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공부 수학문해력 하나로 끝난다 - 초등학교 4학년, 수포자가 되는 이유
김은정 지음 / 굿인포메이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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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없는 세상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수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어려움을 겪는 수많은 학생들의 바람 아닐까? 수학은 많은 학생에게 애증의 과목이다. 좋은 대학을 가려면 포기할 수 없는 학문이 수학이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어렵다.

수학의 어려움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다. 자연수에 대한 기본적인 연산을 배울 때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며 복잡한 공식과 서술형 문제가 등장하면서 학생이 체감하는 수학의 난이도가 예사롭지 않다.

슬슬 '수포'에 대한 고민이 머리를 드는 시점이 대부분 초등학교 4학년 수학부터다. 아무리 해도 안되는 수학 앞에서 좌절하는 아이들을 보며 애처롭다. 잘하고 싶고, 좋은 점수를 받고 싶은데 도무지 안된다.

<초등공부 수학문해력 하나로 끝난다 / 김은정 / 굿인포메이션>는 현직 초등 교사로 20년 째 초등 수학을 가르치며 본인이 느끼고 경험한 수학 공부의 맹점과 해결책을 알게 쉽게 설명해 주는 책이다.



저자는 왜 우리 아이들이 중학교도 아닌 초등학교 때 벌써 수포자가 되려고 하는 지에 대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짚어준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4학년부터 등장하는 큰 수와 나눗셈의 등장, 문제를 읽고 이해하는 능력의 현저한 저하다. 학원을 다니며 많은 문제를 빨리 풀어보는 데에 익숙한 학생들은 그저 주어진 문제를 기계식으로 빨리 정확히 풀어내는 데에 익숙하다.

왜 그런 답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과정을 되짚는 사유의 작업이 삭제되었다. 왜냐하면 그냥 문제를 맞춰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그만이라는 결과론적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그렇다.

저자는 파트 1에서 수학이 어려운 이유를 진단하며 곧이어 수학을 잘하기 위한 방법을 공개한다.

중등 수학 교사 자격을 가진 20년차 초등 교사가 밝히는 초등 수학 공부를 잘하는 방법은 다름 아닌 독서다. 이게 웬 말인가? 수학 공부를 잘 하는 이유가 국어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독서란다!

저자는 본서의 상당 부분에서 초등 수학의 가장 기본은 문제를 이해하는 문해력에 있음을 강조한다. 아이들이 수학을 어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문제가 요구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특히 학년이 올라가면서 등장하는 서술형 문제는 아이들에게 큰 좌절을 선물(?) 한다.

문장으로 기술되는 서술형 수학 문제는 문제 자체가 요구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손도 못 댄다. 문제를 이해해야 계산을 시작할 것 아닌가? 그런데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쩌라는 말인가?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로 대변되는 영상 세대에게 활자 독해는 녹록지가 않다. 저자는 수학의 다양한 공식과 연산 법을 익히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하며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학 공부법은 독서를 통한 문해력 개발임을 강조한다. 초등학교 시절 스마트폰을 밀어내고, 미친 듯이 폭발적으로 책을 읽어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가 말하는 초등 수학 공부 잘하는 두 번째 비결은 자기주도학습으로 복습을 하는 것이다. 스스로 공부의 목적을 이해하고, 계획하며 실행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자기주도적 공부 태도를 갖고, 끊임없는 복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계속적인 반복의 중요성을 말한다.

세상의 어떤 일이든 한 가지를 완벽하게 습득하기 위해서는 육체와 지성에 아로 새기기 위한 복습, 반복이 필요하다. 초등 수학도 마찬가지다.

더불어 메타인지를 확인하라는 것이다. 메타인지는 어떤 지식을 자신이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인지하는 것이다. 즉 자기가 무엇을 확실히 알고 무엇을 잘 모르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메타인지다.

아이들이 수학에서 메타인지력을 갖출 때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해서 강점은 더 강화시키고, 약점은 더 보충할 수 있다.

탁월함이 아니라 꾸준함이 승리한다고 했다. 저자는 공부도 습관임을 말한다. 매일 빠지지 않고 단 10분이라도 수학 문제를 접하고 풀어보려는 습관적 노력이 중요하다.



부끄럽지만 개인적으로 수포자였다. 고교 2학년 때 수학을 포기했다. 해도 해도 안되는 학문을 왜 만들어서 사람을 힘들게 할까 원망하며 숱한 세월을 보냈다. 그때는 수학이 안되는 이유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학부모가 되고 본서와 같은 책을 통해 알았다. 수학은 국어다! 문해력이 안되면 결코 통과할 수 없는 학문.

내 나라 말도 이해를 못하는 데 어떻게 연산이 가능할까? 초등 수학의 효과적 공부법을 알려주는 본서가 수학으로 힘들어하는 자녀를 둔 부모에게 작지 않은 조언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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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성의 만화 한국사 1 전근대편 - 역사의 흐름이 한눈에 읽히는 최태성의 만화 한국사 1
최태성 지음, 김연큐 그림 / 메가스터디북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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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님의 <먼나라 이웃나라>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계사를 만화로 그려 내어 명실상부 국민 역사 만화책으로 평가받는다. 복잡한 세계사를 만화로 읽으며 재미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사를 만화로 엮은 책이 나왔다. 국민 역사 강사 최태성 선생님이 김연큐 디자이너와 함께 협업한 <최태성의 만화한국사 1 : 전근대편 / 최태성 지음, 김연큐 그림 / 메가스터디북스>다.


최태성 선생님의 명강의가 만화와 만났다는 사실이 흥미를 끈다. 전근대편과 근현대편 2권이 한 세트로 출간되었고, 우선 전근대편을 펼쳤다.


5000년 한민족의 역사를 단 두 권의 만화책으로 압축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고, 김연큐 작가의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일러스트레이션이 가독성을 높인다.



전근대편은 구석기 시대부터 조선 후기 즉, 개항기 전까지의 한반도 역사를 다룬다. 단순하게 역사 교재를 펴놓고 학습하는 것만큼 역사 공부를 지루하게 만드는 일도 없다. 따라서 수많은 지명과 사건, 인물, 제도 등을 외워야 하는 암기 과목의 대명사인 역사 과목을 만화로 공부한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이다.


물론 지금껏 <먼나라 이웃나라>를 시작으로 만화로 역사를 그려낸 책들이 없지 않지만 <최태성의 만화한국사>는 강사의 지명도와 더불어 내용과 구성에 있어 기존에 출간되었던 작품들과는 여실히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첫째는 매 챕터가 시작될 때 그 단원에서 주로 다루는 이야기를 키워드로 제시해놓았기에 본서를 갖고 공부하는 학습자에게 길라잡이 역할을 해준다.


예를 들어 '치밀하게 짜여진 조선의 시스템'이라는 챕터를 들어가기 전 #조선의 통치 체제 정비 #의정부와 6조 #삼사 #8도체제 #과거제 등과 같이 키워드를 제시하기에 이번 장에서 저자가 말하려는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이정표다.


둘째는 만화책의 본분을 다한다. 역사 만화도 만화책이다. 그렇기에 재미있어야 한다. 조악한 그림에 설명만 잔뜩 적혀있는 만화책은 읽기도 전에 질린다. 본서는 일단 일러스트레이션이 깔끔하여 눈에 쉽게 들어오는 가시적 부분에서 우수하다. 더불어 적당한 배경 설명과 인물의 대사가 균형 잡혀 있다.


최태성 선생님의 탁월한 강의 내용을 만화 속에 빠짐없이 담아내려고 노력한 김연큐 작가님의 애씀이 엿보인다. 또한 만화 속 캐릭터의 센스 있는 대사와 유머가 보는 내내 즐거움을 선사하다.


예를 들어 1170년 무신정변은 고려 시대를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1170년이라는 연도는 중요하기에 암기해야 하는데 무신들이 문신들을 죽이는 장면을 그리면서 일(1) 났네 일(1) 났어, 일(1)을 치(7)고(0)야 마는구나! 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언어유희를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통해 공부한 경험이 있었기에 <최태성의 만화한국사>는 강의를 복기해 보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번 책을 통해 크게 도움을 받은 부분은 조선 중후기의 붕당에 관한 내용이다. 항상 혼란스러웠던 내용이 붕당을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서인 남인, 동인, 북인, 노론, 소론과 같은 붕당의 이름과 그들이 추구했던 정치 노선, 각 붕당 간 정쟁 이슈, 대표적 인물이었다.


만화를 통해 각 붕당을 원형 그래프로 설정하고 고유의 색깔과 모양으로 붕당을 표현하면서 각각의 특징과 정치색, 노선을 이해하기 쉽게 그려냈다. 시각적 표현물의 힘이 제법 강하다. 말로 그렇게 들을 때는 잘 외워지지 않던 내용이 만화로 표현되었을 때 쉽사리 와 닿는다.



출생과 동시에 시청각 매체를 끼고 자라나는 지금의 세대에게 역사를 만화로 접근한다는 것 자체가 획기적이며 효과적임을 깨닫게 된다.


역사는 암기과목이다. 그렇기에 무조건 머리 싸매고 외워야 한다고들 말한다. 일견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옳다고도 볼 수 없다. 


공부에 왕도가 없다 하지만 지름길은 있다. 개념서를 한번 보고, 만화를 통해 복기해 보는 것도 좋다. 기억의 풍화작용에 의해 잊었던 내용들이 만화의 캐릭터가 내뿜는 대사를 통해 생생히 부활하는 희열을 맛볼 수 있다.


<최태성의 만화한국사>는 분명 단순한 역사 만화책이 아니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도 적용 가능한 엄연한 수험 교재가 될 수 있다. 역사 과목의 수많은 내용에 질식할 것만 같은가? 그런 이들에게 본서는 신선한 산소탱크처럼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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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판 사나이 열림원 세계문학 5
아델베르트 샤미소 지음, 최문규 옮김 / 열림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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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장소,환대>라는 인문학 도서의 도입부에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몸담고 있는 사회 속 인간으로서의 자격을 사람의 그림자로 빗댄 알레고리다. 얼마 전 예화의 원작인 <그림자를 판 사나이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 열림원>를 만났다. 


저자인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는 프랑스 태생의 독일 작가다. 귀족 가문으로서 프랑스 혁명 이후 독일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할 때까지 독일에서 작품 생활을 이어갔다. 프랑스인이지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건너 간 망명국 독일은 그에게 제 2의 조국이 되었고, 프랑스 귀환령이 내려졌지만 영원한 독일인으로 남았다. 국적의 경계선 상에 서 있던 저자, 프랑스라는 그림자가 없는 독일인!



이야기는 '페터 슐레밀'이라는 남자가 주머니에서 온갖 잡다한 물건을 꺼내는 기이한 사내를 만나면서부터다. 살아있는 말까지 주머니에서 꺼내는 이 남자의 정체는 악마다.


악마는 슐레밀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화수분처럼 금화가 솟아나는 주머니를 줄테니 당신의 그림자를 내게 파시오!"


악마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앞에 귀가 솔깃하다. 마술 주머니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는 일은 시간 문제다. 달콤한 상상 끝에 슐레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다.


솜씨 좋게 슐레밀의 그림자를 걷어낸 악마는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사라진다. 반면 무한 금화가 쏟아지는 주머니를 손에 넣은 슐레밀은 예상대로 큰 부자가 된다. 하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이야기는 행복 대신 비극의 서막일 뿐.


거리에서 만난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햇살에 비친 슐레밀에게 그림자가 없음을 발견하며 소스라치게 놀란다. 마치 무서운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보듯 경악하며 피한다. 슐레밀이 자신의 그림자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매체였음을 파악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인 '미나'를 만나고, 결혼을 꿈꿨지만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사랑을 잃는다. 아무리 돈이 많은들 사회 속에서 바른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니 비극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슐레밀 앞에 그림자를 걷어 간 악마가 찾아온다. 마법의 금화 주머니를 반납할 테니 그림자를 돌려달라고 애원하는 슐레밀에게 악마는 또 다른 제안을 한다. 마법 주머니는 필요 없고, 대신 슐레밀의 영혼을 팔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는 것!


슐레밀이 죽음을 맞이할 때 영혼을 가져가겠다는 악마의 제안 앞에 슐레밀은 어떠한 결정을 내렸을까? 영혼을 팔고, 그림자를 되찾아 사랑하는 여인 미나와 재회할 수 있을까?



본서를 읽으며 괴테의 <파우스트>가 떠올랐다. 그런데 악마와의 거래라는 소설의 전체적인 서사 구조는 동일하지만 작품의 의미가 갖는 결은 확실히 다르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보이는 주요한 주제는 그림자가 갖는 의미 속에 내포되어 있다. 악마가 엄청난 부를 대가로 지불하며 구입하려고 한 인간의 그림자가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림자를 잃고 난 후 사람들에게 천대받고 따돌림 당하는 슐레밀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돈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인간의 그림자 속에 묻혀 있음을 발견한다. 무의식적 개체인 그림자를 사용한 메타포, 사회 속 인간으로서 수용 가능한 최소한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본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하다. 그림자라는 매개체를 시대와 개인이 처한 상황 속에서 다채롭게 풀이할 수 있기에 의미 또한 제각각이다. 대표적인 해석은 역시나 소설의 전면에 드러난다. 작가가 살다간 18, 19세기 근대 산업혁명 자본주의 사회 속 배금주의와 빈부의 격차로 인한 사회적 연대감의 상실이다.


200여 년 전에 쓰인 작품이 가진 시대적 예지가 놀랍다. 돈을 위해 자신의 자아를 팔아버리는 세대, 사회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자격(인종, 국적, 지위, 재산, 학력, 외모 등)을 갖추지 못했기에 용인되며 환대 받지 못하는 병리적 세태가 지금의 시대상 아닌가?


부에 대한 갈망은 금화주머니를 통해 투사되며 인간이 인간으로서 용납 받지 못하는 상황은 그림자라는 개체로 코드화 되었다. 돈에 대한 끝없는 탐욕과 그림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보편성의 상실이 가져오는 인간 소외, 모든 것이 2024년을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와 한 치의 오차 없이 오버랩되기에 소름 돋는다.


인간 본성과 사회의 정신적 퇴행을 꼬집은 환상 소설, 작품 저변에 짙게 깔린 시대적 적실성을 염두에 두며 읽을 때 또 다른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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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지성적 회심 - 과학, 신앙, 의심의 길을 걷다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홍병룡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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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양립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양자간 첨예한 대립을 이루었던 화두다. 


최근 흥미로운 책 한 권을 만났다.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지성적 회심 /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생명의말씀사 펴냄>은 제임스 패커, 존 스토트를 잇는 21세기 최고의 복음주의 신학자로 불리는 영국 성공회의 신부이며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자서전적 회심기다.


옥스퍼드 출신의 과학자이자 신학자라는 특이한 이력이 깊은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과연 과학과 신학을 모두 섭렵한 석학이 걸어 온 진리의 여정 속 참된 지표는 무엇일까?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린 시절 밤 하늘에 수놓아진 경이로운 천체에 압도되었고, 자연의 위대함과 그것을 해석해내는 과학이라는 렌즈에 남다른 흥미를 드러냈다.


그에게 과학은 오직 이해를 추구하는 학문이었으나 반면 기독교 신앙은 건강한 이성을 지닌 인간에게 있어 한없이 모호하며 불분명한 그 무엇이었다. 창조론부터 말이 되지 않는 신화와 같은 성경 이야기는 근본을 찾을 수 없는 지푸라기와 같이 보잘 것 없다.


비윤리적이며 지극히 단세포적 신앙의 요소들은 과학의 명료성에 비추어볼 때 한없이 무지하며 동시에 야만스러움의 전형이다.


이후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를 만나며 세상과 사회를 이해하는 포괄적 성격의 사상이 가진 경이로움에 감탄한다. 신앙에 대한 자신의 적대감에 마르크스주의만큼 확실한 지적 응원군은 없었다. 철저히 무신론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점이다.


화학과 생물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옥스퍼드에 진학하여 분자생물학을 전공한다. 과학은 우주와 세계에 대한 거시적 의문을 어느 정도 선에서 채워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이성적 툴로서의 기능에는 완벽했으나 우주의 실재와 인간 실존의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이 점차 체감되기 시작한다.


과학은 지성과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와 우주라는 실재가 맞부딪히는 접점에서 온전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 채 뜻밖의 무기력함을 내비쳤다. 


이즈음 옥스퍼드의 수많은 석학들을 만나며 그들이 자신의 신앙과 과학을 조화롭게 이해하며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크나큰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세계 최고의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미신적 신앙을 용인할 수 있을까?


이때 과학과 신앙의 경계에서 혼돈을 경험하던 저자에게 섬광처럼 등장한 구원 투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였다. 


루이스의 저작을 탐닉하며 그가 가진 무신론의 어두운 비늘이 벗겨지는 순간은 마치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톨레 레게(집어들고 읽으라!)는 아이들의 노래 소리에 이끌려 로마서를 집어 읽고 회심 했던 장면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한 당대 최고의 지성 청년 사울의 그것과 같다.


알리스터의 어두운 지성의 장막을 가르고 들어온 눈부신 진리의 빛이 그의 온 영혼을 휘감은 순간이다.


본서의 이로운 점은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엄청난 석학이 걸어온 과학과 신앙의 외줄타기 경험이 진실 되게 녹아있음이다. 


이렇게 똑똑한 사람도 무식한 기독교 신앙에 경도될 수 있을까?



이 책은 기독교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지만 신앙 서적이라고 분류하고 싶지 않다. 그만큼 불신자와 불가지론자에게 훨씬 더 친숙한 책이 아닐까 싶다. 


자! 이제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한 저자가 과학은 신앙보다 열등하다는 주장을 강력하게 펼쳤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서두를 과학과 신앙이 양립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했다. 저자는 과학과 신앙이 서로 싸우고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학은 어느 대상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다. 반면 신앙은 그 대상이 가진 존재적 의미를 밝혀주는 또 다른 역할을 가진다.


과학과 신앙은 이 시대가 가진 다양한 질문에 대해 서로를 보완한다. 과학의 오만을 찾을 수 없고, 신앙의 독단을 배제한다. 강요가 아니기에 저자의 어조는 사뭇 부드럽고 인격적이다. 대답할 수 없는 미지의 질문에 대해 여지를 남겨놓는 지적 여유로움이 독자층의 다양함을 수용한다.


탁월한 학자가 얼핏 모순적 삶의 전형인 과학과 신앙의 두 가지 길을 모두 걸으며 경험하고 느낀 바를 따뜻한 필치로 기록한 저작이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책장을 덮을 때 쯤 과학과 신앙의 공존 가능성 여부는 독자 스스로가 내릴 수 있다. 탁월한 학자의 회심기가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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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 기독교 강요 1 -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 기독교 강요 1
존 칼빈 지음, 문병호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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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성경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 가득한 개혁신학의 바이블, 단연코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아닐까?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1509년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났다. 


칼빈을 말할 때 우리는 위대한 저작 <기독교 강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만큼 이 하나의 저작이 개신교 개혁신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이미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지만 몇 해 전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으로 '생명의말씀사'에서 기념비적 출판을 이루었다.


<기독교 강요 / 존 칼빈 지음, 문병호 옮김 / 생명의말씀사 펴냄>는 국내 최고의 칼빈 권위자로서 총신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문병호 교수님께서 10여 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라틴어 직역의 엄청난 공을 들인 노력의 결과물이다.


총 4권으로 출간된 대작으로서 1권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 파트가 실렸다. 간행사와 역자의 논단만 90페이지가 넘는 것을 볼 때 본서가 갖는 위업이 얼마나 큰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방대한 개신교 교리의 요체인 책의 내용을 단 몇 줄의 서평으로 가늠할 수 없다. 저자는 중세 암흑기를 지나며 로마 가톨릭에 의해 왜곡되고 감춰졌던 진리에 대한 재발견의 작업을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냉정함과 그 누구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사상적 탁월함을 갖춘 지성,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심장으로 거침없이 펼쳤다.



제 1권은 18장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 주는 것만큼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칼빈은 1권 3장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연적으로 부여된 신성에 대한 의식이 있음을 말한다. 즉 신앙의 유무를 떠나 모든 인간에게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의식이 심겨있다. 그렇기에 무지를 핑계치 못한다.


1권 6장부터 9장까지는 성경에 대한 깊은 고찰이다. 하나님을 아는 온전한 지식은 다른 잡다한 사변이나 들끓는 감정적 체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신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다. 성경은 그 자체로 권위를 부여받는다. 성경에 대한 믿음이 교회의 판단에 좌지우지 되지 않음을 강조하며 당시 로마 가톨릭의 맹공에 대항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1장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형상에 대한 논쟁을 보여준다. 비가시적 하나님을 형상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우상숭배다. 형상이 무식자들을 위한 책이라고 변명하는 교황주의자들의 궤변을 단숨에 훼파하는 칼빈의 논조는 날선 비수와 같이 예리하다.


13장은 많은 이들에게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신비로운 삼위일체 교리를 집대성했다. 세 위격으로서 동일본질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위대한 종교개혁자의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다.


마지막 후반부는 섭리 교리에 대한 강론이다. 선과 악은 어떻게 탄생했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을 만드셨는가와 같은 신정론적 내용이 등장한다.


1536년 초판에 이어 23년의 개정을 거쳐 최종판이 완성되었다. 평가하기를 오랜 시간적 간극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판과 개정판 사이에 신앙과 사상적 차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그만큼 칼빈이 견지한 하나님과 성경에 관한 진리가 순수하고 온전한 것이었음을 입증하는 하나의 표지다.



오래 전 타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을 읽은 후 이번에 문병호 교수님의 라틴어 직역 최종판 재독을 시작했다. 가볍게 읽어치워야 하는 저작이 아니기에 다소 시간이 걸리고 독서에 열과 성을 쏟아부어야 한다.


강론 앞에서 무지를 발견하고, 말씀의 빛이 조명하는 짐승 같은 모습을 보며 화들짝 놀란다. 그동안 성경적 진리로 여기며 공공연히 떠들며 가르쳤던 말들이 헛된 망상과 쓰레기 같은 궤변에 지나지 않았음을 발견하며 두려워 떨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탁월한 교사 칼빈은 올바른 교리의 표지는 사람들의 영광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려고 마음을 쏟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결코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편의와 즐거움에 초점을 둔 허상 같은 예배에 대한 칼빈의 경고다.


<기독교 강요>는 결코 어려운 책이 아니다.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만이 읽는 책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과 개신교 신앙을 제대로 알고 배우며 신앙생활 하기 원하는 신자라면 성경 옆에 <기독교 강요>를 두고 읽어보길 권한다.


내가 믿고 따르는 신앙의 요체를 모르고 믿는 무모함이야말로 무지의 전형이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크나큰 사랑을 견지한 칼빈의 위대한 저작, 모든 신자의 필독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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