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트위스트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9
찰스 디킨스 지음, 유수아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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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시절 'TV 세계명작동화' 라는 만화영화를 즐겨보곤 했다. 그런데 유독 보고 싶지 않았던 몇편의 명작동화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소공녀, 올리버 트위스트 등이다. 소공녀와 올리버 트위스트에 등장하는 주인공 어린이들의 비참한 삶과 어두운 시대적 배경이 너무나 암울했기에 어린 마음에 적잖이 감정이입이 되어서 얼마 못보고 채널을 돌렸던 기억이 있다. 이러한 어린 시절 불편한 기억들의 편린이 나로 하여금 내용은 대충들어서 알고 있는 소공녀와 올리버 트위스트를 책을 통해 온전히 접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번에 기회가 되어 그동안 나에게 암울한 고아 소년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올리버 트위스트>를 만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캐럴>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의 1838년 작품인 <올리버 트위스트>는 당시 19세기 영국 산업화 시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들을 설정하고 배치하여 내용의 사실성과 흥미를 가미시키는데에 성공했다. 저자는 산업화 시대의 그 암울하고 어두운 도시 밑바닥 아수라장 같은 삶의 터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통해 불평등한 계층간의 괴리와 산업화의 구조적 모순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소년을 중심으로 찰스 디킨스 그만의 독특한 해학과 풍자를 곁들여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회적 기능을 마다하지 않는다. 특별히 저자는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신 구빈법이 가진 모순과 폐해를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고 비판했으며 그것은 본서의 중심적 플롯으로서 그의 원고지에 그대로 투영되어 독자들에게 가감없이 전해졌다.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어린 소년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고아가 된다. 그리고 고아농장이라는 곳에서 인간이하의 짐승같은 대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고, 이후 구빈원이라는 당시 사회 빈민층들을 수용하여 돌보는 사회구호기관으로 옮겨져 그곳에서 하루 세끼 묽은 귀리죽을 먹으며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아가야 하는 비참한 생활을 이어간다. 이후 어느 장의사의 도제로 가게 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런던 도시의 밑바닥 범죄자들과 어울려지게 되면서 그의 삶은 하루아침에 더 비참한 나락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도 몇번은 더 끊었을 이 극심한 가난과 범죄의 구렁텅이 속에서 해맑은 영혼의 소유자인 올리버는 자신의 삶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올리버의 착한 심성과 삶을 향한 애절한 간구는 마침내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일단의 선한 사람들의 노력으로 인생 역전의 삶으로 돌아서게 되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책의 전반부에 올리버 트위스트의 어머니는 올리버를 낳고 그 자리에서 죽는다. 저자는 올리버의 출생 배경을 묘사하는 이 대목에서 알몸으로 태어난 아기 올리버가 담요 강보에 싸여있을 때는 귀족의 아기인지 아니면 극빈자의 아기인지 그의 신분을 알 수 없었지만 이제 담요 강보로부터 벗어나 헤지고 낡은 누런 무명옷을 입게 됨으로서 올리버의 신분이 결정되었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여지는 옷이라는 사물은 찰스 디킨스가 살았던 19세기 영국 산업화 시대에서나 아니면 최첨단 현대 문명의 화려한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이나 동일한 신분 구별의 기준이 된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휘황찬란한 아파트와 억소리나는 자동차, 도대체 0이 몇개가 붙었는지 셀 수 없을 정도의 든든한 은행잔고와 고액의 연봉, 남부럽지 않은 학벌의 졸업장과 학위, 빼어난 외모 등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올리버의 낡은 무명옷은 이러한 현대적 기준의 대척점에 있는 매개체이다.

또한 나는 책장을 넘기며 찰스 디킨스가 가진 그 반전적 해학과 풍자의 능력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올리버를 마치 농장의 가축 보듯 경멸하며 대우한 교구관(당시 지역 하급 관리) '범블' 씨는 극빈자들을 관리하는 구빈원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올리버를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을 인간 이하로 여겼던 사회 기득권층에 붙어 기생한 기생충 같은 인물이다. 극빈자들의 고혈을 짜서 승승장구하던 범블씨는 책의 중후반부 드디어 말단 교구관에서 구빈원장이라는 직위로 승진을 하여 사회적 성공의 가도에 오른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다시 한번 책의 서두 올리버의 탄생 배경 시 사용했던 옷이라는 메타포를 훌륭하게 사용한다.

"인생에서 어떤 승진은 실제로 얻는 이득 외에도 승진에 따른 외투와 조끼에서 특별한 가치와 위엄을 얻는 경우가 있는데...(중략) 주교에게서 비단 앞자락을, 말단 교구관에게 삼각모자와 레이스를 벗겨버린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한낱 인간이 남을 뿐이다. 때때로 위엄과 거룩함조차도 사람들의 상상 이상으로 외투와 조끼에 달려 있다."

이렇듯 범블씨의 사회적 지위는 그의 삼각모자와 레이스를 통해서 드러났고 유지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신분의 상징인 옷을 벗겨버린다면 인간에게 남는 것은 오로지 벌거벗은 인간 그 자체만이 남을 뿐이라고 말함으로서 당시 사회 신분 계층의 불평등과 모순 투성이였던 영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이렇게 독자는 올리버가 입었던 낡은 무명옷과 범블씨가 입었던 삼각모자와 레이스를 극명하게 대조하며 옷이라는 상징과 은유를 사용하여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여과없이 공격했던 찰스 디킨스의 문학적 천재성의 일부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600여페이지의 결코 짧지 않은 장편 소설의 스토리 전개가 어찌나 흥미롭던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어내려갔다. 그러면서 서평 서두에서 밝힌 나의 어린 시절 TV 세계명작동화를 통해서 본 올리버 트위스트의 그 암울하고 어두웠던 기억의 망상이 점차 사그러져감을 느낀다. 어린 시절 솜털 같이 부드러웠던 여린 심성이 받은 생채기와 네거티브한 인상은 성인이 되고 나서 이미 현실의 얼룩이 묻을대로 묻어서 바라보게 되어지는 현실 세계에 대한 관점으로 인해 이미 어느 정도 묻혀져버린 퇴적의 과정 속에 잊혀진 것은 아닐까? 나에게 있어 세상과 현실의 때가 묻은 것은 유쾌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의 어린 시절 바라보았던 올리버 트위스트에 대한 암울하기만 했던 견해는 이번 독서의 시간을 통해 좀 더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책의 주제를 발견해내고 찾아가는 희열을 맛보게 된 것으로 인해 상쇄되어지는 것만 같다. TV를 통해서 이야기의 결말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었기에 전반부 올리브의 비참하고 불쌍한 시기만을 접했던 당시의 기억과는 달리 본서를 통해 책의 결말을 나의 두 눈으로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던 것 또한 내가 본서를 바라보는 느낌과 인상에 깊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였으리라.

한 고아 소년의 인생역전 로또의 드라마로 그칠 수 있을 법한 스토리를 가지고 19세기 영국 산업화시대 사회 계층간의 불평등과 부의 불균형 그로인한 사회적 부조리와 모순의 문제 덩어리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풍자하여 시대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저자가 가진 비범한 문학적 탁월성은 경이롭기만 하다. 그리고 이것은 본서가 당시 영국 사회 뿐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까지 왜 찰스 디킨스인가? 왜 올리버 트위스트인가? 라는 아낌없는 찬사를 받는 고전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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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엠 바운즈 기도전집 - 『기도의 능력』 포함 8권의 기도서 완역 합본
E. M. 바운즈 지음, 김원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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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에 관한 주옥같은 책들이 지금 시대처럼 쏟아져 나온 적이 드물다. 기독교 서점에 가면 기도에 관한 신앙서적들이 매대에 차고 넘친다. 사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가에 기도에 관한 한권의 책을 더 얹는다고 특별히 더 티가 날만한 일도 아니지만 오늘 리뷰를 남기게 되는 본서는 여느 기도에 관한 탁월한 경건서적들 가운데서도 유독 돋보이는 명성을 지닌 기도에 관한 최고의 고전 중 한권인데 바로 기도의 사람 '이 엠 바운즈'가 쓴 '이 엠 바운즈 기도전집'이다.

19세기 초중반 미국 미주리주에서 출생한 이 엠 바운즈는 평생 매일 아침 4시에 기상하여 아침 시간을 기도로 깨운 그야말로 기도의 사람이다. 나는 이 엠 바운즈의 대표적 저서 가운데 한권인 <기도의 능력>을 올 봄에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은 그의 대표작인 <기도의 능력>을 포함한 8권의 저작을 한권으로 합본한 이 엠 바운즈가 기록한 기도에 관한 총서라고 보아도 무방한 기도에 관한 위대한 고전이다. 기도의 능력과 더불어 목적, 기도하는 성도들, 기도의 가능성, 진실된 기도와 기도의 본질적 요소, 필요성, 기도의 무기까지 한평생을 골방에서 기도로 씨름하며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였던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 삶으로 써내려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도에 대한 정수가 담긴 저작의 무게감은 대단하다. 분량에 있어서만도 840여페이지가 넘는 어마무시함을 자랑한다.

그러나 독자가 발견하게 되는 더욱 놀라운 사실은 책이 가진 내용의 깊이감이다. 각권의 책들이 결코 얕은 신학적 지식을 짜깁기하듯 허투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점은 매권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에 관한 실제적 교훈과 깊은 감동이 선사하는 영향력이 너무 크다는 사실로 증명된다. 저자가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의 말씀을 그대로 삶으로 살아낸 몇 안되는 사람 중 한명이라는 사실은 이 책의 권위를 더욱 더 공고하게 만들어 주며 그렇기에 책을 집어든 독자들은 책과 저자에 대한 신뢰를 갖고 한권의 책을 완독할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모든 내용들이 보석같은 교훈으로 반짝이지만 특별히 내 눈을 멈추게 만든 내용이 있다. 기도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이 시대가 기도하는 시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위대한 활동과 운동의 시대이기는 하지만 보이는 것과 물질적인 것에 너무 치중하고 보이지 않는 것과 영적인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시대라는 것이다. 저자 바운즈가 살다갔던 19세기의 시대 상황이 눈에 보여지는 물질적 현상에 치중했던 시대였다면 최첨단 우주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지금의 시대는 무어라 더 할말이 있겠는가? 원초적이고 감각적인 자극으로 사람들의 눈과 귀와 감성을 사로잡는 이 물질 만능의 시대 조류 속에서 기도는 정말 가장 원시적이고 미신적인 그 무엇으로 치부되기 쉽상이다. 그렇기에 대다수 현대의 신자들은 교회를 다니지만 결코 깊은 기도의 생활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화려한 볼거리와 레져, 스포츠, 오락이 판을 치는 이 첨단 문명의 세대 속에서도 오직 기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최첨단 과학기술로 무장한 그 어떤 것도 아닌 오직 힘없고 초라한 모습의 노인이 골방에서 구부러진 허리와 머리를 조아린 채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기도의 제사를 올리는 것, 오직 그것 뿐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인 항상 쉬지말고 기도하는 것에 대한 성경적 진의를 바운즈의 목소를 통해 직접들을 수 있음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매우 귀한 깨달음이다. 항상 기도하라고 이야기하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일상을 모두 포기하고 매일 골방에만 틀어박혀서 기도에만 전념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운즈가 설명해주고 있는 이 항상 기도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의식적으로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바른 신자는 일상의 의무들을 성실하게 감당하지만 언제나 우리의 마음이 일상의 업무로부터 돌아서게 될 때는 새가 둥지를 찾아가듯이 하나님의 품으로 날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 속에서 항상 기도하는 신자의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 신자는 기도라는 거룩하고 경건한 영적 습관이 몸에 배어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기도의 사람 느헤미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황폐한 시온을 보며 슬퍼하는 지도자가 없는 이 세대와 교회에 대한 통렬한 슬픔을 토로한다. "종교의 부패와 부흥 세력의 쇠퇴 그리고 무서운 교회의 세속화 경향에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소위 낙천주의가 너무나 팽배하여 지도자들은 시온의 성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병들어 가는 것을 보는 눈이 없으며 그로 인해 슬퍼하고 애통하는 가슴이 없다." 지금의 한국 교회를 향한 말씀과 같아서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켠이 아리었다. 나 또한 한국 교회 한명의 신자이기에 교회 세속화의 책임에 대해 결코 빠져나갈 수 없는 무겁고, 무서운 책임을 통감한다. 본서를 통해 교회의 세속화와 아픔에 대해 슬퍼하며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 써야 할 기도하는 지도자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슬퍼하는 바운즈의 애통함이 전해져 온다. 영혼에 대한 관심도 없고, 참된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른체 오직 교회 성장에만 열을 올리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의 성도들, 기도하는 지도자들의 존재가 절실함을 느끼게 된 본문이다.

각권이 100여페이지 정도의 분량이기에 분책해서 보면 그렇게 많은 분량이 아니다. 그러나 왜 이 책은 가방에 가지고 다니기도 부담스러운 무게와 두께를 지닌 기도전집 한권으로 출간이 되었을까 생각했던 그 이유를 쉽사리 발견하게 된다. 저자가 말하는 기도에 관한 주옥같은 진리들이 각권을 통해서도 개별적인 주제 속에서 탁월함을 드러내지만 각권이 합해져서 테마와 테마가 서로 연결되고 보완되어 하나의 큰 틀 속에서 저자가 말하는 하나의 핵심이 빛을 발한다. 이 한권의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는 바로 기도는 '열쇠'라는 것이다. 인류 구속의 역사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 역사 속에서 보여지고 이루어진 하나님의 위대한 과업은 바로 기도라는 열쇠를 통해서 실행되었고, 완성되었다. 즉 기도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거나 완성되지 않았을 모든 일들이 기도라는 열쇠를 돌림으로서 하늘 보좌를 움직일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통해 기도의 위대한 비밀을 깨달은 저자 바운즈는 이 기도의 비밀이 가진 강력한 힘을 모든 시대의 신자들이 받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한글자 한글자 본서의 백지를 채워간 것이다.

2019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나는 얼마나 기도에 매진했는가? 얼마나 기도의 골방을 청소했는가? 새해가 되면 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새해 계획 속에 '기도' 라는 그럴듯한 과제를 목표로 써넣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한두번하고 포기되어지는 그런 이벤트성의 과제가 아니다. 위에서도 이이기했듯이 눈에 보여지는 화려한 볼거리와 먹거리, 놀거리 등 결코 심심할래야 심심할 수 없는 첨단 문명의 재미있고 감각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세상이 보기에 한없이 미련한 십자가의 도에 반해 이 세대의 탁월한 철학들과 나이스한 사상으로 무장한 시대조류 속에 살아가는 현대의 신자들에게 있어 기도는 너무나 부끄럽고 초라하게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책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중요한 사실 한가지는 그러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시대사조 속에서도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신자의 의무이며 특권이라는 불변의 사실이다. 기도가 유치한가? 기도가 미신적으로 느껴지는가? 기도하는 것이 창피한가? 그렇다면 이 책을 집어들고 읽으라! 식어져버린 기도의 가슴에 뜨겁게 불을 붙힐 기도의 불꽃이 매 챕터마다 활활타오르고 있음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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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사색노트 - 날마다 새로운 하루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최종옥 옮김 / 책이있는마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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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톨스토이 고백록>을 통해서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자전적 이야기를 접한 기억을 안고 집어든 책이 바로 오늘 리뷰를 남기는 <톨스토이 사색노트>이다. 일반적인 단행본과는 달리 본서가 가지는 두드러진 특징은 독자 참여형 도서라는 점이다. 책을 펼쳤을 때 한면은 톨스토이가 발췌한 세계 역사 속에서 크고 작은 발자취를 남긴 인류 지성들의 촌철살인과 같은 짧막한 경구와 금언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반대 페이지에는 독자가 이렇게 귀한 삶의 교훈과 지혜를 묵상하고 사색하면서 오늘 하루 발견한 자신의 모습과 내일을 위한 오늘의 키워드를 직접 손글씨로 적을 수 있도록 공간을 비워놓았다. 오늘 하루 톨스토이의 손을 빌려 재탄생된 지적 유산들이 내 삶에 끼친 영향은 무엇이며 이 우주라는 거대한 공간 속에서 나는 누구이고 매일의 삶의 각축장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내 주변의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와 같은 보편적이지만 지극히 개인적일 수 있는 삶의 고뇌와 그에 대한 해답을 연필을 쥐고 써 내려갈 때 비로소 독자는 머릿속을 휘감았던 실타래와 같았던 삶의 난제가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버리기 아까운 보석같은 삶의 지혜가 담긴 조언들을 전부 소개하고 싶지만 지면상 불가능하기에 리뷰를 통해서 개인적으로 가장 깊은 인상으로 각인된 몇개의 경구를 나열해본다. "쓸데없이 잡다한 지식으로 머릿 속을 어지럽히지 말라"라는 테마 속 제시된 교훈은 로마 네로 황제의 스승이었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가 말한 것이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거나 쓸데없이 잡다한 지식으로 머릿속을 어지럽히지 말라. 진실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그 무엇을 얻고 싶다면 좋은 책을 가려 읽어야 한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마구잡이식 독서는 오히려 두뇌를 망가뜨릴 뿐이다." 세네카가 말한 조언을 통해 내 자신의 독서 습관을 돌아본다. 하루에도 수십수백권씩 신간이 쏟아져 나오는 이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로서 모든 책들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때로는 지적 허영으로까지 여겨질 잡식 스타일의 독서 습관은 분명 욕심에 기인한 것임을 고대 로마 철학자의 입을 통해 발견한다.

또 한가지 마음을 울리는 격언은 이와 같다. "가장 중요한 때는 현재이다. 현재에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인간은 현재 그대가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이다. (중략) 가장 중요한 일은 그 사람들과 사랑하며 화합하는 일이다." 아마 많은 이들은 현재의 어려움보다는 내일의 소망을 바라며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현재의 갈등과 아픔에 대해서 일부러라도 회피하고 싶고, 마주하고 싶지 않은 굳어진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는 한다. 책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현재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과거는 말할 것도 없고, 다가올 미래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을 살아가는 현재이다. 현재의 내가 중요한 것이며 현재 내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내 주변의 이웃들이 중요한 사람들이라는 점은 우리 영혼이 가진 현재성의 실체를 직면하도록 이끈다.

마지막으로 나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가는 격언은 영국의 사상가 '러스킨'의 말이었다.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이다. 그런 사람에게 말대답을 하면 그 말은 곧 그대에게 되돌아온다.비난을 비난으로 갚는 것은 타오르는 불 속에 장작을 넣는 것과 같다. 자기를 비난하는 자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낼 줄 아는 사람은 이미 상대방을 이긴 것이다." 정말 멋진 말임을 실감하며 나의 무릎을 친다! 세상을 살다보면 정말 어떤 사람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종류의 사람에게 러스킨은 침묵이 가장 효과적인 대처법임을 처방해준다. 그렇다. "침묵은 금이다!" 라는 너무나 많이 들어서 익숙한 다소 상투적인 격언이 결코 상투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침묵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일들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기에 그렇다.

또한 자기를 비난하는 자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냄으로서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은 놀랍기만 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일견 유사한 의미를 가지는 격언이 아닐 수 없다. 나를 비난하는 자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 줄 수 있을까? 그러한 행동을 하려면 그만큼 한 인격의 깊은 성숙함이 전제된다. 즉 자신의 원수에게 온화한 미소를 던져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의 인격 속에 참된 인간으로서의 숙성된 인격과 고결한 인품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미소를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으로 벌써 그 사람은 순수한 인성의 승리자이다.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19년의 마지막 달, 한해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나는 본서에서 톨스토이의 손을 빌어 설파된 인류 지성들의 위대한 격언들에 걸맞는 삶을 살았는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본서를 통해서 여전히 미운 사람은 밉고, 보기 싫은 사람은 피하고만 싶은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인 나의 연약한 내면의 속살을 마주하게 된다. 그까짓 것 한번 웃어줄 수도 있었을텐데, 먼저 따뜻한 눈빛 한번 건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본서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먼저 낮아짐을 선택하지 못하고, 나 자신의 의로움과 잘났음을 자랑하는 말라비틀어진 자존심을 2019년에 남겨둔 채 새해를 맞이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책의 끝장에 남겨진 미국 유니테리언파 목사인 '채닝'의 경구를 남겨본다.

"행복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배워야 할 것은 겸허이다. 교만, 권력, 허영이 가득하다면 그 자리를 친절과 겸허로 대신해야 한다. 교만한 인간은 아무런 유익도 취하지 못한다. 그는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함으로써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자기 자신이 쓸모없게 여겨진다. 여기에 현명한 사람이 되는 첫 번째 과정이 있다. 현명해지려면 겸손하라. 그것은 사람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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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용서받을 자격과 용서할 권리에 대하여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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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개봉한 영화 중에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신앙의 힘으로 용서하기로 결정하고, 교도소를 찾아간 주인공 신애(전도연 분)는 교도소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자신의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며 평안한 표정을 짓는 살인자의 고백을 듣고 혼란스러움에 빠져 혼절한다. 피해자의 엄마로서 자신이 먼저 살인자를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살인자는 피해자의 용서 여부와는 상관없이 본인은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기에 죄를 사함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지 않은 살인자를 용서한 신(神)을 향해 복수하는 인간의 삶을 살겠다며 무섭게 절규하고, 그녀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져만 간다. 영화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어보이는 살인자에 대해 용서할 권리를 신(神)에게 빼앗겨 버린 한 인간의 무너져가는 삶의 궤적을 차분하게 따라가며 절제된 영상의 힘을 보여줌으로서 국내외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용서받을 자격은 무엇이고, 용서할 권리는 또 누구에게 있는가? 에 관한 딜레마적 질문을 책 한권 전체를 통해 던지는 저작 한권을 만난다. 마치 서두에서 언급한 영화 <밀양>의 확장판과 같은 느낌의 책. 제 2차 세계대전 유럽 곳곳에서 자행된 나치 독일의 600만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믿기지않는 야만의 현장 속에서 살아남은 저자 '시몬 비젠탈'은 종전 후 '유대역사기록센터'를 통해 무려 1100여명에 달하는 나치 전범들을 색출하고 추격하여 법의 심판대 앞에 세운 인물이다. 자신의 아내를 제외한 일가친척 89명이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비극적 가정사의 아픔을 간직한 채 그는 본서를 통해 자신이 렘베르크 집단 수용소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들을 담담한 필치로 기록한다.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나치 군인들에게는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기력이 있으면 강제 노동을 위해 짐승과 같이 부려먹었고, 병들거나 기력이 다하면 가차없이 사형터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저자 비젠탈 또한 이러한 비극적 운명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며 자신의 죽을 날을 기다리는 그러한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수용소 바깥 외부 작업장으로 작업지원을 나가는 근무조에 뽑히게 된 비젠탈과 그의 동료들이 도착한 곳은 군 야전병원으로 개조한 예전 비젠탈이 다니던 모교였다. 그곳에서 어느 간호사에게 호출된 비젠탈은 그녀를 따라 건물 내 격리되어 있는 마치 임종실과 같은 분위기의 방으로 안내받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반 송장이 되어 죽어가는 한 사람과 잊을 수 없는 조우를 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나치 중에서도 악명 높은 히틀러 친위대인 SS의 대원이었던 카를이라는 군인이다.

우크라이나 중부 도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SS대원들은 대부분이 노인과 여자, 아이들로 구성된 200여명 정도 되는 한무리의 유대인들을 집 한채에 몰아넣고, 집안 가득 석유통을 배치한 후 그안으로 수류탄을 던졌다. 삽시간에 집은 불바다로 변했고, 아비규환의 현장 속 건물의 2층에서 어느 젊은 부부는 두려움에 떠는 아이의 눈을 감기고 1층으로 몸을 던진다. 불길을 피해 창문 밖으로 뛰쳐 나오는 유대인들을 향해 SS대원들은 미리 설치한 기관총을 무자비하게 난사하여 사살하고야 만다. 인간이 인두겁을 쓰고 같은 인간에게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이 잔혹한 광기의 현장 속에 SS대원 카를 또한 참여하고 있었다. 이후 카를은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중상을 입고 지금의 병원으로 후송되어 이제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속에서 이제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인지하고, 유대인 한명에게 자신이 SS대원으로서 유대인들에게 저지른 악마적 만행을 고백하고 참회하며 용서를 구하려는 마지막 힘겨운 몸짓을 시도한다.

비젠탈의 손을 움켜 쥔 SS대원 카를은 자신이 무자비하게 죽인 유대인들을 대신해 비젠탈에게 용서를 구하며 죽어가는 자신을 용서해달라는 마지막 간청을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들은 비젠탈은 아무 말 없이 무거운 침묵만을 남겨둔 채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책의 1부 말미에 저자 비젠탈은 독자들에게 결코 쉽사리 결론 내릴 수 없는 매우 진중한 물음을 던진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것인가?"

이어지는 책의 2부는 심포지엄으로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세계 각국의 석학들이 보내 온 비젠탈이 경험한 이 용서의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대답으로 구성되어있다. 죽어가는 SS대원의 용서와 참회에 대해 용서했어야 했다는 반응과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죄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이런 극명한 반응이 예상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흑백을 가리듯 손쉽게 결정할 수 있는 성격의 주제, 질문이 아니기에 독자는 책의 원저 제목인 1부 해바라기를 읽고 나서 한참을 생각해야만 하는 윤리적 사고와 철학적 사유의 작업 속에 빠져들 수 밖에 없다. 2부 심포지엄을 통해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지성인들의 저마다의 의견은 다양하다. 그러나 저자 시몬 비젠탈은 바로 지금 이 책을 집어들어 읽고 있는 독자로서 우리의 생각과 대답을 요구한다.

마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가 퍼부어대는 질문 속에 출입구를 알 수 없는 알쏭달쏭 미로와 같은 사고 체계의 혼선을 경험한다. 자! 당신 같으면 SS대원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비젠탈은 자신의 일가친척 모두가 나치에 의해 끌려가서 희생을 당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으며 자신 또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하루살이의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모든 불행의 원흉은 바로 자신의 눈 앞에서 죽어가고 있는 나치 독일인들이다. 그런데 자신과 자신의 가족, 민족을 대학살의 지옥 속으로 밀어넣은 이 짐승, 괴물같은 인간 SS대원은 용서의 손을 내민다. 자신의 죄악을 용서해달라고...

종교적 특히 기독교적 가르침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인간들을 용서하시고, 심지어는 그 죄악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렇기에 기독교적 가르침을 고수하는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정답은 이미 정해진 것인가? 나 또한 한명의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기에 나는 본서를 읽어내려가는 1주일 이상의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한없는 용서이며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 그러나 나의 이성이 동의하지 않기에 내 신앙의 진실성 여부까지 의심될 정도로 혼란스러움을 경험한다.

이러한 어지러움 상념 속에서 어서 너의 의견을 피력하라고 말하는 저자 시몬 비젠탈의 종용하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러면서 나는 책의 곳곳에 숨겨져 있는 용서에 관한 바른 관점의 퍼즐 조각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할 권리가 비젠탈에게 있느냐의 문제이다. SS대원 카를은 자신의 죄책감을 덜고 조금이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집단을 대표하는 불특정 유대인 한명을 불러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 유대인 집단의 대표로 뽑힌(?)비젠탈은 그의 죄악상을 전해듣고 600만 유대인, 아니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기관총을 맞거나 불에 타죽은 200여명의 유대인들을 대표해서 카를을 용서해야하는 처지에 놓인것이다. 그러나 비젠탈에게는 그를 용서할 권리가 없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에게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용서를 구하는 가해자를 직접 용서해주는 것이다. 비젠탈은 그의 죄악에 대해 유감을 표시할 수는 있을지언정 죽임 당한 피해자들을 대신해서 가해자인 카를을 용서할 어떠한 권리도 없으며 오히려 그가 카를를 용서했더라면 그것은 죽임당한 수 많은 동족에 대한 배신이며 교만하고 오만스런 행동이었을 것이다.

서평의 서두에서 꺼낸 영화 <밀양>을 통해서도 우리는 아들을 잃은 피해자 신애가 아직 용서하지 않은 그 살인자에 대한 용서의 기회와 권리를 신(神)에게 빼앗긴 채 절규하는 모습을 본다. 그렇다. 진정한 용서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참회를 할 때 성립된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이미 죽어 없고, 가해자 또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2부 심포지엄의 대다수 지성인들은 침묵으로 일관한 비젠탈의 결정을 지지한다.

초창기 미국의 인디언 대학살, 나치 독일의 600만 유대인 홀로코스트, 세르비아-보스니아 인종청소, 중국의 티벳 대학살, 태평양 전쟁 일본군의 관동 대학살, 난징 대학살, 버마 대학살, 필리핀 대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르완다 종족 분쟁. 중세 이전 사건들을 제외하고서도 근대 이후에만 해도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전 세계 도처에서 자행되었다. 한국은 어떠한가? 수많은 일제의 잔인한 만행들과 6.25 전쟁, 제주 4.3, 광주 5.18까지...

10여년 전 몇개월 간 제주도에서 지낸 적이 있다. 제주도민들에게도 깡촌이라 불리는 작은 시골 바닷가 마을 근처에 머무르던 당시 허름한 동네 구멍가게가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이 고즈넉함의 장소 속 구멍가게에는 어린 시절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팔던 각종 불량식품이 가득했다. 추억과 감성 소환을 위해 자주 찾았던 이 구멍가게의 주인은 연세가 지긋한 꼬부랑 할머니셨는데 낯선 젊은이들인 우리 일행을 볼 때마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육지것' 들이라는 볼멘소리를 연거푸 내밷으신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그러나 후에 우리가 머물렀던 그 지역이 제주 4.3 사건이 벌어진 비극의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먹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눈 앞에서 부모가 어린자식이 친척이 친구가 육지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잔혹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지긋한 연세의 어르신들에게 있어 육지에서 온 사람들에 대한 그 지울 수 없는 증오와 고통스러운 기억이 우리를 부르는 육지것들이라는 호칭 속에 묻어나왔기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 그러나 죄인이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서 죄인은 자신이 해를 끼친 사람들에게 평생을 납작 엎드려 사죄하는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용서받을 자격을 갖추는 첫번째의 길이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 언급한 수 많은 홀로코스트와 전쟁범죄를 저지른 국가와 국민들이 아픔을 준 상대 국가와 민족들에 대해서 진심어린 용서와 참회의 태도를 보이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다. 여전히 자신들의 만행을 감추기에만 급급하고,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도리어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인면수심의 모습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 책은 용서의 자격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리고 용서할 권리 또한 아무에게나 부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한다.

책을 덮을 때 즈음 저자 시몬 비젠탈은 내게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라고 되묻는다. 적어도 내게 용서의 행위 자체는 아름답다. 그러나 모든 용서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말하고 싶다. 가해자의 진심어린 참회는 직접적으로 자신이 고통을 안긴 피해자의 마음과 영혼을 향해야 한다. 피해자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평생을 참회하는 수도자의 모습으로 납작 엎드리는 삶을 살아라! 그렇지 않다면 그가 구하는 용서, 그가 받은 용서는 모두 거짓이며 결코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개신교 신자로서 영혼의 떨림을 맛보게 하는 책 한권으로 1주일여의 시간동안 책장을 넘기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순간을 보냈다.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분명 생명을 내건 한없는 용서를 말씀하셨건만 아직 나의 신앙과 경건의 깊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할 수 있는 넉넉함이 없음을 확인하며 쓸쓸히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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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지성 클래식 28
플라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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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의 이미지가 있다. "악법도 법이다"(물론 본서에는 나오지 않음), 세계 3대 악처로 유명한 그의 아내 '크산티페', '너 자신을 알라' 라는 말이 소크라테스의 격언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학창 시절 도덕, 윤리 시간 고대 서양철학 단원에서 항상 등장했던 단골 철학자라는 그 이름의 익숙함.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은 아마 소크라테스의 이름은 너무나 많이 들어봤지만 사실 그가 어떠한 사람이고, 그가 가진 사상과 철학적 사유에 대한 내용을 아는 일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문외한일 것이다. 이번에 인문고전을 꾸준히 출판해주고 있는 출판사 현대지성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지만 동시에 생소한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이 담긴 4편의 글을 한권으로 엮은 신간을 선보였고, 나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소크라테스라는 위대한 거인의 발자취를 되새겨보기 위해서 본서를 집어든다.

본서의 특징은 4편의 각기 독립적인 이야기들을 한권으로 묶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본서의 저자는 소크라테스가 아닌 그의 수제자였던 플라톤이며 본서를 이루는 4편의 단편은 그의 저작인 <대화편>에 수록된 이야기들이다. 역사적으로 소크라테스 본인이 남긴 저작이 없지만 그의 철학적 사상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의해서 전해진다. 본서에 수록된 첫번째 책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당시 아테네 사회가 믿는 신이 아닌 이방 잡신들을 믿는다는 이유와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궤변을 가르쳐서 그들을 타락시킨다는 불경죄로 고발된 후 법정에서 자신 스스로를 변론하는 이야기이다. <변명>을 펼쳐 든 독자는 법정에서 자신을 스스로 변호하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발한자인 '멜레토스'와 설전을 벌이는 장면을 목격한다. 멜레토스는 소크라테스를 고발하기 위해서 말도 안되는 억지주장을 펼치며 소크라테스의 죄상을 토로한다. 그의 말 자체가 궤변과 억측인 상태에서 어떻게든 소크라테스를 유죄로 엮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멜레토스라는 인물 자체가 가지는 그 없어보임이 가련하기까지 하다.

소크라테스의 철학하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어떠한 철학적 논지를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형태였다. 그렇게함으로서 질문을 들은 상대방이 그 논지를 철학적으로 깊이 사유함으로서 맞든 틀리든 간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도록 요구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전개해나갔다. 이러한 그의 철학함의 방법은 아테네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왔고, 그들 또한 소크라테스와 같이 아테네에서 소위 기득권을 선점하고 있던 지성들에게 이러한 도발을 감행한다. 젊은이들의 이러한 쉽지 않은 철학적 논거를 질문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무지가 들통나는 오욕을 감당하면서 자신들의 명예는 물론 사회적 질서가 어지럽혀진다는 판단하에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그 범죄의 원흉으로서 소크라테스를 지명하고 급기야는 누명을 씌워 사형에 처하게 된 것이다.

두번째 책인 <크리톤>은 사형 선고를 받고 옥에 갇혀 죽을 날을 기다리는 소크라테스를 찾아온 그의 죽마고우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에게 탈옥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과 탈옥을 할 수 없는 정당한 이유를 설파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이루어진 책이다. 크리톤은 자신의 친구 소크라테스가 억울하게 죽임 당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며 친구인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구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자신이 당할 비난과 잘못된 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하게 되는 것은 소크라테스를 음해한 자들을 도와주는 결정이라는 사실 그리고 아직도 아버지의 가르침과 양육을 받고 자라야 할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의무를 저버리는 행동임을 주지시키며 탈옥을 강하게 권유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성과 논증을 통해 자신이 왜 탈옥할 수 없는지 그리고 급기야는 잘못된 판결이지만 순순히 사형을 당해야하는 당위성에 대해 조목조목 타당한 이유를 들어 반론한다.

세번째 책인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사형집행 당일 그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이 모여 '영혼불멸'과 '이데아'에 관한 기나긴 철학적 사유를 질문과 대화의 형식으로 논증하고 설파하는 시간을 갖는 내용으로 구성된 책이다. 세상에는 참되고 궁극적인 소멸하지 않는 실체가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이데아(형상, 원형)이다. 예를들어 현실 세계에서 아름다운 꽃이 있는데 그 꽃이 시들어버렸을 때 아름다움은 사멸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꽃이 가진 아름다움이라는 이데아(원형)는 남아서 다만 그 시들어져버린 꽃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영혼불멸과 연결시켰고, 영혼 또한 사멸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그것이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인지하고 인식하게 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영혼은 이미 선하고 아름답다라는 지식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그것은 영혼이 육체와 결합되기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함으로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며 알게 된 선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인간의 육체가 쇠하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인간의 영혼 또한 육체와 함께 소멸해버리는 것이 아닌 불멸함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네번째 책 <향연>에서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모여 연예의 신 '에로스'를 예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추종자들은 각자 돌아가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모양의 에로스 신을 이야기하고, 찬미하며 높이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에로스 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들이 가진 공통점은 그들 모두 에로스 신을 연예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기에 육체의 아름다움이라는 1차원적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지닌 관점이자 예찬이었다. 추종자들의 편협한 에로스 예찬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관능적이고 싱싱한 육체를 향한 욕망으로 표현되는 에로스의 단계를 벗어나서 인간의 아름다운 일과 미덕을 갈망하고 찬양하는 그리고 마침내는 아름다움의 원형인 이데아를 직관하고 관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 진정한 에로스를 아는 것임을 말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의 추종자들이 에로스를 연예의 대상으로만 한정하여 바라본 것과는 달리 에로스를 연예의 주체로서 바라본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철학함은 이성과 논증을 통해 이데아를 직관할 수 있는 지식과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크라라테스 당시 우주와 현실 세계에 대해 상대적인 지식을 규명하고 진리를 주관적으로 해석하며 설파했던 지혜자들인 소피스트들에 반해 절대적 진리인 이데아의 존재를 인정하고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규명하려 했던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분명 상반된다.

자신보다 탁월한 사람을 결코 가만두지 않는 세상이 내뿜는 시기심의 뜨거운 열기를 <변명>을 통해 체감한다. 모함과 음해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독배를 받아마셔야 하는 불의함 속에서도 정의와 진리를 지켜내기 위해 어떠한 상황에도 결코 불의를 행해서는 안된다는 철칙하에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의 정의로운 모습은 <크리톤>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진다. 본인이 겪는 고초가 심하든 가볍든 상관없다. 불의를 당했다고 똑같이 불의를 통해서 되갚아주는 불의를 행해서도 안된다. 이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명예롭고 정의롭게 사는 길이며 그는 자신의 철학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기꺼이 독배를 받아마신다.

책을 덮으며 갖은 상념이 머릿속을 맴돌며 울어댄다. 정의보다 불의가 팽배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아는 것이 앎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본서를 집어들고 나의 무지를 깨닫고 인간 세상의 무지를 발견한다. 나를 포함한 수 많은 사람들과 이 세상은 무지하기에 오늘도 정의를 실천할 수 없고, 불의를 행한다. 무지하기에 자신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약자들의 눈물과 아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무지한 자들의 불의가 오늘도 뉴스의 한면을 장식한다.

살기 위해서 불의를 정의라고 왜곡한 사람들과 죽기 위해서 불의를 정의로 받아들인 소크라테스. 정의는 사라지고 불의가 정의로 둔갑한 세상이 정상으로 여겨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작금의 현실 속에서 2400여년의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뛰어넘어 바른 정의의 관점을 새롭게 정렬한 위대한 인류 지성의 목소리가 메아리쳐온다.

"나는 죽기 위해 떠나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 떠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는 오직 신(神)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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