지 않기에 헨리 조지의 주장이 그들에게는 이름도 없는 무학의 경제학자가 주창한 사회주의 사상이나 유토피아적 공상에 불과한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책을 읽다보면 헨리 조지가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비판한 한가지 이론을 만나게 된다.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부를 움켜 쥔 사람들과 하루 벌어먹기도 힘든 극심한 빈곤과 끝이보이지 않는 가난의 쳇바퀴 속에서 절망의 눈물로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상존하는 부의 불균형의 이유를 인구 증가와 같은 자연현상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치부해버리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그것이다. 즉 인구가 많아지면 수요는 많아지고 그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서 많은 일자리가 필요해진다. 그러나 노동 인력이 넘쳐나면 한정된 자본을 통해 늘어난 노동에 대한 임금을 나눠가져야 하기에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근시안적 이론이다.

그렇기에 인구의 자연적 조절을 위해 전쟁, 기근, 가난, 전염병과 같은 자연적인 제약은 인구의 과도한 증가를 막아주는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그의 이런 단세포적 생각은 마치 인류의 개체수를 인위적으로 줄여야지만 지구를 쾌적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미명하에 사악한 테러집단이 전염병이나 대규모 공격으로 다수의 인간들을 청소한다는 어느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인구 증가라는 자연적인 재해(?)를 허락한 창조주의 무능력을 간접적으로 비꼬는 신성모독적 이론이 아닐 수 없다. 하기는 맬서스 본인이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태생부터 금수저였기에 아마도 차가운 머리를 가진 그의 학문적 관심은 애초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리라 본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한정된 자본에 의해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서 발생된 생산물에 의해서 나누어진다는 초딩들도 알아들을법한 지극히 상식 수준의 이야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런 유아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경제학자라고 명함을 내밀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또한 맬서스의 인구론이 가장 크게 간과한 부분은 바로 부의 불균형의 문제에서 근본적으로 작용하는 가장 큰 내재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본서의 역자 해제에서도 잠간 언급되고 있는 인간 개인의 탐욕의 문제이다. 헨리 조지는 극심한 사회 양극화 현상에 대해서 인간 탐욕의 문제를 정확하게 직시했다. 그렇다. 인간 본성의 타락에 기인한 탐욕스러움으로 남의 것을 더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리는 인간의 원초적 이기심과 죄악된 욕망이 어쩌면 인류의 고질적인 부의 불균형을 가져 온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이고 인간 본성의 깊은 곳에 심겨진 내재적 원인을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으랴? 그러나 헨리 조지는 그냥 주저 앉아 손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가진 지성과 이성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한 사회제도에 대해 과감하게 개혁의 메스를 가하고자 시도한 용기있는 실천적 도덕주의자였다.

땅을 선점한 지주들이 그 땅을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 노동자들에 대해 비싼 지대를 받아 챙기기에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턱없이 적은 임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 끝이 보이지 않는 빈곤의 악순환. 토지 이익을 통해 지주들은 계속적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가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빈곤이라는 나락으로 계속 내몰리는 이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탄생한 <진보와 빈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크다.

예전에 초등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그들의 답변은 대동소이했다. 남자 아이들은 대통령, 과학자, 장군, 의사 등등...여자 아이들은 선생님, 간호사, 연예인 등등...그러나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장래희망이 뭐냐고 물어보면 부동의 1위가 무엇인줄 아는가? 바로 건물 임대업자라는 것이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마냥 웃고만 있을 수 없는 이러한 신조어는 요즘의 천박한 세태를 여과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들이다. 부동산 불패신화,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부동산업은 결코 해가 지지 않는다는 이 웃픈 현실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이기에 가진 자들은 계속적인 부동산 투기를 통해 엄청난 금액의 시세차익을 거두어들이며 속칭 졸부의 반열에 오르는 반면 못배우고 가진 것 없는 사회 취약계층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가 벅찬 지긋지긋한 가난의 굴레 속에서 그 가난을 자식들에게까지 고스란히 물려주는 빈곤의 대물림 현상이 벌어진다.

헨리 조지가 살던 당시 토지를 소유한 자들이 요구하는 지대의 버거움은 노동자들을 계속되는 가난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등골빠지게 일해도 지주들에게 모든 것을 갖다 바치고 그들에게 돌아오는 임금은 그날 하루를 근근히 버틸 수 밖에 없는 푼돈 몇푼이었다. 이러한 불의한 제도로 인한 빈곤의 타파를 위해 헨리 조지는 토지의 공유화를 주장한다. 이미 오랜 시간 토지의 선점으로 인해 자신의 토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지주들(사회의 지도층과 상류층)의 땅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뺏어올 수도 없는 노릇일 뿐더러 설령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사회주의자들과 별반 다름없는 모습이기에 헨리 조지는 토지의 공유화에 대한 실제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것이 바로 토지 가치세이다. 즉 토지의 소유는 개별 지주에게 그대로 주되 땅을 통해 얻게되는 불로소득인 막대한 양의 지대 수입을 개인 지주가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토지 가치세라는 명목으로 일괄 거두어들여 세입 수입을 늘리고, 그것을 사회의 절대 빈곤층에게 사회복지 차원에서 재분배하자는 주장이다.

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자기 입밖에 모르는 극도의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사회 기득권층은 당연히 반대했지만 당시 아일랜드와 영국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도 했다는 것을 볼 때 그의 이론이 마냥 유토피아적 환상은 아님을 본다. 그러나 항상 사회 개혁적 주장들은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려는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에 의해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의 사상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오래 전 강원도 태백의 예수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예수원을 올라가면 길가의 큰 돌비석에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라는 글귀가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성경 레위기 25장 23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예수원의 설립자이신 故 대천덕 신부께서 생전에 항상 주장하셨던 그의 신앙과 삶의 철학이었다. 이것은 성경의 희년의 개념에서 파생되어진다. 50년에 한번씩 선포되어지는 희년을 통해 노예들이 자유를 얻고, 땅이 쉼을 얻는다는 희년의 정신은 땅이 일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적인 도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토지 공개념을 표방한다. 그렇다. 성경도 땅은 어느 누구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과 죄된 본성으로 인한 탐욕이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가지 못하도록 인류의 모든 제도를 불의로 물들여 놓았기에 우리는 서평의 서두에서 언급한 끔찍하고 비참한 빈곤의 현장을 목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리라.

630여페이지의 제법 묵직한 분량의 정치경제학 저작 한권이 10여일간 내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인간 지성이 어쩜 이렇게 따뜻할 수 있을까? 사회 불의와 부조리, 불균형에 대해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가난 속에 죽어가는 자들을 애써 외면한 채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받아 누리며 쳐먹는데에만 혈안이 되어있었던 이 탐욕과 야만의 시대에 헨리 조지와 같은 깨어있는 지성, 바른 양심과 굳센 용기를 가진 그야말로 마샬이 말한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경제학자의 보물과 같은 저작을 만나게 된 것은 근래들어 나의 독서 생활에 가장 큰 유익이다. 그의 주장과 이론, 사상은 사실 현실 정치와 경제에 쉽사리 접목되어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땅을 선점한 사람들과 그 땅을 통해서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사회 1%의 탐욕스러운 기득권층이 존재하는 한 헨리 조지의 사상과 이론은 그들에게는 한낱 힘없는 자들의 빈약한 투정으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나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의 반열에 들 수 없기에 헨리 조지 그를 가리켜 재야의 경제학자라고 한다. 그러나 부의 불균형, 그로인한 가난한 자들의 아픔과 작은 신음에 귀기울이며 평생 그 가난을 퇴치하기 위해 전 삶을 불태웠던 헨리 조지에게는 기득권의 눈치나 살피며 경제학자로서 입바른 말을 해야할 때 하지 못한 기생충같은 비겁한 고전 경제학자들의 반열에 들지 않고 오히려 용기있고 깨끗한 영원한 재야의 경제학자로 남는 편이 분명 더 명예스러운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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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봤니? 1 - 공룡이 인간이랑 함께 살았대! 다섯개의 물맷돌 시리즈 1
Grace 지음, 나병호 그림, 한국창조과학회 감수 / 물맷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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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궁금했던 점이 바로 공룡은 언제 살았는가? 에 관한 물음이다. 학교에 들어가서 수십만년 전이라는 공룡의 생존시기를 전해듣고,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성경을 읽으며 내가 믿는 개신교 신앙을 좀 더 깊이 생각하게 되는 시기가 오자 나에게 가장 큰 딜레마로 다가왔던 문제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 또한 바로 초딩시절의 의문이었던 공룡의 생존시기에 대한 문제였다. 성경은 분명 지구의 역사를 신구약 6천년의 역사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공룡은 무려 수십만년 전 지구상에 존재했다고 하니 어느 말이 맞는 지 이해하기 어려운 난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후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에 기반한 창조론을 신뢰하고 성경의 말씀을 나의 유일한 흔들리지 않는 삶의 기준으로 여기고 살아가며 진화론에 기반한 공룡 생존시기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거절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교회의 목회자들이나 아니면 다른 신자들로부터 본 질문에 대한 명확한 설명을 들은 적은 없다. 그러나 몇 해 전 우연히 인터넷에 공룡이 인간과 동 시대를 살았던 개체였다는 여러가지 증거를 기록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실제로 발견된 화석이나 인간과 공룡으로 추정되는 괴생명체가 함께 그려져 있는 고분과 동굴의 고대 벽화들을 통해서 공룡이 수십 수백만년 전 존재했던 생명체가 아니라 불과 몇천년전 인간과 함께 살았다는 증거들이다.

이러한 의문과 경험들을 기억한 채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책으로 꾸며진 본서를 만나게 된다. 나도 그랬고 아이들 대부분이 좋아하는 공룡 이야기는 만국 공통의 흥미거리이다.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공룡들의 그 복잡한 이름들을 마치 동네 친구 이름 외우듯이 줄줄 암기하는 신동과 같은 어린이들이 있는가 하면 공룡 덕후를 연상케 할 정도의 다양한 공룡 피규어를 사모으는 아이들도 있다. 지금까지의 공룡 생존 시기에 대해 진화론에 바탕을 둔 책들이 다수를 차지한 가운데 이번에 만나게 된 창조론을 바탕으로 한 공룡 생존 시기에 관한 책을 만나게 된 것은 한 사람의 신자로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책이 도착하고 반가운 마음에 아이들을 앉혀놓고 순식간에 읽어내려갔다. 깔끔하게 그려진 재미있는 일러스트레이션과 길지 않지만 핵심을 이야기해주는 글귀는 아이들의 눈과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먼저 화석이나 고대 벽화 등으로 발견된 인간과 공룡이 함께 살았다는 증거가 될 만한 역사적 사료들이 사진과 함께 제시되고, 옆의 확장 페이지를 넘기면 처음 설명한 그 공룡이 어떤 공룡이었는지 사실적인 공룡 그림, 설명과 함께 그 공룡이 살았던 세계의 장소, 공룡의 크기와 무게, 인간과 비교했을 때의 크기 등의 자세한 데이터를 제시함으로서 사료의 사실성을 뒷받침해준다. 그렇기에 본서는 단순한 동화책으로서의 기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성경에 기반한 창조론에 대한 진실성을 지원사격한다.

물론 무신론자들이나 개신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서는 큰 어필이 되지 않는 한낱 이야기책에 불과할 것이다. 애초에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성경 자체가 허구라고 여기기에 더 이상의 대화와 이해는 불가하다. 그러나 본서는 나와 같은 신자의 입장에서는 불신자들의 관점에서 성경이 말하고 증명하는 창조 이야기의 불충분성을 충분함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귀중한 도구로서 다가온다. 구약성경 욥기 40장, 41장에 등장하는 베헤못, 리워야단 등을 공룡의 또 다른 표현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또한 논란이 많기에 정확하게 그렇다라고 응답할 수 없지만 분명 역사와 과학의 실제 사료들이 증명하는 것은 공룡과 인간이 동시대를 살았다는 부인할 수 없는 정황이다.

본서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점 한가지는 공룡과 인간이 동시대 같은 공간 속에서 살면서 그들이 어떻게 공생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답이었다. 여러가지 동굴과 고분의 고대벽화를 통해 또는 사람과 공룡의 발자국이 한 장소에 나란히 찍혀 있는 발자국 화석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사실 한가지는 공룡과 인간이 때로는 먹고 먹히는 생사를 넘나들며 치열하게 싸웠던 서로에게 적대적인 경쟁의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함께 나란히 길을 걸어갔을 우호적인 대상이었다는 점이다.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나와 같이 어린 시절부터 있어왔던 오랜 고민에 대한 tip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책 한권으로 신나는 하루였다.

어린이날이면 TV의 단골 상영 메뉴였던 '아기공룡 둘리'로부터 최첨단 기술의 CG가 동원된 눈이 휘둥그래지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쥬라기 월드'까지 공룡은 이미 현대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아이템이다. 그렇기에 창조론을 믿든 그렇지 않든 열린 마음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본서는 새로운 사실에 대한 발견을 통해 충분한 재미와 유익을 선사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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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기분파 운전면허 학과시험 문제은행 (1종.2종 공통) - 2020년 개정된 문제를 수록한 최신판 + 시험장 가면서 보는 족집게 306선 수록 2020 기분파 시리즈
도로교통공단 지음 / 에듀웨이(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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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스무살 예비 성인들에게 있어서 제일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라는 답변이었다. 오래전 운전면허 시험을 보고 면허를 받을 때의 그 긴장감과 설레임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운전면허 시험장에 가서 학과시험을 등록하고 시험장 주변에 보따리 장수들이 노점에서 파는 학과시험문제집 한권을 사들고 집에 올 때의 그 기분이란...

당시에는 운전면허 학과시험문제집이 예전 수능시험 문제집처럼 달력 넘기듯이 위로 넘기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앞장의 예상문제를 푼 후 넘기고 뒷편으로 돌려서 또 다른 문제를 푸는 식으로 제본이 되어있었기에 수험생 입장에서는 사뭇 불편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림이나 사진보다는 대부분이 흑백 잉크로 인쇄된 글자 위주의 순수 이론 문제집이었기에 사실 면허시험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지 진짜 내가 이 책을 통해서 안전운전을 위한 유용한 지식을 습득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번에 우연한 기회로 만나보게 된 2019년 운전면허학과시험 최신판을 보게 된다. 내가 면허시험을 본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기에 학과문제집의 형식이나 스타일이 많이 달라진 점을 보게 된다. 우선 책의 제본도 일반적인 책과 같은 형식으로 제작되어서 수험생으로 하여금 문제를 푸는데 있어 훨씬 수월하게 만들어졌다. 본서의 가장 큰 특징은 내용면에 있어서 매우 다양하고 다채로운 예제들을 수록했다는 점이다.

우선 문장형, 사진형, 안전표지형, 일러스트형, 동영상형으로 문제의 유형을 세분화해서 실제 시험장에서 만나게 될 문제에 대해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 출판사의 세심한 기획의도를 엿보게 한다. 주목할만한 점은 마지막 동영상형의 문제들이 수록된 단원에서 두드러진다. 역시 내가 시험을 보던 시대와는 벌써 많은 시간의 간극이 느껴지는 내용 중 하나가 QR 코드를 스마트폰으로 스캔해서 교통 동영상을 보며 문제를 풀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는 정말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운전면허학과시험문제집의 놀랄만한 진화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단원은 평가모의고사문제가 수록되어 있기에 수험생 독자는 모든 예제를 풀이해보고 마지막 실전감각을 익힐 수 있다. 더불어 모의고사를 통해 자신의 실력을 중간점검해 볼 수 있기에 안성맞춤이다. 운전면허 시험이 많이 어려워졌다는 이야기도 들리지만 본서에 수록된 기출문제를 꼼꼼히 풀어보는 노력만 기울인다면 학과시험 통과는 그리 어려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학과시험을 통과하고, 코스 기능시험을 치루고, 마지막으로 도로주행까지 치루었던 그 시험의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다. 운전면허시험을 보고, 면허가 손에 쥐어졌을 때의 그 감격은 누구에게나 동일할 것이다. 누구는 한번에 붙었다느니 누구는 철전팔기로 붙었다느니 하는 차이를 가지고서 웃음꽃을 피우지만 결국 도로에 나가서 귀중한 생명을 보호하며 교통법규를 지키고 운전자의 바른 태도로 운전을 해야하는 막중한 책임이 운전면허증의 깊은 의미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운전면허시험 준비는 사실 제법 진지한 마음가짐과 자세로서 임해야 할 시험 중의 하나이다.

운전면허학과시험을 준비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첫걸음인 본서 <기분파 운전면허 학과시험문제은행>을 통해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도록 하자! 그러면 언젠가 자기 손에 주어진 운전면허증을 받아들고 기뻐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나아가서 안전운전 베스트 드라이버로 거듭날 날도 머지 않아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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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로마서 주석 세계기독교고전 41
마르틴 루터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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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개봉하여 300만명이라는 적지 않은 관객을 동원했고, 한국 교회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던 '다빈치 코드' 라는 영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숨겨진 비밀에 대해 밝히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들간의 쫓고 쫓기는 긴장감을 잘 묘사한 영화였는데 내용 중 '오푸스 데이'라는 카톨릭 단체에서 파견된 사제가 윗옷을 벗고, 채찍과 같은 고문도구로 자신의 몸을 치며 혹사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인간의 솟아나는 정욕과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서 엄격한 규율에 바탕을 둔 고행을 통해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는 모습을 보며 인간 영혼이 진정한 쉼과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저렇게까지 하는 것이 옳은가 생각한 적이 있다.

 

오늘 소개하는 책의 저자인 '마르틴 루터' 는 16세기 중세 어두운 터널과 같은 시대를 살다간 인물로서 우리에게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익히 알듯이 루터는 젊은 시절 세찬 폭풍우 속에서 자신이 서 있는 주변의 큰 나무를 두 동강 내버리는 벼락을 목격한 후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과 내면은 여전히 구원에 대한 확실함이 없는 공허함과 두려움의 상태 그대로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만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은 그의 어두운 영혼에 한줄기 환한 빛으로 다가온다.

 

서두에서 묘사한 영화 속 사제와 같이 자신의 고행을 통한 스스로의 노력과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몸부림을 치지만 그러한 노력은 모두 다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의로만이 가능한 것이며 그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드러나고 의로우신 한 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바로 마르틴 루터의 영혼을 사로 잡았다.

 

본서는 바로 이와 같이 루터가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은 신약성경 로마서의 말씀을 주석한 주석서이다.로마서는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 불리는 책으로서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의 정수가 가득한 말 그대로 진리의 보고 그 자체이다. 사도 바울의 서신 중 가장 중요하다고 꼽히는 로마서는 문체가 유려하고 의미 전달에 있어서 매우 학구적이라고 평가되어지는 서신서이다. 이러한 로마서를 탁월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주석해서 출간한 책이니 본서의 가치는 이루말할 수 없이 크다. 얼마 전 서평한 책 중에 <존 웨슬리의 일기>가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이며 순회 전도자로서 한평생을 바친 존 웨슬리 목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을 읽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런데 웨슬리의 회심 또한 앨더스게이트 거리의 어느 모임에서 누군가에 의해서 읽혀지고 있던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은 본서가 가진 그 가치를 한층 더 빛내준다.

 

우선 본서는 로마서가 16장으로 되어있기에 내용의 구성면에 있어서도 동일한 진행 순서를 따른다. 각 장의 구절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자신의 신학적 견해와 더불어 성경 구절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주석한다. 로마서를 읽어 본 그리스도인 독자라면 로마서가 말하는 핵심 주제를 알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신칭의' 즉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라는 가장 중요한 명제이다. 로마서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와 율법도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하는 능력이 없음을 말하며 오직 인간구원의 근거는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루터를 회심하게 만든 1장 17절의 말씀을 루터는 어떻게 주석했을까 매우 궁금했고, 본문을 통해 그 부분을 접하고서 루터의 탁월함에 고개를 끄덕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한 고심함의 흔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루터는 분명 회심하기 전 영화 속 사제와 같이 자신의 영혼 구원을 위해 스스로 고행을 하며 인간의 의를 의지했던 사람이었다. 즉 의로운 행함만이 인간 영혼 구원의 근거라고 여겼던 자신의 어리석은 견해를 뒤로하고 진리에 눈 뜬 이후 그는 아마 인간의 노력과 행함에 대해 터부시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했다는 사실을 볼 때 행함에 대한 그의 견해는 별로 우호적이지 못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루터는 자신을 회심으로 이끈 1장 17절의 주석을 통해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단초를 남긴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라는 말은 신자의 믿음이 점점 더 자라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이가 자신의 삶 속에서 점점 더 의로워진다는 계속된 성화를 의미한다. 루터는 바로 이점을 간과하지 않았다.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인간의 노력과 행함을 통한 자기의의 추구에 대한 진저리쳐지는 경험 속에서 루터는 신자의 삶은 믿음을 통해 의로움을 얻지만 믿음을 통해 구원받고 의로워진 진정한 신자의 삶과 그 믿음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착한 행실을 통해서 증명되어져야 한다는 균형잡힌 성화의 개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즉 신자의 믿음과 행함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야 하는 개념이 아니라 함께 간다는 의미이다. 이 부분에서 루터의 비범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인간의 율법과 노력, 선한 행실, 극도의 금욕과 자기절제, 청빈한 삶, 구제와 자선 등 인간이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최상의 열심이 인간 영혼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로마서의 저자 사도 바울은 말한다. 공교롭게도 로마서의 저자인 회심 전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고,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며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엄청난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러한 그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대반전의 서신을 작성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컬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로마서의 주석을 동일한 경험을 했던 마르틴 루터가 기록했다는 사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복음의 정수가 담긴 로마서를 펼친 후 본서를 함께 놓고 읽어 내려간다면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메시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싹트는 경험을 하게 되리라 본다.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 차분히 성경과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펼쳐들고 그 안에 담긴 진리의 만찬을 경험해보는 것은 초여름 더위를 맞이하여 일종의 깊은 영적 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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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의 자유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 2
조나단 에드워즈 지음, 김찬영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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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인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는가? 교회를 다니다보면 자유의지라는 용어를 심심찮게 듣게 된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에 우리는 로보트와 같이 명령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본서는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요, 철학자이며 목회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매우 철학적이고 난해한 저서이지만 <신앙감정론>,<원죄론>과 더불어 3대 주저로 뽑히는 가장 돋보이는 저작이다. 본서는 인간의 의지가 가지는 자유에 대한 거대한 지적 담론이다. 에드워즈가 살았던 당시 18세기 미국 뉴잉글랜드는 유럽 대륙으로부터 유입된 알미니안주의의 거센 사상적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보다는 인간의 책임과 선택에 대해 더 큰 비중과 관심을 기울이는 알미니안주의가 이야기하는 인간 의지의 자유에 대한 부패한 교리에 대해 맞서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영광, 그분의 거룩함이 훼손될 수 밖에 없는 사상적 위기 속에서 에드워즈는 그의 평생에 걸친 지성적 훈련의 총체를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거룩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마지막 한방울까지 아끼지 않고 쏟아부어 탄생시키게 되는 데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본서 <의지의 자유>이다.

본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주제와 관련된 용어들의 정의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펼쳐지는 내용들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들을 숙지하도록 돕는다. 가령 의지의 본성, 결정, 필연성, 불가능성, 불능, 우연성 등과 같은 용어들을 설명하고 있는데 보통 우리가 사전적으로 알게 되는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철학적 바탕 안에서 설명되어지고 있기에 독자들의 집중력과 이해력이 요구되어지는 대목이다. 2부에서는 그럼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의지의 자유가 가능한가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고, 3부에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의지의 자유가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필수적인지에 대한 고찰이며 마지막 4부에서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던지는 여러가지 사상적 추론의 근거에 대한 고찰을 담는다.

본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자주 등장하는 용어 몇가지를 알아보면 이렇다. 의지는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기능, 능력, 마음의 원리를 말한다. 자유는 의지의 결정대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는 힘을 말한다. 의지작용행위는 선택행위, 선택과 동일한 의미로서 마음의 기울어짐이나 경향으로서 중립은 없다. 즉 마음이 보기에 가장 강력한 동기가 의지를 결정한다.

 

알미니안주의는 의지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있어서 의지는 중립성을 가지며 필연성을 배제하고, 우연성을 강조한다. 즉 인간이 어떠한 의지적인 행위들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그 의지의 행위는 어떠한 위부의 원인에 영향받지 않은 채로 행해진다는 것이며 완전한 우연과 자기결정에 의지의 자유가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알미니안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자신을 칼빈주의라고 불러도 자신은 괘념치 않는다 라고 말했듯이 칼빈주의는 의지의 자유에 대해 인간의 의지가 기우는 경향성으로 설명하고, 필연성을 강조한다. 즉 인간은 어떠한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자신이 필연적으로 좋아하는 행위 또는 자신의 마음이 기우는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성을 보인다는 점이며 이것이 바로 의지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또한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도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으로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지의 중립성을 주셨기에 인간 의지의 작용을 미리 아실 수 없으시고 그렇기에 우연성에 기인하여 선택하시고 작용하신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 행위에 대해 확실히 예지하고 계시며 우연성이 아닌 도덕적 필연성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선택하시고 이끌어가심을 말한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온전한 거룩함과 탁월한 지혜, 우주적 주권을 가지신 상태로 확실한 예지에 바탕하여 필연적으로 가장 좋은 것으로 선택하시고 작용하신다는 것이다.

내용의 방대함과 매우 철학적이며 사변적인 내용들이 많아서 나 또한 책을 읽는 내내 길을 잃어버린채 출입구를 찾아 다시 뒤로 돌아간 적이 수차례 있었다. 이후 '헨델과 그레텔' 동화에 나오는 빵부스러기를 길에 떨어뜨려서 이정표 삼으려고 했던 그 심정 그대로 옆에 그냥 노트 한권을 두고 책을 읽으며 난해한 용어들과 문장들을 적어놓고 본문 내용들과 대조해가며 깊은 지성의 바다 속에 빠져 죽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간을 보냈다. 결코 쉽게 읽혀지지 않는 책이지만 책이 가지는 가치는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함을 느낀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이 말하는 인간 의지의 자유가 중립성과 우연성을 갖는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창세기의 인간 원죄 교리를 양보해야하는 엄청난 신학적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를 따 먹게 된 의지는 중립성을 가지기에 선악과를 따먹은 이 도덕적 행위는 선택이 아니라 우연이 벌어진 일임으로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는 원죄의 책임이 없다라는 의미가 된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에게 원죄의 근원, 죄악을 만들고 인간이 타락하도록 방임하신 분이라는 오명을 덧씌우게 되는 신성모독적 결론으로 귀결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그분의 우주적 주권과 탁월한 지혜를 가지시고, 도덕적 필연성에 기반하여 가장 아름답고 선한 선택과 결과를 도출하신다는 에드워즈의 견해와는 달리 하나님은 우연적이고 즉흥적인 선택을 하시는 분이라는 알미니안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교리가 공격받게 될 것이며 나아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일방적 은혜보다는 인간의 협력과 인간의 책임이 공존함을 주장하는 알미니안주의의 그 부패한 교리에 대한 허용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인간 의지의 자유를 인정한 것인가? 에드워즈가 말하는 의지의 자유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유를 말한다. 온 우주적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그 광대하고 독보적인 주권 속에서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갖고 누린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지금 영국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프리미어리거 축구 선수 손흥민이 10살짜리 초등학교 축구 선수와 일대일 한판 대결을 펼친다고 가정할 때 초등 축구 선수는 자기 의지대로 자유롭게 볼을 드리블하고 손흥민 선수를 제친 후 골문으로 돌진해서 슛을 쏠 수 있는 자유와 의지가 있다. 그러나 결국 전체적인 축구 경기의 틀 안에서 볼 때 그 경기의 결과는 10살짜리 초등 축구 선수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프리미어리거 손흥민 선수에 의해서 컨트롤 되어짐을 의심할 수 없다. 인간에게 주어진 의지의 자유 또한 이렇다. 하나님의 우주적 계획과 주권 속에서 인간은 의지의 자유를 누린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과 의욕에 대해서 이미 예지하고 계시며 당신의 무한한 지혜와 섭리, 경륜 속에서 이 모든 것을 경영해 가신다.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성이 어쩌면 우리에게 더 큰 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유한성과 불완전함에 의해 드라이브되는 의지의 자유를 누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신적 권위 안에서 누리는 의지의 자유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합리적이고 안정적이며 안전한 자유이기에 그렇다.

에드워즈는 두번의 대각성 운동을 경험했으며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라는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인본주의적 사상의 거센 물결 속에서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을 수호해야만 할 매우 중요한 시대적 사명을 자각했다. 인간의 원죄를 부인한 펠라기우스주의, 알미니안주의 등의 신학적 오류와 부패한 교리에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서 자신의 전 삶의 지성적 노력을 쏟아부은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세권의 책 중 한권인 <의지의 자유>는 이렇게 탄생했다. 하나님이 주신 차갑고 날카로운 이성과 예리한 지성 그러나 하나님과 자신에게 맡겨진 성도들을 뜨겁게 사랑하였던 목회자의 따뜻한 심성은 그의 신학과 철학적 주장이 피상적인 하나의 지식의 체계를 자랑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편적인 증거이다. 수 많은 사역일정 속에서도 하루 13시간을 공부하는 철저한 지성적 노력과 치열한 준비가 없었다면 아마 당대에 몰아닥쳤던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사조를 거슬러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읽으면서 죽을 것만 같았고, 솔직히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었던 생각이 들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예전에 읽었던 <신앙감정론>은 본서에 비해 이해도 쉬웠고, 술술 읽혔던 기억이 있는 데 사실 본서는 그에 비하면 몇배는 어려운 책이다. 워낙 에드워즈가 신학이나 철학적 사고에 능통했던 비범한 인물이었고, 지금까지도 신학자들은 물론 일반 철학계에서도 에드워즈의 논의를 관심갖고 연구한다고 하니 뭐 다른 할말이 더 필요하겠냐만서도 그렇기에 나와 같은 범인의 사고와 이해력으로는 사실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책 중 한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발견하게 되는 사실 한가지는 지금의 조국 교회와의 연결선상에서 에드워즈의 논제들을 관련짓지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70~80년대 양적으로 큰 부흥을 경험했던 한국 개신교가 어느 순간 주춤하며 양적으로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질적으로도 목회자들의 부패와 타락, 교회의 세속화와 혼합주의의 만연 등으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요즘 우리는 18세기 뉴잉글랜드의 사상적 혼탁함을 경험하며 그에 맞서 싸운 에드워즈의 저작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그것은 비본질이 본질을 뒤집는 상황 속에서 어렵고 이해할 수 없지만 본질을 붙잡고 회복하는 것만이 한국 교회가 살수 있는 길이며 신자들의 삶이 진리의 터전 위에 서도록 돕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진리를 진리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전 삶을 불태우며 하나님과 시대 앞에서 몸이 바스러지는 지성적 헌신을 다했던 위대한 영적 거인 조나단 에드워즈의 걸출한 수작 <의지의 자유>를 이 시대 바른 신자의 삶을 살기위해 깨어 몸부림치는 용기있는 신자들에게 일독을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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